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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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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侍臣盜賊한대 宇文述 曰 漸少하니이다 曰 比從來컨대 少幾何 對曰 不能什一이니이다
19-1-가
煬帝가 侍臣에게 도적의 정황에 대해 묻자, 宇文述이 말하였다.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양제가 말하였다. “예전에 비하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우문술이 대답하였다. “십분의 일도 안 남았습니다.”
納言 曰 臣非多少어니와 但患漸近하노이다 帝曰 何謂也
納言 蘇威가 말하였다. “신이 맡은 직무가 아니라서 얼마나 되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단지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걱정될 뿐입니다.” 양제가 말하였다. “무슨 말인가?”
하고 且往日租賦丁役 今皆何在
소위가 대답하였다. “종전에는 도적이 멀리 長白山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가까이 汜水에 있습니다. 게다가 전일의 조세와 부역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지금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豈非其人 皆化爲盜乎잇가 比見奏賊 多不以實하여 遂使失於支計하여 不時하고
어찌 그 사람들이 모두 도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보니 賊情에 대한 보고를 대부분 사실대로 알리지 않아서 마침내 대책을 합당하지 않게 함으로써 제때에 도적을 없애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又昔在鴈門 許罷征遼러니 今復徵發하니 賊何由息이리잇고 不悅而罷하다
또 지난번에 鴈門에서 요동 정벌의 중단을 허락하셨는데 이제 다시 군사를 징발하니 도적이 어떻게 종식되겠습니까.” 양제가 언짢아하며 논의를 그만두었다.
又問伐高麗事어늘 欲帝 知天下多盜하여 對曰 今玆之役 願不發兵하고 但赦群盜하면 自可得數十萬이니
후에 양제가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는 일에 대해 묻자 蘇威는 양제로 하여금 천하에 도적이 많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번 전쟁에는 바라옵건대 군사를 징발하지 말고 다만 도적들을 사면해준다면 저절로 수십만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遣之東征하면 彼喜於免罪하여 爭務立功하리니 高麗 可滅이니이다러니
그들을 보내 동방을 정벌한다면 그들은 면죄받은 것을 기뻐하여 다투어 공을 세우려고 힘쓸 것이니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양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커늘 御史大夫裴 曰 此 大不遜이로소이다 天下何處 有多許賊이리오
소위가 나가자 御史大夫 裴蘊이 말하였다. “이는 대단히 불손한 말입니다! 천하 어디에 많은 도적이 있겠습니까!”
曰 老革 多姦注+老革, 猶言老兵.하여 以賊脅我하니 欲批其口호대 且復隠忍호라
양제가 말하였다. “늙은 놈이 간사함이 많아서注+‘老革’은 ‘老兵’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도적으로 나를 협박하니 그 주둥이를 쳐버리고 싶지만 잠시 다시 억눌러 참노라.”
한대 令案驗하여 獄成 除名爲民하다
배온이 양제의 뜻을 알고 사람을 보내 소위의 죄를 무함하여 상주하자, 조사해서 검증하게 하였다. 獄案이 이루어지자 削籍하여 庶人으로 만들었다.
역주
역주1 19-1-가 : 《資治通鑑》 卷183 〈隋紀7 煬帝 下〉 大業 12년(616) 5월 壬午 조에 보인다.
역주2 蘇威 : 534~623. 隋 文帝‧煬帝의 재상이다. 자는 無畏이다. 北周 京兆 武功 사람이다. 개황 원년(581)에 太常卿‧太子少保에 제수되었다. 高熲과 朝政을 參掌하여 문제를 보좌하였다. 개황 12년(593)에 私黨을 결성하였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후 복직과 면직을 거듭하다가 大業 원년(605)에 尙書左僕射‧上大將軍이 되었다. 대업 3년(607)에 장성의 노역과 고구려 원정의 중단을 청하였으나, 高熲 등이 주살될 때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후에 太常卿‧納言으로 朝政에 참여하였고 開府儀同三司에 올랐는데, 宇文述‧裴矩‧裴蘊‧虞世基 등과 더불어 ‘五貴’로 불렸다. 대업 11년(614)에 반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양제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어사대부 배구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다. 江都의 병변 이후에는 사세의 변화에 따라 宇文化及‧李密‧王世充 등에게 귀부하였는데 무덕 4년(621)에 秦王 李世民과 唐 高祖 李淵에게 拜見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역주3 : 사고본에는 ‘職’으로 되어 있다.
역주4 : 사고본에는 ‘知’로 되어 있다.
역주5 他日……汜水 : 隋 煬帝 大業 6년(610)에 裴矩가 고구려 정벌을 양제에게 권하여 東萊의 海口에서 전함 3백 척을 건조하게 하고, 이보다 앞서서 천하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涿郡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후 전쟁 준비에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많은 백성이 群盜가 되었는데, 처음에 鄒平縣의 백성인 王薄은 무리를 모아 長白山을 점거하고 제군과 제북군의 교외에서 노략질을 자행하며 자칭 知世郞이라고 하였다. 장백산은 山東省 濱州 鄒平縣, 齊南 章丘, 淄博 周村區의 交界地에 있는 산이다.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대업 12년(616)에는 韋城縣의 翟讓이 瓦崗에서 群盜 1만여 명을 모아 봉기하니 같은 고을 사람인 徐世勣과 李密 등이 호응하였다. 후에 이밀이 우두머리가 되어 대업 13년(617)에 형양과 낙구창을 점령하고 낙양을 압박하였다. 汜水는 지금의 河南省 滎陽市에 있는데, 轉運과 군사의 요충으로 虎牢關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漢代에 成皐縣이 설치되었는데, 隋代에 汜水縣으로 고쳤다.
역주6 : 사고본에는 ‘剪’으로 되어 있다.
역주7 : 대전본‧사고본에는 ‘懌’으로 되어 있다. ‘懌’은 朝鮮 中宗의 諱字이다.
역주8 : 사고본에는 ‘縕’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9 蘊知……威罪 : 배온이 河南의 布衣 張行本을 시켜 소위가 대업 9년(613)에 양제를 배종하여 遼東에서 高陽으로 돌아왔을 때 소위가 인재의 선발을 관장하면서 관직의 제수를 남발하고 돌궐을 겁내어 경사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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