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2)

대학연의(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漢武帝 卽位하여 尤敬鬼神之祀하더시니 이어늘 尊之러시니
13-5-가2
漢 武帝가 즉위하여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더욱 공경히 행하였는데, 李少君이 부뚜막 신에게 제사하여 늙지 않는 방술을 가지고 무제를 알현하자 무제가 이를 높이 여겼다.
少君 自謂七十이로되 能使物卻老라하고 善爲巧發奇中하여
이소군은 늘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70세지만 귀신을 부려서 늙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기미를 보아 교묘하게 맞추는 데 뛰어났다.
言 上 祠竈 皆可致物注+物, 謂鬼.而丹砂 可化爲黃金이니
무제에게 말하기를, “황상께서 부뚜막 신에게 제사하면 귀신을 오게 할 수 있어서注+‘物’은 귀신을 이른다. 丹砂를 황금으로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어든 以爲飮食器則益壽而海中蓬萊 迺可見之則不死하리니 黃帝 是也라하여늘
황금이 되거든 이 황금을 가지고 먹고 마시는 그릇을 만들면 수명을 늘릴 수 있어서 바다에 있는 봉래의 신선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封禪을 행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黃帝가 바로 이렇게 했던 분입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 天子 始親祠竈하시고 遣方士하여 入海求蓬萊而事化丹砂諸藥爲黃金矣러라
그리하여 무제가 비로소 직접 부뚜막 신에게 제사하고 方士를 보내 바다에 가서 봉래산을 찾고 단사와 여러 가지 약제를 황금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而海上燕‧齊怪迂之方士 多言神事矣러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소군이 병으로 죽자, 무제는 이소군이 신선이 되어 떠난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그 방술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이에 바닷가 일대 燕‧齊 지역의 괴상하고 오활한 方士들 가운데 신의 일을 말하는 자가 많게 되었다.
이듬해(기원전 119)에 齊人 少翁이 방술을 가지고 무제를 알현하자, 무제는 그를 文成將軍에 임명하고 빈객을 대하는 禮로 예우하였다.
文成 言 上 卽欲與神通인대 宮室被服 非象神이면 神不至라하여늘 迺作畫雲氣車하고
문성장군 소옹이 말하였다. “황상께서 이왕 신과 통하고자 하신다면 궁실의 被服을 신의 형상으로 하지 않으면 신이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雲氣를 그린 수레를 만들었다.
又作하여 中爲臺室하고諸鬼神而置祭具하여 以致天神하더니
또 甘泉宮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를 제단으로 만들고서 天一‧地一‧泰一 등 여러 신들을 그리고 祭具를 두어 天神을 오게 하였다.
居歲餘 其方 益衰하여 神不至하니 迺爲帛書以飯牛하고 陽不知하여 言 此牛腹中 有奇라하여늘
그 후 1년 남짓 되었을 때 문성장군의 방술이 갈수록 쇠하여 신이 오지 않자, 문성장군은 마침내 비단에 글을 써서 소에게 먹인 뒤 짐짓 모르는 척하고 말하였다. “이 소의 뱃속에 기이한 글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殺視得書하니 天子 識其注+所書.하시고 於是 誅文成하고 隱之하시다 其後人掌之屬하다
그리하여 소를 잡고 살펴보자 글이 나왔는데, 무제가 그 필적을 알아보았다.注+‘其手’는 그가 쓴 필적을 이른다. 이에 문성장군을 주살하고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 그 뒤에 무제는 또 栢梁臺와 구리 기둥으로 된 承露僊人掌과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故與文成同師 求見言方이어늘 天子 旣誅文成하고 後悔其方不盡이러시니 及見欒大하얀 大說하시니
欒大는 예전에 文成將軍 少翁과 같은 스승에게 수학하였다. 난대가 알현을 청하며 방술을 말하자, 무제는 문성장군을 죽인 뒤 그 방술을 다 쓰지 못했다고 하여 후회하고 있던 터에 마침 난대를 만나자 크게 기뻐하였다.
