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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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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元宰相 孫也注+淸儉, 稱賢相. 貌醜色如藍하고 有口辯하니 悦之하사 擢爲御史大夫하시다
20-5-가
盧杞는 開元(713~741) 연간의 재상 盧懷愼의 손자이다.注+盧懷愼은 청렴하고 검소하여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얼굴이 못생기고 낯빛이 푸른빛을 띠었으며 말재주가 있었다. 德宗이 좋아하여 그를 발탁하여 御史大夫로 삼았다.
每見賓客 姬妾 不離側이러니 嘗往問疾할새 子儀 悉屛侍妾이어늘
郭子儀가 빈객을 접견할 때마다 姬妾이 그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노기가 언젠가 문병하러 갔을 때에는 곽자의가 시중들던 첩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였다.
問其故한대 子儀 曰 杞 貌陋而心險하니 婦人輩 見之必笑하리니 它日 得志하면 吾家 無類矣라하더라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곽자의가 대답하였다. “노기는 얼굴이 못생기고 마음이 음험하다. 부녀자들이 그를 보고 반드시 웃을 것이니, 훗날 노기가 출세하면 우리 집안은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
郭子儀郭子儀
하니 陋無文學이라 與同在相位輕之하여 多託疾不與하니 亦恨之하더라
盧杞는 얼마 뒤에 門下侍郞‧同平章事에 발탁되었는데, 그가 왜소하고 못생긴 데다 학문적 소양이 없었기 때문에 楊炎이 그와 같은 반열의 재상이면서도 그를 무시하여 병을 핑계대고 노기와 함께 회식을 하지 않는 일이 많으니 노기가 또한 원한을 품었다.
陰狡하여 欲起勢立威하여 小不附者 必欲寘之死地하고
노기는 음험하고 교활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위엄을 세우고자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부화하지 않은 자를 반드시 死地에 밀어 넣고자 하였다.
하여 하여 親任之러니 未幾 하다
그리고 太常博士 裴延齡을 끌어들여 集賢殿直學士로 삼아서 친히 대하고 신임을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노기는 양염을 참소하여 政事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20-5-가 : 《資治通鑑》 권226 〈唐紀42 德宗1〉 建中 2년(781) 2월 조에 보인다.
역주2 盧杞 : ?~약 785. 당나라의 대신으로, 자는 子良이다. 玄宗 때의 侍中 盧懷愼(?~716)의 손자이다. 지금의 하남성 安陽市 滑縣 서남쪽에 있었던 滑州 靈昌 사람이다. 음관으로 忠州刺史, 虢州刺史를 역임하고 德宗 초기에 御史中丞, 御史大夫,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역임하였다. 음험하고 교활하여 재상으로 있는 동안 賢者를 시기하여 楊炎‧顔眞卿 등을 해치고 杜佑와 재상 張鎰 등을 배척하였다. 또한 주택의 칸 수와 등급에 따라 징수하는 間架稅,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비용으로 주고받은 재화에 징수하는 除陌稅 등을 거두어 원성이 자자하였다. 朔方節度使 李懷光의 탄핵을 받고 新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澧州別駕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역주3 懷愼 : ‘愼’이 대전본에는 ‘謹’으로 되어 있으나, 南宋 孝宗 趙昚(조신)을 피휘한 것이다. 盧懷愼(?~716)은 滑州 靈昌 사람이다. 젊어서 청렴하고 근실하여 進士에 천거되고 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中宗 景龍(707~710) 연간에 右御史臺中丞이 되고, 黃門侍郞에 올랐다. 玄宗 開元 원년(713)에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얼마 뒤에 黃門監이 되었다. 청렴하고 검소하여 영리를 꾀하지 않았으며, 사용하는 기물이나 복식을 金玉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받은 녹봉은 모두 수시로 나누어주어 집안에 여분의 비축이 없어서 처자식이 궁핍하게 살 정도였다. 시호는 文成이다.
