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이는 仲虺가 湯王에게 권면한 말이니, 탕왕이 몸과 마음에 대해 그 공을 들이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덕이 몸에 수양된 것이 날로 새로워져서 그치지 않으면 萬邦이 그리워하게 되니 이른바 “도와주는 사람이 지극히 많음에 천하의 사람들이 따른다.”라는 것이고,
마음에 보존된 것이 자만이 가득하여 스스로 만족하게 되면 九族이 마침내 흩어지는 법이니 이른바 “도와주는 사람이 지극히 적음에 친척도 그를 등진다.”라는 것입니다.
날로 새로워지면 나날이 나아가게 되니 堯임금과 舜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한 일이고, 자만이 가득하면 나날이 나태해지게 되니 후세의 임금이 제대로 끝을 마치지 못한 일입니다.
治世와 亂世의 갈림이 여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原注
힘써 大德을 밝히는 것은 곧 이른바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日新其德]”라는 것입니다.
‘힘쓴다[懋]’는 것은 항상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고 ‘밝힌다[昭]’는 것은 항상 밝히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언제나 힘쓰지 않을 때가 없으면 그 덕이 언제나 밝혀지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힘쓴다’는 한마디 말이 바로 그 관건이니, 《大學》에서 인용한 湯王의 〈盤銘〉이 바로 그 일입니다.
‘懋昭大德’은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니 《대학》에서 이른바 “타고난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라는 것이고, ‘建中于民’은 자신으로써 남을 인솔하는 일이니 《대학》에서 이른바 “백성을 교화하여 새롭게 한다.[新民]”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물로 인하여 옮겨가기 때문에 그 바름을 잃게 됩니다.
성인이 자신의 한 몸을 백성의 준칙으로 삼아서 바라보고 추창하게 해서 모두 중도로 돌아가게 하시니, 이것이 이른바 “백성에게 중도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도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義로 일을 제재하고 禮로 마음을 재제하는 것뿐입니다.
대체로 일에는 만 가지 단서가 있어 재단하여 처리하기가 쉽지 않으니, 오직 당연한 이치로 이를 헤아리면 거조가 합당하여 한 가지도 중도에 맞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만 가지 생각이 있어 붙잡아 지키기가 쉽지 않으니, 오직 안으로 敬을 주인으로 삼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에 감히 제멋대로 하지 않으면 행동이 예에 맞아 한 가지도 중도에 맞지 않는 생각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임금 자신이 중도에 맞음이 바로 백성들이 말미암아 중도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原注
王者가 후세에 모범이 되는 까닭은 義와 禮일 뿐이니, 도가 몸에 구비되어 빠짐이 없으면 법이 후세에 전해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善만 믿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선을 의지하여야 흥할 수 있으니,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은 위태로워지고 망하게 되는 길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묻기를 좋아하면 천하의 선이 모두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니 어찌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재능을 자부하여 자신의 지혜만 쓰면 나 하나의 善이 그 얼마나 되겠습니까?
成湯은 聖人인데도 仲虺가 학문으로 권면하여 간곡하고 간절함이 이와 같았으니 후세의 임금이 그 말을 깊이 음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