爲人 多方略하고 敢爲大言하여 言 臣之師 曰 黃金 可成이요 不死之藥 可得이요 可致라하여늘
난대는 인물이 계책이 많고 과감하게 허풍을 칠 수 있었다. 난대가 무제에게 말하였다. “신의 스승이 말하기를, 황금을 만들 수 있고 불사약을 얻을 수 있으며 신선을 오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迺拜爲五利將軍하여 居月餘 하고妻之하시니
이에 그를 五利將軍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한 달 남짓 지난 뒤에는 4개의 인장을 주게 되었고 또 衛長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數月 貴震天下而海上燕‧齊之間 莫不搤掔注+搤, 與扼同. 掔, 與腕同.하여 自言有禁方能神僊矣러라
난대가 무제를 알현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그 존귀함이 천하를 진동시키자, 바닷가 燕‧齊 지역에서는 팔을 휘두르며注+‘搤’은 ‘扼(휘두르다)’과 같다. ‘掔’은 ‘腕(팔)’과 같다. 자신에게 신선이 될 수 있는 비방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有龍 垂胡하여 下迎黃帝하니 後世 因名其處曰鼎湖라하니이다
齊人 公孫卿이 또 말하였다. “黃帝가 荊山에서 鼎을 주조했는데, 鼎이 완성되자 용 한 마리가 턱살과 수염을 늘어뜨리고 내려와서 황제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鼎湖’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於是 天子 曰 嗟乎 誠得如黃帝인댄 視去妻子 如脫屣耳라하더시다 五利하여 不敢入海而之泰山祠어늘
이에 무제가 말하였다. “아, 참으로 黃帝와 같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처자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 오리장군 난대가 무제의 使者로 떠나 감히 바다에 가지 못하고 泰山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使人隨驗하니 實無所見이로되 五利 妄言見其師라하고 其方 盡多不讎注+不讎, 無騐也.어늘하시다
무제가 사람을 시켜 뒤따라가 알아보게 하니 실제로는 만나는 이가 없었는데도 오리장군이 자기 스승을 만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또 그 방술이 다하여 대부분 효험이 없자,注+‘不讎’는 효험이 없다는 뜻이다. 무제가 마침내 오리장군을 주살하였다.
公孫卿 候神河南할새 言見人迹이라하여늘
그해 겨울 公孫卿이 河南郡에서 신을 기다릴 때 緱氏城 위에서 신선의 발자국을 보았다고 말하자,
天子 親幸緱氏하사 視迹하시고 問卿하사대 得無效文成‧五利乎
무제가 직접 구씨성에 거둥하여 그 자취를 보고 공손경에게 물었다. “文成將軍과 五利將軍처럼 기망하는 일은 없겠는가?”
非有求人主 人主者 求之 其道 非寬 神不來 言神事 如迂誕이나 積以歲 乃可致니이다
공손경이 대답하였다. “신선이 임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신선을 찾는 것이니, 그 방법은 넉넉히 시간을 두지 않으면 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을 말하는 일이 오활하고 허탄한 것 같으시겠지만 여러 해가 쌓이면 신을 오게 할 수 있습니다.”
於是 郡國 各除道하고 繕治宮館‧名山神祠하니 所以望幸矣
그리하여 郡國들이 저마다 길을 닦고 宮館과 명산의 신을 모시는 사당을 정비하니, 무제가 행차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하시니 齊人之上疏言神怪奇方者 以萬數러라
뒤에 武帝가 동쪽으로 바닷가를 순수해서 禮를 행하여 여덟 신에게 제사하자, 齊人 중에 疏를 올려 신이하고 기이한 방술을 말하는 자가 만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迺益發船하여 令言海中神山者數千人으로 求蓬萊神人하시고
이에 배를 더욱 내어서 바다에 神山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 수천 명으로 하여금 蓬萊山의 神人을 찾도록 하였다.
注+太山邑名.하사 封泰山하시니 無風雨而方士 更言蓬萊諸神 若將可得이라하니
돌아오는 길에 奉高에 이르러注+‘奉高’는 태산의 읍 이름이다. 泰山에서 封禪하자 비바람을 만나지 않게 되었다. 方士들이 또 봉래산의 신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於是 欣然庶幾遇之하사 復東至海上하사 望焉하시고 러라
이에 무제가 기뻐하며 혹여 신을 만날까 하여 다시 동쪽으로 가서 바닷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았다. 다시 方士들을 보내 神人을 찾고 靈藥을 구하도록 한 사람들이 천으로 헤아리게 되었다.
可見이언마는 上往常遽 以故不見이니 今陛下 可爲館 如緱氏城注+依其制度.하여 置脯‧棗하면 神人 宜可致
公孫卿이 말하였다. “신선을 볼 수는 있지만 폐하께서 항상 급히 가시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緱氏城처럼注+그 제도를 따르는 것이다. 館을 짓고 脯와 대추를 차려놓으면 신선을 의당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好樓居라하여늘 於是 令長安 作飛廉‧桂館注+二館名.하고 甘泉 作益壽‧延壽館하여
뿐만 아니라 신선은 누각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에 무제가 영을 내려 長安에 飛廉館과 桂館을注+‘飛廉’과 ‘桂’는 두 館의 이름이다. 짓고 甘泉宮에 益壽館과 延壽館을 짓도록 하였다.
