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23-6-나(안按)
[신안臣按] 태종太宗은 위징魏徵에 대해 군신간의 조우遭遇가 극에 달했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위징이 죽은 뒤에 위징이 천거했던 사람들이 때마침 죄를 받아 주벌되자, 태종은 마침내 위징이 파벌을 짓지 않았을까 의심하였습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한번 생기자, 참소하는 자들이 대번에 그 틈을 타고 들어와 말하기를 “위징이 자신의 간언을 기록한 원고를 사관史官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곧음을 과시하고 군주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뜻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명민한 태종도 이 말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혼약을 파기하고 비석을 쓰러뜨리면서 총애도 시들게 되었습니다.
原注
참소가 먹혀들 수 있었던 원인을 궁구해보면 태종太宗이 마음속으로 먼저 의심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일 태종이 참소하는 자의 말을 들었을 때 저수량褚遂良을 불러 대질해보았다면,
그리하여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수량이 진실로 감히 숨기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저수량이 또한 어찌 무고한 자를 두둔했겠습니까. 참소한 자의 거짓된 말이 이에 덮여 가려질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종은 속에 의심을 쌓아두고서 잠자코 아무 말도 묻지 않았으니, 예전에 온언박溫彦博에게 명하여 조사를 시켰을 때와 비교해보면 어찌 그렇게도 매우 다르단 말입니까.
만일 훗날
요동遼東 정벌에 대한 후회가 없었다면 그래도 현명한 군주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注+태종은 말년에 요동遼東을 정벌하였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매우 후회하였다. 탄식하기를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이 정벌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명을 내려 파말마를 보내 위징을 소뢰少牢로 제사하도록 하고, 직접 지었던 비석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으며 위징의 처자식을 위로하고 예물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