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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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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相하여 內結注+守澄, 宦官之用事者.하니 勢傾朝野러니 每承顧問 嘗排抑之하니
逢吉 患之而 待遇方厚 不能遠也러니 이어늘
逢吉 薦紳宜在라한대 以中丞이라하여 不疑而可之하시다
爭<확인 chi="御史臺" key="201" kor="어사대" 비고="대만 태그로">臺參이러니 逢吉 奏二人 不恊이라하여 한대
愈‧紳 入謝어늘 各令自叙其事하시고 乃深하사 하시다


20-13-가
목종穆宗이봉길李逢吉이 재상이 되어 안으로 추밀사 왕수징樞密使 王守澄과 결탁하니注+왕수징王守澄은 환관 중에 권력을 전횡한 자이다. 그 권세가 조야朝野를 뒤흔들었다. 오직 한림학사 이신翰林學士 李紳이 매번 목종의 고문顧問을 받들 때마다 항상 그를 배척하고 억누르니,
이봉길이 이를 골칫거리로 여겼지만 목종의 〈이신에 대한〉 대우가 한창 두터울 때라 멀리 내쫓을 수가 없었다. 마침 어사중승御史中丞의 자리가 비었는데
이봉길이 이신을 추천하여 기강을 바로잡는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하자, 목종은 어사중승 역시 차대관次對官이라 하여 의심하지 않고 이를 윤허하였다.
韓愈韓愈
그 당시 이신李紳경조윤 한유京兆尹 韓愈어사대御史臺참알參謁 문제로 다투었는데, 이봉길李逢吉목종穆宗에게 두 사람이 불화한다고 아뢰어, 목종은 한유를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임명하고 이신李紳강서관찰사江西觀察使에 임명하였다.
한유와 이신이 사은하러 들어오자 목종은 각각 그 일을 직접 말하도록 하였다. 목종은 마침내 깊이 깨닫고 다시 한유를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임명하고 이신을 병부시랑에 임명하였다.
경종敬宗이 즉위하자 이봉길은 또 이신이 앞으로 경종에게 해로울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이신은 단주사마端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역주
역주1 20-13-가 : 《資治通鑑》 권243 〈唐紀59 穆宗下〉 長慶 3년(823) 9월‧10월, 長慶 4년(824) 2월 조에 보인다.
역주2 穆宗 : 795~824. 재위 820~824. 武則天을 포함하면 당나라 제14대 임금으로 휘는 恒이다. 초명은 宥이며 시호는 睿聖文惠孝皇帝이다. 憲宗(778~820)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 建安郡王에 봉해지고 나중에 遂王에 進封되었다. 헌종 元和 7년(812)에 惠昭太子 李寧이 죽자 황태자에 책립되고 이름을 李恒으로 바꾸었다. 820년에 환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격구와 음악에 빠져서 오랫동안 조회를 보지 않아 환관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盧龍‧成德‧魏博 3鎭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할 힘이 없어 그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절도사로 삼았다. 金石之藥을 좋아하여 金丹을 복용하다가 죽었다.
역주3 李逢吉 : 758~835. 당나라 때의 재상이다. 자는 虛舟이며 鄭州 사람이다. 德宗 때 左拾遺가 되었으며 憲宗(재위 805~820) 때 給事中, 皇太子侍讀, 中書舍人을 거쳐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간사하고 시기심이 많은 것을 안 헌종에 의해 劍南東川節度使로 쫓겨났다가 穆宗(재위 820~824)이 즉위하여 侍讀의 舊恩으로 불러서 兵部尙書에 임명하였다. 敬宗(재위 824~826) 때 淳國公에 봉해지고 右僕射를 겸하였다. 張又新 등과 붕당을 지어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아 ‘八關十六子’로 불린다. 文宗(재위 826~840) 때 太子太師‧東都留守에 임명되고 尙書左僕射가 되었다. 司徒로 致仕하였다. 시호는 成이다.
역주4 知樞密 : 관직명으로 代宗 永泰(765) 연간에 설치한 樞密使를 이른다. 환관이 담당하였으며, 주로 表奏를 관장하고 종종 中書省의 정무에 관여하였다.
역주5 王守澄 : ?~835. 唐 憲宗‧穆宗‧敬宗‧文宗 때의 환관이다. 자는 履道이며 호는 初寮이다. 세 차례 황제의 폐립에 관여하였다. 15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매관매직하였다. 문종이 즉위하고 驃騎大將軍에 임명되었으나 뒤에 환관 내부의 분열을 이용한 문종에 의해 賜死되었다.
역주6 翰林學士 : 관직명으로, 일정한 정원이 없었다. 唐 玄宗 開元 26년(738)에 翰林供奉을 고쳐 설치한 것으로,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朝臣으로 充壬하였다. 德宗 이후 황제의 최측근에서 고문을 담당하였다. 長相의 任免, 태자의 책립, 정벌의 선포나 대사면의 詔命을 모두 學士院에서 먼저 起草한 뒤 다음날 신하들을 모아놓고 선포하였다. 制誥는 본래 中書舍人의 직무였기 때문에 중서사인이 관장하는 정식 詔勅은 ‘外制’, 한림학사가 관장하는 황제의 특수한 文告는 ‘內制’라고 칭하였다. 唐代 후기에는 종종 한림학사를 재상으로 승진시켰으며 한림학사를 內相이라고도 불렀다.