使卿으로 持節設具而候神人하고 迺作하여 置祠具其下하여 將招來神之屬<주석명>公孫……之屬이러라
그리고 공손경으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祭物을 준비하여 신선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通天臺를 짓고 그 아래에 제물로 바칠 물품들을 두고서 이것으로 신선 등을 부르고자 하였다.
泰山하시고 十二歲 徧於이러시니
5년 뒤에 泰山에 가서 한 번 제사하고 이후 12년 동안 五嶽과 四瀆에 두루 제사하였다.
方士之候神‧入海求蓬萊者 終無驗이로되 公孫卿 猶以大人之迹으로 爲解한대 天子 縻不絶하여 幾遇其眞注+幾, 與冀同.이러시다
신선을 기다리고 바다에 가서 봉래산을 찾는 方士들이 끝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는데도 공손경이 여전히 대인의 발자국으로 이것을 설명하자, 무제는 이에 미련을 두고 방사들을 끊지 않고서 진짜 신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注+‘幾’는 ‘冀(바라다)’와 같다.
하시고 還幸泰山하사 修封禪하시며하시고 見群臣하사 乃曰
太始 4년(기원전 93)에 武帝가 鉅定에서 밭을 갈고 다시 泰山에 거둥하여 封禪을 행하고 明堂에서 제사한 뒤에 신하들을 보고 말하였다.
卽位以來 所爲狂悖하여 使天下勞苦호니 不可追悔로다 自今으로 事有害百姓하며 費天下者 悉罷之하라
“짐이 즉위한 뒤로 소행이 광패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으니 뒤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부터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천하의 재화를 낭비시키는 일들은 모두 중지하도록 하라.”
曰 方士言神 甚衆而無顯功하니 請皆罷斥遣之하소서
田千秋가 말하였다. “方士들 중에 신선을 말하는 자들이 매우 많지만 드러난 공이 없으니 모두 파면하여 쫓아내소서.”
上曰 是也라하시고 於是 悉罷諸方士候神人者하시다 是後 每對群臣 自歎
무제가 말하였다. “大鴻臚의 말이 옳다.” 이에 신선을 기다리는 방사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 뒤로 무제는 신하들을 대할 때마다 스스로 탄식하였다.
曏時愚惑하여 爲方士所欺호니 天下 豈有이리오 盡妖妄耳 節食服藥이면 差可少病而已라하시니라
“지난날 내가 미혹되어 방사들에게 속았다.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모두 요망한 말일 뿐이다. 음식을 조절하고 약을 먹으면 혹 병을 조금 덜 수 있을 뿐이다.”
역주
역주1 13-5-가2 : 《前漢書》 卷25上 〈郊祀志〉와 《資治通鑑》 卷22 〈漢紀14 武帝〉 征和 4년(기원전 89) 조에 보인다. 저본의 내용은 대부분 〈郊祀志〉를 축약한 것이다.
역주2 李少……見上 : 漢 武帝 元光 2년(기원전 133) 10월의 일이다. 李少君은 《神仙傳》에 따르면 자는 雲翼으로, 齊나라 臨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선술을 좋아하여 泰山에 들어가 辟穀하며 도를 닦는 중에 병에 걸렸는데, 신선 安期生을 만나 병을 고치고 안기생에게 수십 년간 신선술을 배웠다. 뒤에 안기생이 600년 뒤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고 승천하자 안기생이 떠날 때 준 神丹‧鑪火 등을 가지고 세상에 나와 6國을 돌아다니며 관리가 되기도 하고 의원이 되어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며 지내다가 한 무제 때에 와서 무제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 이소군은 深澤侯의 舍人으로 나이와 경력을 숨기고서 방술을 가지고 제후왕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는데, 귀신을 부리고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앞다투어 섬겼다고 한다. ‘深澤侯’는 高祖의 공신 중 趙將夕의 봉호로, 王先謙에 따르면 景帝 3년(기원전 154)에 그 작위를 계승한 손자 趙修를 가리킨다. 《神仙傳 李少君》 《漢書補注 郊祀志5上》
역주3 : 사고본에는 ‘嘗’으로 되어 있다.
역주4 : 대전본에는 ‘物’로 되어 있다.
