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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5)

대학연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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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宰相호대 今歲雖豐이나 百姓 贍足否
曰 農家 歲凶則死於流殍하고 歲豐則傷於穀賤하나니 豐凶皆病者 惟農家 爲然하니이다
記進士 云 二月賣新絲하고 五月糶新穀이라 醫得眼이요 剜却心頭肉이라하니
語雖鄙俚하나 曲盡田家之情狀하니 農於四民之中 最爲勤苦 人主 不可以不知也니이다 하여 命左右錄其詩하여 常諷誦焉하더시다


27-14-가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재상 풍도馮道에게 물었다. “올해 비록 풍년이 들기는 했지만 백성들이 넉넉한가?”
풍도가 대답하였다. “농가에서는 한 해 농사가 흉작이면 떠돌다가 길에서 굶어죽고 한 해 농사가 풍작이면 낮은 곡물 값에 피해를 입으니, 퓽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힘든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렇습니다.
신이 기억하건대, 진사進士 섭이중聶夷中의 시에 이르기를 ‘이월에 새 명주실 팔고 오월에 새 곡식을 파네. 눈앞의 종기 치료하느라 심장의 살을 도려내네.’라고 하였습니다.
사용한 어휘는 저속하지만 농가의 실정을 남김없이 말하고 있으니 농민은 네 종류의 백성 중에 가장 수고롭고 힘든 백성입니다. 군주가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명종이 기뻐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 시를 기록하여 항상 이를 외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27-14-가 : 《資治通鑑》 권276 〈後唐紀5 明宗 中之上〉 天成 4년(929) 9월 기사에 보인다.
역주2 後唐明宗 : 867~933. 재위 926~933. 오대십국 시기 後唐의 제2대 황제 李嗣源이다. 초명은 邈吉烈이며 칭제 후에 李亶으로 개명하였다. 시호는 聖德和武欽孝皇帝, 묘호는 明宗이다. 代北 沙陀族으로 본래는 성씨가 없었으나 晉王 李克用의 양자가 되면서 성명을 하사받았다. 용맹함으로 이름이 났다. 뒤에 莊宗 李存勖을 도와 후당을 건립하였다. 후당 장종 同光 4년(926)에 鄴都의 兵變을 진압하러 갔다가 도리어 병변을 일으킨 군사들과 함께 회군하여 洛陽을 쳐서 황제가 되었다. 즉위한 뒤 그동안의 폐정을 개혁하였다. 933년 11월에 秦王 李從榮의 반란 소식을 병석에서 듣고 놀라 67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능은 徽陵이다.
역주3 馮道 : 882~954. 오대십국 시기 後唐의 재상이다. 자는 可道, 호는 長樂老이며,瀛州(영주) 景城 사람이다. 당나라 말기에 燕王 劉守光을 섬겼고, 이후 後唐․後晉․後漢․後周의 네 왕조에서 10명의 황제를 섬겼다. 病死하였다. 후당에서 후주에 이르는 시기에 九經 문자를 교감하여 판각하는 일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五代監本’이라고 한다. 중국 최초의 經書 官刻本이다. 시호는 文懿이다.
역주4 聶夷中 : 837~?. 唐나라 말기의 시인이다. 자는 坦之, 河東 사람이다. 일설에 河南 사람이라고도 한다. 출신이 빈한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唐 懿宗 咸通 12년(871)에 進士가 되었다. 長安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가 華陰尉에 겨우 보임되었는데, 임지에 도착했을 때 琴과 책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는 五言詩가 대부분인데, 통치자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시가 많다. 대표 작품으로는 〈詠田家〉, 〈田家二首〉, 〈短歌〉, 〈早發鄴北經古城〉, 〈雜怨〉 등이 있다.
역주5 : 五言律詩 〈詠田家〉를 이른다. 〈傷田家〉라고도 한다. 저본에 인용한 구절은 이 시의 首聯과 頷聯이다.
역주6 : 사고본에는 ‘下’로 되어 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悅’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5)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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