역주4 : 대전본에는 ‘謹’으로 되어 있으나, 南宋 孝宗 趙昚(조신)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5 德宗 : 742~805, 재위 779~805. 당나라 제9대 임금으로 휘는 适이다. 제8대 임금 代宗 李豫의 장자이다. 시호는 神武孝文皇帝이다. 대종 廣德 2년(764)에 황태자에 책립되었다. 즉위한 초기에는 환관의 정사 간여를 엄금하고 楊炎(727~781)을 재상으로 임명하며 租庸調 제도를 혁파하고 여름과 가을 두 계절에 세금을 나누어 받는 兩稅法을 만들어 중흥의 기상이 있었으나 뒤에 盧杞 등을 등용하면서 정사가 어지러워졌다. 783년에 涇原兵變이 일어나 奉天으로 피하였다가 이듬해 난이 평정된 뒤 長安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무백관들의 배신과 환관의 충성스러운 호종을 겪게 되자 이후 환관을 중용하게 되었다. ‘涇原兵變’은 20-11-가 ‘涇師亂’ 주석 참조.
역주6 郭子儀 : 697~781. 당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武將이다. 당시 郭汾陽 또는 郭令公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섬서성 華縣인 華州 鄭縣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처음에는 중용되지 않았으나 玄宗 때 安史의 난이 발생하자 朔方節度使에 임명되어 河北‧河東 등지를 수복한 공으로 兵部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고, 肅宗이 즉위한 뒤에는 長安과 洛陽을 수복한 공으로 中書令에 임명되고 汾陽郡公에 봉해졌다. 德宗이 즉위한 뒤 尙父로 불리고 太尉‧中書令에 임명되었다. 사후에 太師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忠武이다.
역주7 尋擢……章事 : 唐 德宗 建中 2년(781) 2월 16일 乙巳日의 일이다.
역주8 : 사고본에는 ‘鄙’로 되어 있다.
역주9 楊炎 : 727~781. 唐 德宗 때의 대신이다. 자는 公南이며 별호는 小楊山人이다. 지금의 섬서성 鳳翔縣인 鳳翔府 天興 사람이다. 덕종 때 재상 崔祐甫(721~780)의 추천으로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元載와 붕당을 짓고 조그마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다. 劉晏(약 716~780)이 원재와 자신을 탄핵하자 유안을 무고하여 죽였다. 盧杞(?~약 785)가 재상이 된 뒤 그와 사이가 벌어져 崖州司馬로 좌천되었는데, 애주에 도착하기 전에 목이 졸려 죽었다. 시호는 平厲이다.
역주10 會食 : 당나라 제도에 재상들이 공무를 처리할 때 門下省에 설치된 政事堂에 모여 매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資治通鑑 卷245 唐紀61 文宗 大和9年 胡三省注》
역주11 太常博士 : 관직명으로, 太常寺(태상시)의 속관이다. 조정의 禮儀에 관한 고문을 담당하였다.
역주12 裴延齡 : 728~796. 唐 德宗 때의 재상이다. 지금의 섬서성 永濟市 서쪽의 河中 河東 사람이다. 肅宗 때 太常博士가 되었으며, 德宗 建中 2년(781)에 集賢殿直學士에 임명되었다. 덕종 貞元 8년(792)에 戶部侍郞‧判度支로서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陸贄가 그에게 재무를 맡기는 것을 반대하자 반대로 육지를 축출하였다. 배연령이 죽은 뒤 사람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나 덕종만은 애도해마지 않았다.
역주13 爲集賢殿學士 : 德宗 建中 2년(781) 2월의 일이다.
역주14 譖炎罷政事 : 덕종 건중 2년(781) 7월 3일 庚申日의 일이다. 이 일이 있기 전 동년 6월 6일 계사일에 덕종은 淮西節度使였던 李希烈(?~786)을 漢南‧漢北兵馬招討使로 임명하여 당시 襄州(지금의 호북성 襄陽)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山南東道節度使 梁崇義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楊炎이 이를 반대하여, 이희열이 더없이 자신을 믿어주었던 양아버지 董秦(716~784)을 쫓아내고 회서절도사의 지위를 빼앗았으니, 공은 없이 불법만 저지른 豺狼과 같은 자가 양숭의의 반란을 평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간언한 일이 있다. 덕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는데, 이희열이 마침 장맛비로 인해 進軍하지 않자, 노기는 이희열이 진군하지 않은 것은 양염의 간언 때문이라고 참소하였다. 그리고 큰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잠시 양염의 재상 직위를 박탈하였다가 반란이 평정된 뒤에 다시 복직시킨다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하자, 덕종이 이를 옳게 여겨 양염을 左僕射로 삼고 정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이희열’은 20-10-가1 ‘李希烈反’ 주석 참조. 《資治通鑑 卷227 唐紀43 德宗 建中 2年》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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