역주5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6 封禪 : 天地에 지내는 제사를 이른다. 泰山에서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하여 하늘의 공에 보답하는 것을 ‘封’, 태산 아래 梁父(보)山과 같은 작은 산에서 땅을 정리하고 땅에 제사하여 땅의 공에 보답하는 것을 ‘禪’이라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張守節正義》
역주7 矣久 : 대전본에는 小字로 誤刻되어 있다.
역주8 少君……其方 : 《神仙傳》에 따르면 이소군은 漢 武帝 元封 6년(기원전 105) 9월에 병이 나자 무제에게 다음날 떠날 것이라는 표문을 올렸다. 그날 밤 무제는 繡衣使者가 용을 타고 부절을 들고서 구름 속에서 내려와 太一神이 소군을 부른다는 꿈을 꾸자 이튿날 이소군에게 직접 가서 살피고 좌우 신하들에게 이소군의 方書를 받도록 하였다. 채 다 받기도 전에 이소군이 죽자 무제는 눈물을 흘리며 이소군은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다. 《신선전》의 내용은 이소군이 죽은 뒤에 방술을 전수받아 오도록 했다는 저본의 내용과 선후 관계가 조금 다르다. 《神仙傳 李少君》
역주9 齊人……禮之 : 漢 武帝 元狩 4년(기원전 119)의 일이다.
역주10 甘泉宮 : 咸陽 南宮으로, 지금의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 甘泉山 위에 있다.
역주11 天地泰一 : 천자가 3년에 한 번 소‧양‧돼지의 세 희생을 갖추어 제사한 세 神이다. 司馬貞에 따르면, 天一과 泰一은 北極神의 다른 이름이다. ‘泰一’은 ‘太一’이라고도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司馬貞索隱》
역주12 : 王念孫에 따르면, 후세 사람들이 잘못 덧붙인 글자라고 한다. 즉 소옹은 소의 뱃속에 글이 있다고 말하면 남에게 그것이 거짓이란 걸 들킬까 하여 단지 ‘괴상한 것[奇]’이 있을 것이라고만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景祐本 《前漢書》나 《史記》 〈封禪書〉‧〈孝武本紀〉에는 모두 이 ‘書’자가 없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漢書補注 郊祀志5上》
역주13 : 《史記》 卷28 〈封禪書〉에는 이 뒤에 ‘書’자가 있는데, 王先謙은 이를 옳다고 보았다. 《漢書補注 郊祀志5上》
역주14 : 사고본에는 이 앞에 ‘手’가 있다.
역주15 : 대전본에는 ‘事’로 되어 있다.
역주16 : 사고본에는 ‘跡也’로 되어 있다.
역주17 作栢……之屬 : 漢 武帝 元鼎 2년(기원전 115) 봄의 일이다. ‘栢梁’은 臺榭 이름으로, 香栢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長安城 안 北闕 내에 있었다고 한다. ‘承露’는 承露盤으로 구리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20丈, 둘레는 7명이 에워싸야 할 정도로 컸다고 한다. ‘銅柱’는 이 승로반을 받치는 기둥이다. 무제는 손에 이 승로반을 들고 甘露를 받는 신선을 建章宮에 구리로 만들어 세웠다. 《史記 卷12 孝武本紀 司馬貞索隱》 《前漢書 卷6 武帝紀 顔師古注》
역주18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19 欒大……僊矣 : 漢 武帝 元鼎 4년(기원전 113) 2월의 일이다.
역주20 欒大 : 漢 高祖의 공신 丁禮의 증손 樂成侯 丁義가 천거한 方士로, 이보다 앞서 무제의 아우 膠東康王 劉寄를 섬겼다.
역주21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22 得四印 : 무제는 난대에게 五利將軍 외에도 天士將軍‧地士將軍‧大通將軍에 임명하였다.
역주23 衛長公主 : 무제와 衛皇后 사이에 낳은 장녀로, 戾太子 劉據(기원전 128~기원전 91)의 누나이다.
역주24 : 사고본에는 이 뒤에 ‘寵’이 있다.
역주25 齊人……屣耳 : 漢 武帝 元鼎 4년(기원전 113)의 일이다.
역주26 荊山 : 산 이름으로, 지금의 河南省 靈寶縣에 있다.
역주27 𩑺(염) : 사고본에는 ‘髥’으로 되어 있다.
