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高宗이 태자로 있을 때 甘盤에게 배워 학문이 大成하기도 전에 감반이 황야에 은둔하여 河에서 亳으로 가서, 고종은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감반을 잃은 뒤로 망연히 배울 사람이 없다가 부열을 얻게 되자 마침내 감반의 일을 잇도록 명하였습니다.
‘爾惟訓于朕志’는 傅說에게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바란 것입니다.
그래서 술은 누룩과 엿기름이 아니면 빚어지지 않고, 국은 소금과 매실이 아니면 간을 맞출 수 없으며, 임금은 賢者가 수양시키고 보필해주는 것이 아니면 자신의 덕을 진전시킬 수 없으니, “그대는 나를 여러 방면으로 수양시켜서 나를 버리지 말라.
내가 능히 그대의 가르침을 행할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고종이 부열에게 건 기대가 그처럼 간절하였으니, 부열이 어찌 그 말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原注
사람을 견문이 많은 이로 구하는 이유는 오직 사업을 수립하기 위해서입니다.
학문은 반드시 사업에 시행된 뒤에야 쓸모 있는 학문이 되니, 그렇지 않다면 견문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과연 어디에 쓰겠습니까.
‘古訓’은 옛 聖王의 가르침이니, 바로 《書經》의 典‧謨와 같은 것입니다.
학문은 반드시 옛 성왕의 가르침에서 구한 뒤에야 소득이 있으니, 만약 聖人이 아닌 사람의 글을 읽는다면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獲’은 자기 몸에 체득하는 것이니, 학문은 반드시 스스로 터득한 뒤에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道는 道이고 나는 나이게 되니, 이는 학문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사업을 행하는데 옛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여 옛 聖王들을 본받지 않고서도 장구하게 태평치세를 이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原注
그래서 또 학문을 하는 요체는 오직 뜻을 겸손히 가지고 때에 따라 민첩하게 행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遜志’는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가져서 비록 지니고 있어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하는 것이고, ‘時敏’은 德을 진전시키고 業을 닦아서 때에 미쳐 이를 행하여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 해가 되는 것은 교만과 게으름일 뿐입니다.
교만하면 뜻이 자만하게 되어 善이 들어갈 수 없고, 게으르면 뜻이 나태해져서 공부가 진전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면 교만해지지 않고 민첩하면 나태해지지 않기 때문에 수양된 도가 저절로 샘솟듯 끊임없이 나와서, 마치 원천이 있는 샘물이 길으면 길을수록 더욱 생겨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체득을 성실히 하지 않으면 비록 얻었다 하더라도 쉽게 잃게 되니, 오직 믿기를 깊이 하고 생각하기를 깊이 한 뒤에야 도가 그 몸에 쌓이게 됩니다.
오늘 하나의 이치에 나아가고 내일 또 하나의 이치에 나아가며, 오늘 하나의 善에 나아가고 내일 또 하나의 善에 나아가서, 오랫동안 지속해나가 변하지 않으면 도가 자신에게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자신이 되니, 혼연일체가 되어 틈이 없게 될 것입니다.
原注
이에 또,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과 각각 학문의 절반을 차지하니 제가 가르치는 것은 겨우 그 반만 이루어드릴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高宗은 배우는 데 더욱 스스로 힘써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일념을 시종일관 늘 배움에 두어 잠시도 중단됨이 없게 한 뒤에야 덕의 수양됨이 수양되는 줄도 모르게 수양될 것이니, ‘終始’라 하고 ‘始終’이라 하지 않은 것은 배움에는 그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道의 쌓여짐’을 말하고 뒤에서는 ‘德의 수양됨’을 말한 것은, 이치로 말하면 ‘道’라 이르고 얻은 것으로 말하면 ‘德’이라고 이르니, 별개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傅說은 학문을 하는 방도를 논한 것이 지극했지만, 그래도 고종이 본받을 대상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또 成湯을 모범으로 삼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성탕은 이미 聖人이었지만 덕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끄러움이 있는 것을 걱정하였으며 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쳐서 주저하지 않았으니, 만일 성탕이 이루어놓은 법에 비추어 볼 수 있다면 어찌 허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덕이 수양된 뒤에야 대신이 그 직분을 행하여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초치해서 여러 직위에 세울 수 있으니, 부열이 감히 임금의 뜻을 공경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學’이라는 글자는 이 이전에 경전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고종과 부열이 처음으로 언급하여 마침내 만고 聖學의 근원을 열어주었으니, 그 공이 또한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