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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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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數言關東盜 無能爲라하더니注+邯, 亦秦將.하고
하고 自關以東 大抵盡畔秦吏‧應諸侯하니 諸侯 咸率其衆西鄕하고 注+.이어늘
恐二世 怒誅及其身하여 乃謝病不朝見하고 使其壻咸陽令閻樂等으로 引兵入望夷宮하고
入告曰 山東群盜兵 大至 하고 引璽而佩之
左右百官 莫從이어늘한대 子嬰 卽位하여 하다


18-6-가
조고趙高관동關東의 도적이 무슨 난을 일으킬 리 없다고 자주 말했었다. 그런데 항우項羽나라 장수 왕리王離 등을 거록鉅鹿에서 포로로 잡고 장한章邯 등이 여러 번 퇴각하며,注+장한章邯왕리王離 등과 마찬가지로 나라 장수이다.
나라‧나라‧나라‧나라‧나라‧나라가 모두 왕으로 자립하고 관동關東이 대체로 모두 진나라 관리들을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함에, 제후들이 모두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고 패공沛公이 이미 무관武關을 도륙하는 데에까지 이르자,注+한 고제漢 高帝는 당시 패공沛公으로서 군사를 일으켰다.
조고는 이세二世가 노하여 죽이는 것이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서 이에 병을 핑계로 조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위인 함양령 염락咸陽令 閻樂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끌고 망이궁望夷宮에 들어가도록 하고서
조고 자신은 들어가 고하기를 “산동의 도적떼가 일으킨 군사가 대거 몰려왔습니다.”라고 하여 이를 이용해 이세를 겁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옥새를 가져와서 자신이 찼다.
그러나 좌우의 백관 중에 따르는 사람이 없자 이에 자영子嬰을 불러 진왕秦王으로 옹립하였다. 자영이 즉위하여 계책을 써서 조고를 죽이고 삼족을 멸하였다.
자영이 즉위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패공의 군사가 무관으로 들어오자 자영이 항복했는데, 항우가 이르러 자영을 죽이니, 진나라가 멸망하였다.


역주
역주1 18-6-가 : 《史記》 卷6 〈秦始皇本紀〉, 《資治通鑑》 卷8 〈秦紀3 二世皇帝 下〉 3년(기원전 207) 가을 7월, 8월, 9월, 《資治通鑑》 卷9 〈漢紀1 高帝 上之上〉 원년(기원전 206) 겨울 10월, 12월 조에 보인다.
역주2 項羽……數却 : 王離는 秦나라의 名將으로 王翦의 손자이자 王賁의 아들이다. 始皇 때 戰功으로 武城侯에 봉해졌다. 일찍이 蒙恬(?~기원전 210)의 裨將으로 있다가 二世가 몽염을 賜死시킨 뒤에 그 병권을 이어받았다. 章邯(?~기원전 205)은 秦나라의 上將軍이다. 이세 원년(기원전 209)에 陳勝(기원전 190~기원전 208)의 반란군을 맞아 싸워 격퇴시키고 이어서 黃河를 건너 趙나라를 공격하여 지금의 하북성 平鄕縣에 있던 鉅鹿을 포위하였는데, 楚나라 宋義의 副將인 項羽(기원전 232~기원전 202)가 송의를 죽이고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와서 장감의 군대와 9번 싸워 9번을 이겼다. 항우가 甬道를 막고 군량을 끊자 왕리는 포로가 되고 장감은 투항하였다. 장감은 뒤에 항우를 따라 關中에 들어가 雍王에 봉해졌으나 漢 高帝 2년(기원전 205) 6월에 劉邦의 군대와 싸우다가 지키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역주3 燕趙……爲王 : 秦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자 6국의 잔여 세력은 끊임없이 反秦 활동을 벌였는데, 陳勝과 吳廣이 大澤鄕에서 봉기하자 6국의 잔여 세력 역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진승의 部將이었던 武臣(?~기원전 208)은 진승의 명을 받고 趙나라 지역을 공격하여 秦 二世 원년(기원전 209) 8월에 邯鄲을 점령하고 趙나라의 왕이 되었다. 무신의 휘하 장수였던 韓廣(?~기원전 206)은 무신의 명을 받고 연나라 지역을 공격하였다가 그 지역의 옛 귀족들과 호걸들의 권유로 燕나라 왕이 되었다. 齊나라 왕의 후손이자 그 지역의 토호였던 田儋(?~기원전 208)은 진승과 오광의 봉기 소식을 듣고 호걸 자제들을 설득하여 스스로 齊나라 왕이 되었다. 魏나라의 공자였던 魏咎(?~기원전 208)는 진승의 명을 받고 魏나라 지역을 공격했던 周市에 의해 위나라의 왕으로 옹립되었다. 楚 懷王의 손자인 熊心(?~기원전 206)은 范增의 권유를 따른 項梁(?~기원전 208)에 의해 초나라 왕으로 옹립되었다. 韓나라의 왕족이었던 韓成(?~기원전 206)은 張良(?~기원전 186)의 권유를 따른 項梁에 의해 韓나라 왕으로 옹립되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18-1-가 ‘楚戍……山東’ 주 참조.
