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3)

대학연의(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原注
16-8-나(按)
按 德宗 知人之明所短이라 故於則不覺其姦邪하고하며
之勳 之忠則疎斥之‧擯廢之하고 之欺罔 之躁劣則親信之‧寄任之하니 以佞爲忠하며 以直爲 未有甚焉者也로되
顧能於擧目之頃而識李藩하니 蓋當是時하여 未有私見之汨故也 若盧杞‧姜公輔諸人則有愛惡之私焉이라 故識鑑之昏明 若是其異也
이라하니 使德宗持心之平無所適莫 常如李藩之時則於諸臣之邪正 必不至易位矣리니 後之人主 可不戒諸잇가


原注
16-8-나()
[신안臣按] 덕종은 인재를 알아보는 명철함이 가장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기盧杞에 대해서는 그의 간사함을 깨닫지 못하였고 강공보姜公輔에 대해서는 그가 정직함을 팔아먹는다고 의심하였으며,
이성李晟공훈功勳육지陸贄의 충성에 대해서는 멀리하고 밀어냈으며 배연령裴延齡의 기망과 위거모韋渠牟의 조급함‧비열함에 대해서는 친근히 하여 믿고 맡겼으니, 간녕奸佞을 충성으로 여기며 정직을 광망狂妄으로 여기는 것이 덕종보다 심한 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李藩을 보자마자 이번의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 이 당시에는 사견私見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기와 강공보 등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심이 있었기 때문에 감식의 어두움과 밝음이 이처럼 달랐던 것입니다.
옛 글에 이르기를 “공정함은 밝음을 낳고 치우침은 어두움을 낳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덕종의 마음가짐이 공평하여 치우친 데가 없는 것이 늘 이번을 보았을 때처럼 하였다면 신하들의 간사함과 올바름에 있어서 틀림없이 기준이 바뀌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니, 후대의 임금이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역주
역주1 : 대전본‧사고본에는 ‘爲’로 되어 있다.
역주2 盧杞 : ?~785?. 자는 子良으로 滑州 靈昌 사람이다. 玄宗 때 재상을 지낸 盧懷信의 후손이다. 용모가 추하고 안색이 검어 귀신과 같은 외모였으나 언변이 좋았다. 門蔭으로 출사하여 監察御史‧刑部 員外郞‧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으며 德宗 建中 2년(781)에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현능한 이를 질투하여 늘 동료를 모해하였는데, 그의 흉계로 楊炎‧崔寧‧顔眞卿‧蔡廷玉 등이 죽임을 당하고 張鎰‧嚴郢‧杜佑‧李揆 등이 폄적되었다. 建中 4년(783)에 涇原의 군대가 長安을 함락시켰는데 朔方 節度使 李懷光이 글을 올려 그의 죄를 성토하자 新州 司馬로 폄적되었다. 후에 灃州 別駕로 나갔다가 灃州에서 죽었다.
역주3 姜公輔 : ?~805. 愛州 日南 사람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校書郞‧左拾遺‧翰林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德宗 때 朱滔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형인 朱泚에게 밀서를 보내자 강공보는 덕종에게 주차를 주살하라고 간하였으나 덕종은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 涇原에서 병변이 일어나 장안이 혼란에 빠지자 鳳翔으로 가려던 덕종에게 극력 간언하여 奉天으로 몽진하게 하였다. 덕종 建中 4년(783)에 諫議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덕종의 딸 唐安公主의 장례 문제에 대해 간언하다가 덕종의 노여움을 사 太子左庶子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泉州 別駕로 폄적되었다. 順宗이 즉위하고 나서 吉州 刺史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헌종 때 禮部 尙書에 추증되었다.