역주7 李紳 : 772~846. 唐代의 재상이자 시인이다. 자는 公垂이며 지금의 안휘성 亳州市 譙城區인 亳州 譙 사람이다. 젊었을 때 지금의 강소성인 潤州의 無錫 惠山寺에서 독서하였다. 憲宗 元和(806~820) 연간에 進士에 합격하여 元稹‧白居易와 교유하였다. 穆宗(재위 820~824) 때 李德裕 黨의 중요 인물로서 右拾遺, 翰林學士, 御史中丞, 戶部侍郞 등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목종 長慶 4년(824)에 이덕유가 실각하자 이신 역시 지금의 광동성 肇慶市인 端州司馬로 좌천되고, 이후 江州刺史, 滁(저)州刺史, 壽州刺史 등을 역임하였다. 文宗 太和 7년(833)에 이덕유가 재상이 되자 이신 역시 浙東觀察使로 기용되었다. 武宗(재위 840~846) 때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尙書右僕射‧門下侍郞에 임명되었으며 趙國公에 봉해졌다. 재상으로 있은 지 4년 만인 844년에 중풍으로 사직한 뒤 무종 會昌 6년(846)에 病死하였다. 사후에 太尉에 추증되었다. 이신의 시 중 〈憫農〉 2수가 유명한데, 특히 “온 세상에는 노는 밭이 없는데, 농부는 여전히 굶어죽는구나.[四海無閑田 農夫猶餓死]” “누가 알까 소반의 밥이, 알알이 모두 신고의 산물임을.[誰知盤中餐 粒粒皆辛苦]” 구절은 명구로 회자되어 憫農詩人이라 불린다. 시호는 文肅이다.
역주8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9 御史中丞 : 관직명이다. 당나라 중기 이후 송나라 때까지 御史臺의 장관인 御史大夫는 임명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어사대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관리들의 탄핵, 刑案의 심리, 어가의 거둥 때 先導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특히 탄핵은, 大事일 경우에는 어사중승만이 상주할 수 있었고 小事일 경우에는 어사들이 상주하되 반드시 어사중승의 서명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 권한이 컸다.
역주10 : 대전본에는 ‘鈌’로 되어 있다.
역주11 風憲之地 : 백관을 규찰하여 기강을 바로잡는 직임을 가진 御史臺의 벼슬을 이른다. ‘風憲’은 풍기와 법도이다.
역주12 次對官 : 황제가 召對할 때 재상에게 먼저 물어보고 그 다음 常參官들이 기다렸다가 차례로 대답하는데, 바로 이 상참관들을 차대관이라고 한다.
역주13 紳與……臺參 : ‘臺參’은 당나라 제도의 하나로, 京兆尹이 부임할 때 御史臺에 가서 參謁해야 하는 규정을 이른다. ‘爭臺參’은 이봉길이 이 제도를 이용하여 李紳과 韓愈를 다투게 한 일을 이른다. 이봉길은 먼저 李紳을 추천하여 御史中丞이 되게 하고 이어서 韓愈를 추천하여 京兆尹 兼御史大夫가 되게 하였는데, 어사대부는 어사중승보다 지위가 높기 때문에 한유가 어사대에 대참을 가지 않음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역주14 韓愈 : 768~824. 당나라 때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자는 退之이며 지금의 하남성 孟州市인 河南 河陽 사람이다. 자칭 郡望昌黎라고 하였다. 韓昌黎, 昌黎先生, 韓文公으로도 불린다. 唐 德宗 貞元 8년(792)에 進士에 합격하고 監察御史를 역임하였다. 덕종 貞元 19년(803)에 權臣의 무고를 받아 陽山으로 폄적되고 뒤에 다시 史館修撰, 中書舍人 등에 임명되었다. 憲宗 元和 12년(817)에 裴度의 行軍司馬가 되어 淮西의 반란군 吳元濟를 토벌하는 계획에 참여하였으며, 원화 14년(819)에는 부처의 사리를 맞이하는 일을 간하였다가 潮州로 폄적되었다. 만년에 吏部侍郞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韓吏部라고도 불린다. 唐代 古文運動의 개창자이며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柳宗元과 함께 韓柳로 병칭된다. 病死하였다. 사후에 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文이다.
역주15 以愈……察使 : 穆宗 長慶 3년(823) 10월 5일 丙戌日의 일이다.
역주16 : 사고본에는 ‘悟’로 되어 있다.
역주17 復以……侍郞 : 穆宗 長慶 3년(823) 10월 11일 壬辰日의 일이다.
역주18 敬宗 : 809~826. 재위 824~826. 武則天을 포함하면 당나라 제15대 임금으로 휘는 湛이다. 시호는 睿武昭愍孝皇帝이다. 穆宗의 장자로 처음에는 鄂王에 봉해졌다가 뒤에 景王에 봉해졌다. 822년에 태자로 책립되었다. 즉위한 뒤 소인들을 가까이하고 정사를 등한시하며 燕飮으로 세월을 보냈다. 재위 2년 만에 환관 劉克明 등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9 逢吉……於上 : 李逢吉이 王守澄을 시켜 穆宗에게 “폐하께서 태자에 책립된 이유를 신은 모두 알고 있으니, 모두 이봉길의 힘입니다. 두원영과 이신의 무리는 모두 심왕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陛下所以爲儲貳 臣備知之 皆逢吉之力也 如杜元穎‧李紳輩 皆欲立深王]”라고 말하도록 한 것을 이른다. ‘심왕’은 憲宗의 넷째 아들이자 목종의 아우인 李察(뒤에 悰으로 개명)을 이른다.
역주20 貶端州司馬 : 敬宗 즉위년(824) 2월 3일 癸未日의 일이다. 端州의 治所는 高要로, 지금의 광동성 肇慶市에 있었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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