역주4 沛公已屠武關 : 秦 二世 3년(기원전 207) 8월의 일이다. 武關은 춘추시대의 少習關으로, 전국시대에 와서 바꾼 명칭이다. 지금의 섬서성 商南縣 서북쪽에 있었다. 楚나라 지역에서 秦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으로 진나라 남쪽의 요새이다. 무관에서 長安까지 490리였는데, 대부분 산길이며 藍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와 예로부터 험한 요새로 알려졌다. 동쪽의 函谷關, 북쪽의 蕭關, 서쪽의 散關과 함께 진나라의 네 요새로 불렸다. 沛公 劉邦은 수만 군사를 끌고 무관을 공격하여 도륙하였다.
역주5 漢高……起兵 : 秦 二世 원년(기원전 209) 9월에 劉邦(기원전 256~기원전 195)이 蕭何‧曹參 등의 천거를 받아 자신의 출신지인 沛縣(지금의 강소성 沛縣)을 기반으로 秦에 반기를 들고 沛公이라 칭한 것을 이른다. 원래는 농민 출신으로 일찍이 泗水亭長을 지냈던 유방은 이때 군사 3천 명을 모아 陳勝과 吳廣의 봉기에 호응하였다.
역주6 라하여 : 509본에는 ‘라하니’로 되어 있다.
역주7 因劫二世令自殺 : 望夷宮의 변란이라고도 한다. 二世는 날마다 사냥을 즐기며 上林園에 行人이 들어오면 쏘아 죽이곤 하였는데, 조고는 이를 이용해 천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上帝가 금하는 것이어서 장차 재앙을 내릴 것이니 궁궐에서 멀리 나가 있어 이를 피하라고 설득하였다. 이세가 지금의 섬서성 涇陽縣 蔣劉鄕에 있는 망이궁에 나가 거하자, 조고는 이세 3년 8월에 거짓으로 도적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사위인 咸陽令 閻樂에게 吏卒 천여 명을 이끌고 망이궁에 들어가도록 하고 동생인 郎中令 趙成(?~기원전 207)에게는 안에서 내응하도록 하였다. 염락은 이세에게 당신이 교만 방자하여 무도한 살인을 일삼음으로 인해 천하가 모두 배반하였으니 자진을 하라고 하였다. 이세는 처음에는 조고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고, 다음에는 한 郡의 왕이 되기를, 萬戶侯가 되기를, 처자와 함께 평민이 되기를 빌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자살하였다. 이에 조고는 이세의 형의 아들인 子嬰(?~기원전 206, 재위 46일)을 옹립하고 이세를 평민의 신분으로 장례하였다.
역주8 하니 : 509본에는 ‘하고’로 되어 있다.
역주9 召子嬰立之 : 趙高는 二世를 자살시킨 뒤에 여러 대신과 公子들을 모두 불러 이세를 죽인 정황을 고하였다. 그리고 始皇帝는 천하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帝’를 칭하였으나 지금은 6國이 다시 자립한 데다 秦나라의 국토도 줄어들었으니 헛된 이름으로 ‘帝’를 칭할 수 없고 ‘王’을 칭해야 한다고 하여 子嬰을 秦王으로 옹립하였다.
역주10 以計殺高夷三族 : 조고는 秦 二世 3년에 이세를 자살시키고 子嬰을 秦王으로 옹립한 뒤, 동년 9월에 자영에게 재계한 뒤 廟見하고 옥새를 받도록 하였는데, 자영은 조고가 이 틈을 타서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조고가 직접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 병을 칭탁하고 묘현을 하지 않았다. 조고가 자영에게 묘현을 하도록 채근하기 위해 오자 자영은 조고를 齋宮에서 척살하고 삼족을 멸하였다.
역주11 嬰立……嬰降 : 漢 高帝 원년(기원전 206) 겨울 10월의 일이다. 趙高는 秦 二世를 자살시킨 뒤 沛公 劉邦에게 사신을 보내 유방을 關中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유방은 이를 거짓이라고 여겨 무관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張良의 계책을 써서 酈生‧陸賈로 하여금 秦나라 장수를 큰 이익으로 설득하게 한 뒤에 몰래 습격하여 마침내 무관을 격파하였다. 유방이 지금의 섬서성 西安市 동남쪽의 霸上에 이르자, 秦王 子嬰은 送葬의 禮를 취하여 白馬가 끄는 素車를 타고서 항복한다는 의미로 목에 밧줄을 매고 나와 황제의 옥새와 符節을 바쳤다.
역주12 項羽至殺之秦亡 : 漢 高帝 원년 겨울 12월의 일이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와 子嬰을 죽이고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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