역주4 疑其賣直 : 興元 원년(784)에 李懷光이 난을 일으키자 덕종이 梁州로 피난 가던 도중에 덕종의 딸인 唐安公主가 죽었다. 덕종은 매우 슬퍼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라고 명했다. 이에 姜公輔가 반대하자 덕종이 노하여 翰林學士 陸贄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육지는 강공보가 諫議大夫이자 재상으로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변호하였다. 그러자 덕종은 “그렇지 않다. 짐은 강공보의 재주가 재상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또 그 자신이 해직을 청하였기에 짐이 이미 윤허하였다. 그가 내심 앞으로 파직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직함과 명성을 팔아먹었을 따름이다.[不然 朕以公輔才不足以相而又自求解 朕旣許之 內知且罷 故賣直售名爾]”라고 말하였다. 《新唐書 卷152 姜公輔傳》
역주5 李晟 : 727~793. 자는 良器로 洮州 臨潭 사람이다. 소싯적부터 문무를 겸전하고 담력이 출중하였는데 18세부터 종군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代宗 大曆 4년(769)에는 開府儀同三司가 되고 左金吾大將軍을 겸했으며 合川郡王으로 봉해졌다. 德宗 建中 2년(781)에 田悅‧朱滔‧王武俊의 반란을 평정하고, 2년 후에 李懷光과 함께 朱泚를 패퇴시켰다. 興元 원년(784)에 마침내 長安을 수복하고 주차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尙書左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얼마 후에 西平郡王으로 轉封되었다. 貞元 3년(787)에 吐藩이 사신을 보내어 덕종에게 참소하자 병권을 박탈당하고 太尉‧中書令이 되었다. 시호는 忠武이다.
역주6 陸贄 : 754~805. 자는 敬輿로 蘇州 嘉興 사람이다. 代宗 大曆 6년(771)에 進士가 되었으며, 德宗이 태자로 있을 때 그 명성이 알려져 翰林學士가 되었다. 덕종 建中 4년(783)에 朱泚가 난을 일으키자 덕종을 호종하여 奉天으로 가서 詔書와 勅令을 기초하였다. 덕종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中書舍人이 되었으며 貞元 8년(792)에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덕종에게 上書하여 時政의 득실을 논하고 널리 현인을 등용하자고 주장했으며, 兩稅法 이외에 부과되던 雜稅를 철폐하고 훌륭한 장수들을 발탁하여 변경을 공고히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 聖寵을 받아 교만했던 裴延齡과 대립하였는데 貞元 10년(794)에 배연령의 모함으로 재상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이듬해 忠州 別駕로 폄적되었다가 順宗이 즉위하여 詔書를 내려 복직시켰으나 도착하기 전에 졸하였다. 저서에 《陸宣公奏議》가 있으며 시호는 宣이다.
역주7 裴延齡 : 728~796. 河中 河東 사람이다. 덕종 때 膳部 員外郞‧司農少卿‧翰林院 直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戶部 侍郞으로 있을 때에는 재무에 익숙치 않아 늘 서리들과 일을 도모하였으며 左藏庫에 원래 있던 재물을 여섯 개의 別庫에 나누어 보관함으로써 덕종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재상으로 있던 陸贄는 그 말이 허탄하다고 비난하면서 그가 재무를 관장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덕종은 육지를 폄적시키고 배연령을 더욱 후대하였다. 배연령이 죽자 사람들은 기뻐하였으나 덕종만 슬퍼하였다고 한다. 憲宗 때에 繆(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주8 韋渠牟 : 749~801. 京兆 萬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도사가 되었다가 승려가 되고 다시 환속하였다. 덕종 때 秘書郞이 되어서는 황제에게 700자에 달하는 시를 지어 올렸으며, 얼마 후 右補闕‧諫議大夫가 되었다. 陸贄가 재상에서 파면된 후 덕종으로부터 裴延齡 등과 함께 신임을 받아 그 권세가 황제에 버금갔다. 시호는 忠이다.
역주9 : 대전본‧사고본에는 ‘狂’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公生明偏生闇 : 《荀子》 〈不苟〉에 보인다.
역주11 : 사고본에는 없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