역주28 使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29 誅五利 : 漢 武帝 元鼎 5년(기원전 112)의 일이다. 이 일로 난대는 腰斬刑에 처해졌고, 난대를 추천했던 樂成侯 丁義는 棄市刑에 처해졌다. 《資治通鑑 卷20 漢紀12 武帝 中之下 元鼎 5年》
역주30 其冬 : 《資治通鑑》에는 漢 武帝 元鼎 6년(기원전 111)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王先謙 역시 〈武帝紀〉를 근거로 ‘其冬’은 ‘明年冬’이 되어야 하며 ‘其’자는 오류라고 하였다. 《資治通鑑 卷20 漢紀12 武帝 中之下 元鼎 6年》 《漢書補注 郊祀志5上》
역주31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32 緱氏城 : 緱氏縣에 있던 성으로, 지금 河南省 偃師縣 남쪽에 있다. 緱氏縣은 춘추시대 滑나라의 도읍지 費로, 緱는 西周시대 周公의 8번째 아들이 분봉받았던 읍이다.
역주33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34 : 사고본에는 ‘假’로 되어 있다.
역주35 後上……神人 : 漢 武帝 元封 원년(기원전 110) 봄의 일이다.
역주36 八神 : 天主, 地主, 兵主, 陰主, 陽主, 月主, 日主, 四時主 등 여덟 신을 이른다.
역주37 還至……泰山 : 漢 武帝 元封 원년(기원전 110) 4월의 일이다.
역주38 奉高 : 縣 이름으로, 治所는 지금의 山東省 泰安市 동쪽에 있었다.
역주39 復遣……千數 : 漢 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 정월의 일이다.
역주40 公孫……之屬 : 漢 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의 일이다.
역주41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42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43 通天臺 : 甘泉宮 안에 있는 臺 이름이다. 《史記》 〈封禪書〉에는 ‘通天莖臺’로 되어 있는데, 王先謙은 ‘莖’자를 衍文으로 보았다. 《漢舊儀》에 따르면 대의 높이는 30丈으로, 長安과 200리 떨어져 있어서 대 위에서 장안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漢書補注 郊祀志5上》
역주44 : 사고본에는 ‘僊’으로 되어 있다.
역주45 後五……其眞 : 漢 武帝 征和 4년(기원전 89)의 일이다.
역주46 : 사고본에는 ‘祀’로 되어 있다.
역주47 五嶽四瀆 : 《前漢書》에 따르면 五嶽은 東嶽 泰山, 中嶽 泰室(嵩山), 南嶽 𤄵山(衡山), 西嶽 華山, 北嶽 常山(恒山)을 이르며, 四瀆은 黃河, 長江, 淮水, 濟水를 이른다. 《前漢書 卷25下 郊祀志》
역주48 : 대전본‧사고본에는 ‘覊’로 되어 있다.
역주49 太始四年 : 《전한서》와 《자치통감》에는 모두 征和 4년(기원전 89)의 일로 되어 있다. 저본의 내용은 오류로 보인다. 《前漢書 卷6 武帝紀 征和 4年》 《資治通鑑 卷22 漢紀14 武帝 下之下 征和 4年》
역주50 太始……而已 : 《전한서》에는 보이지 않고 《자치통감》에 보인다. 《資治通鑑 卷22 漢紀14 武帝 下之下 征和 4年》
역주51 耕于鉅定 : ‘定’이 사고본에는 ‘鹿’으로 되어 있다. ‘鉅定’은 縣 이름으로, 治所는 지금의 山東省 廣饒縣 북쪽에 있었다. 漢나라 때는 籍田의 제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아 일정한 장소가 없었다. 唐나라 때 와서 近郊 1,000畝에서 九推를 행하였고, 宋나라 때는 수십 步 또는 12畦를 갈아 정해진 수가 없었으며, 明나라 때 와서 적전의 제도가 완비되었다. 漢나라는 文帝 2년 정월 15일 정해일에 적전을 시작하였다. 《前漢書 卷4 文帝紀 2年》 《春明夢餘錄 先農壇》
역주52 明堂 : 천자가 政敎를 밝히고 제사를 지내는 禮堂이다.
역주53 : 대전본에는 ‘縻’로 되어 있다.
역주54 田千秋 : 12-18-나(按) ‘武帝……千秋’ 주석 참조.
역주55 : 사고본에는 ‘僊’으로 되어 있다.
역주56 大鴻臚 : 관직 이름으로, 漢 武帝 太初 원년(기원전 104)에 이전의 이름인 大行令을 바꾼 것이다. 제후나 이민족의 임금이 來朝하면 그에 대한 迎送‧접대‧조회‧封授‧경축 등의 禮를 관장하였다.
역주57 : 사고본에는 ‘僊’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