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聚斂으로 驟遷하여 歲中에 領十五餘使하고 遷給事中兼御史中丞하여 專判度支하니 恩幸이 日隆이러라
八載春
月
에 引百官
하여 觀左藏
하시고 賜帛有差
하시다 是時
에 州縣
이 殷富
하여 倉庫粟帛
이 動以
計
라
楊釗
가 奏請所在
에 하여 輕賫
하고 及徵
‧地稅
를 皆變布帛
하여 輸京師
하고
屢奏帑藏充
이 古今罕儔
라 故上
이 率群臣觀之
하시고 賜釗
하시다
上
이 以國用豐衍
이라 故視金帛如糞土
하여 賞賜貴寵之家
를 無有限極
注+釗後更名國忠. .하더라
24-8-가4
魚袋 탁지낭중 양소度支郞中 楊釗가
현종玄宗의 마음속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잘 엿보아 이에 영합했는데,
가렴주구로 빠르게 승진하여 1년 사이에 열다섯 남짓 되는 사직使職을 겸하고 급사중 겸 어사중승給事中 兼 御史中丞으로 승진하여 탁지度支 업무를 전담하니 현종의 은총이 날로 커졌다.
천보天寶 8년(749) 봄 3월에 현종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좌장고左藏庫를 둘러보고서 차등을 두어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 당시에 주현州縣이 부유하여 창고의 곡식과 비단이 걸핏하면 천 단위로 헤아려졌다.
양소가, 전국 곳곳에 오랜 동안 쌓여 있는 물자들을 꺼내 경화輕貨로 바꾸게 하고 거두어들인 정조丁租와 지세地稅를 모두 포백布帛으로 바꾸어 경사京師(장안長安)로 수송하자고 주청하였다.
그리고 국고가 충실한 것이 고금에 비견될 사례가 드물다고 여러 차례 상주하였다. 이 때문에 현종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좌장고를 둘러본 것이며 양소에게 금어대金魚袋와 자의紫衣를 하사하였다.
현종은 나라의 재용이 풍족해졌기 때문에 황금과 비단을
분토糞土처럼 하찮게 보아서 총애하는
권귀權貴 집안에 상을 내리기를 한정 없이 하였다.
注+양쇠楊釗는 후에 이름이 ‘국충國忠’으로 바뀌었다. 양국충에 관한 일은 앞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