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年
에 曹參
이 薨
커늘 明年
에 以王陵
으로 爲右丞相
하고 陳平
으로 爲左丞相
하고 周勃
로 爲太尉
注+此盡用高帝垂沒之言也.하다
七年
에 惠帝
가 崩
커시늘 太后
가 하다 高后元年
에 議立諸呂爲王
할새 問右丞相陵
한대 陵
이 曰
太后
가 不說
하여 問平‧勃
한대 하니이다 太后
가 喜
하더라
罷朝에 陵이 讓平‧勃曰 始與高帝啑血盟에 諸君이 不在邪아 今王呂氏면 何面目見高帝於地下乎리오
平‧勃
이 曰 面折廷爭
은 臣不如君
이어니와 全社稷‧安劉氏
는 君亦不如臣
注+漢初, 承戰國餘習, 臣下相謂, 亦曰君‧臣.이리라 陵
이 無以應之
하더라
太后
가 以陵爲
하니 實奪之相權
이라 陵
이 遂病免歸
하다
16-2-가
혜제惠帝 5년(기원전 190)에
조참曹參이 죽자, 이듬해에
왕릉王陵을 우승상으로
진평陳平을 좌승상으로
주발周勃을
태위太尉로 임명하였다.
注+이는 모두 고제高帝가 임종할 때의 말에 따른 것이다.
혜제 7년(기원전 188)에 혜제가 붕어하자, 태후太后(여후呂后)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였다. 고후高后 원년(기원전 187)에 여씨呂氏들을 세워 왕으로 삼는 일을 의논할 때 우승상 왕릉에게 묻자 왕릉이 대답하였다.
“고제高帝께서 백마를 잡아 맹세하시기를 ‘유씨劉氏가 아닌데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자를 공격하라.’라고 하셨으니, 지금 여씨들을 왕으로 삼는 것은 맹약에 어긋납니다.”
태후가 기뻐하지 않고서 진평과 주발에게 묻자 진평과 주발은 “왕으로 삼으셔도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후가 기뻐하였다.
조회를 파하자 왕릉이 진평과 주발을 나무라며 말하였다. “처음에 고제高帝와 함께 삽혈歃血을 하며 맹약하는 자리에 군君들은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씨들을 왕으로 삼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제를 뵙겠습니까.”
진평과 주발이 말하였다. “
면절정쟁面折廷爭하는 것은
신臣들이
군君만 못하지만,
사직社稷을 온전히 하고
유씨劉氏를 안정시키는 것은 군 또한 신들만 못할 것입니다.”
注+한漢나라 초에는 전국시대의 유습遺習을 이어받아 신하들끼리 서로간에 호칭할 때에도 ‘군君’이니 ‘신臣’이니 하였다. 왕릉이 그 말에 답할 수 없었다.
태후가 왕릉을 태부太傅로 임명하니 실제로는 승상의 권한을 박탈한 것이었다. 왕릉이 마침내 병으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