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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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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2-18-나(按)
按 自昔危亂之世 未嘗無忠言하니 而三君 不之聽者
蓋其心 旣不仁이라 故顚倒迷繆하여 以危爲安하며 以菑爲利하여 以取亡之道 爲可樂也
夫人君 孰不欲安存而惡危亡이리오마는 而其反易至此者 私欲 蔽障而失其本心故爾
而能聽田千秋 故漢不至於亂하고 故唐不至於亡하니
信乎不仁而可與言이면 猶可以存其國也니라 雖然이나 亦僅免於亡而已
若仁人 在上이면 雖居治安之世而樂聞危亂之言이라 是以 而無後患하나니 此豈武帝‧德宗所及哉리오


原注
12-18-나(按)
[臣按] 예로부터 위태롭고 어지러운 세상에 충언이 없던 적은 없었으니, 일찍이 祖伊가 紂王에게 간하였으며, 召 穆公이 厲王에게 간하였으며, 李斯가 二世에게 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 임금이 이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은,
그 마음이 이미 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되고 미혹되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여기고 재앙을 이익으로 여겨서 망함을 취하는 도를 즐겁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무릇 임금이라면 누군들 자기 나라가 안정되고 보존되는 것을 원하지 않겠으며 위태롭고 망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대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단지 私欲이 가려서 그 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漢 武帝가 늙어서도 田千秋의 충언을 들을 줄 알았기 때문에 漢나라가 어지러운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이며, 唐 德宗이 몽진을 가면서도 陸贄의 충언을 들을 줄 알았기 때문에 唐나라가 망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仁하지 않은 데도 더불어 말할 수 있다면 그래도 자기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또한 망하는 것을 겨우 면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仁者가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 비록 태평하고 안정된 세상에 살더라도 위태로움과 어지러움을 경계하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장구하게 태평치세를 이어가면서도 훗날의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한 무제와 당 덕종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역주
역주1 祖伊……紂矣 : 祖伊는 商 紂王의 신하이다. 商 湯王의 재상으로 《書經》 〈仲虺之誥〉를 지었던 仲虺, 《書經》 〈高宗肜日〉을 지어 商 武丁에게 仁政을 행할 것을 권했던 祖己의 후손이다. 상나라 말 周 文王에게 歸附하는 제후들이 많아지자 상 주왕에게 仁政을 행하라고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書經》 〈西伯戡黎〉는 그가 지은 것으로, 주 문왕, 즉 西伯이 상나라 제후국의 하나인 무도한 黎나라를 정벌했다는 뜻이다.
역주2 召穆……王矣 : 召 穆公은 周 厲王 때의 제후로, 이름은 虎이다. 주 여왕의 虐政에 國人이 왕궁을 포위한 적이 있었는데, 태자 靖, 즉 훗날의 周 宣王을 숨기고 자신의 아들을 내주었다. 주 선왕 때 淮夷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毛序에 따르면, 《詩經》 〈大雅 民勞〉는 소 목공이 주 여왕을 경계한 시이다.
역주3 李斯……世矣 : 李斯(기원전 280~기원전 208)는 秦나라 승상으로 秦 始皇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통일한 뒤 진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만들고 문자‧수레 규격‧화폐‧도량형 등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진 시황 사후 환관 趙高와 모의하여 태자 扶蘇를 자살하게 만들고 어린 왕자 胡亥를 二世 황제로 옹립하였다. 호해가 즉위한 뒤 齊 簡公의 신하였던 田常이 세력을 키워 齊나라를 차지했던 사례를 들어 조고를 경계하도록 간하였으나, 호해는 오히려 조고의 모함을 믿고 咸陽에서 이사를 腰斬에 처하였으며 三族을 멸하였다. 《史记 卷87 李斯列传》
역주4 武帝……千秋 : 田千秋(?~기원전 77)는 前漢 馮翊 長陵 사람으로, 車千秋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齊나라 왕실 후손으로, 富民侯에 봉해졌다. 漢 武帝(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 戾太子 劉據(기원전 128~기원전 91)가 江充(?~기원전 91)의 誣告를 받자 강충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당시 吏民들간에 巫蠱로 서로 고소하는 일이 많았는데, 征和 3년(기원전 90) 9월에 高寢郞이었던 전천추가 태자의 원통함을 무제에게 알려 밝히자 무제는 잘못을 깨닫고서 강충의 집안을 멸족하고 전천추를 大鴻臚에 임명하였다. 昭帝가 즉위한 뒤 그에게 小車를 타고 궁궐 안을 출입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車丞相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자손들이 ‘車’로 성을 삼게 되었다. 강충의 무고에 관한 일은 13-3-나(按) ‘晩年……爲之’ 주석 참조.
역주5 : 대전본에는 ‘麾’, 사고본에는 ‘老’로 되어 있다.
역주6 德宗……陸贄 : 陸贄(754~805)는 唐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이다. 唐 德宗 建中 4년(783)에 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奉天으로 몽진 가는 덕종을 수행했는데, 덕종에게 허물을 자신에게 돌려 인심을 감동시키라고 권하였다. 덕종은 육지의 간언을 받아들여 민심을 안정시킴으로써 반란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역주7 長治久安 : 《前漢書》 卷48 〈賈誼傳〉에 “영구히 안정된 국면을 건립하고 장구하게 통치할 기업을 이루어 祖廟를 받들고 六親을 봉양하는 것이 지극한 孝이다.[建久安之勢 成長治之業 以承祖廟 以奉六親 至孝也]”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역주8 : 사고본에는 없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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