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3)

대학연의(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才學有盛名하여 久當樞要러니 煬帝 卽位 道衡 上高祖文皇帝頌한대
19-1-가3
당초에 內史侍郞 薛道衡이 재능과 학문으로 명성이 드높아서 오랫동안 樞要職을 맡았다. 煬帝가 즉위하자 설도형이 〈高祖文皇帝頌〉을 올렸는데,
覽之不悅曰 道衡 致美先朝하니 魚藻之義也注+.라하고 將置之罪러니
양제가 이를 보고 불쾌해하면서 말하기를 “설도형이 先皇帝를 지극히 찬미하니 여기에는 〈魚藻〉의 뜻이 있다.”注+‘魚藻’는 《詩經》 〈大雅〉의 篇名이니, 周 幽王을 풍자하고 周 武王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라고 하였다. 장차 그를 죄에 걸려들게 하려고 하였다.
會議新令不決이어늘 道衡 謂朝士曰 向使不死런들 令決當久行注+熲者, 文帝賢相, 煬帝殺之.이라하여늘 有人 奏之하니하여 付執法者推之한대
마침 새로운 법령을 논의하는데 결정이 나지 않자, 설도형이 조정의 관원들에게 말하기를 “가령 高熲이 죽지 않았다면 새로운 법령이 결정되어 시행된 지 오래일 것이다.”注+‘高熲’이란 자는 隋 文帝의 賢相으로 煬帝가 그를 죽였다. 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를 아뢰자 양제가 노하여 사법 관원에게 회부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裴蘊호대 道衡 負材恃舊하여 有無君之心하니 論其罪名컨대 似如隠昧어니와 原其情意컨대 深爲悖逆이로소이다
裴蘊이 아뢰기를 “설도형이 재주를 자부하고 선황제의 신임을 믿고서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그의 죄명을 논해보면 죄상이 명확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실로 패역을 행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曰 公論其逆 妙體本心이라하고 遂令自盡하니 天下 寃之하더라
양제가 말하기를 “공이 그를 패역죄로 논죄한 것은 짐의 마음을 매우 잘 이해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설도형에게 自盡하도록 명하니 천하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稱裴矩之能하여 謂群臣曰 裴矩 大識朕意하여 凡所陳奏 皆朕之成算이라
煬帝가 裴矩의 재간을 칭찬하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裴矩는 짐의 뜻을 매우 잘 알아서 진언하고 상주하는 것 모두가 짐이 생각했던 것과 같다.
未發之頃 輒以聞하니 自非奉國盡心이면 孰能리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배구가 그때마다 이를 아뢰니, 본래 나라를 받드는 데 마음을 다하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是時 與左翊衛大將軍‧內史侍郞虞世基‧御史大夫裴蘊‧光祿大夫으로 皆以諂諛 有寵이러니
이 당시에 배구가 左翊衛大將軍 宇文述, 內史侍郞 虞世基, 御史大夫 裴蘊, 光祿大夫 郭衍과 더불어 모두 아첨으로 총애를 받았다.
善於供奉하여 容止便辟하니 侍衛者 皆取則焉하더라
우문술은 양제를 모시는 데 능하여 행동거지가 편벽하니, 양제를 시종하고 호위하는 자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郭衍 嘗勸帝五日一視朝曰 無效高祖 空自勞苦하소서 益以爲忠曰 唯有郭衍 心與朕同이라하더라
郭衍은 일찍이 양제에게 5일에 한 번만 조당에 나아가 정무를 볼 것을 권하면서 말하기를 “고조께서 공연히 스스로를 수고롭게 한 것을 본받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양제가 더욱 그가 충성스럽다고 생각하여 “오직 郭衍만이 짐의 마음과 같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19-1-가3 : 《資治通鑑》 卷181 〈隋紀5 煬帝 上之下〉 大業 5년(609) 11월 조와 대업 6년(610) 1월 정축에 보인다.
역주2 內史侍郞 : 隋初에는 內史侍郞이라고 하였고, 煬帝 大業 12년(616)에 內書侍郞으로 고쳤다. 內史省의 副職으로 본래 內史令을 도와 邦國의 庶務와 朝廷의 大政에 모두 參議하였다. 품계는 正4品下였다. 隋唐 시기에 관사명의 변천에 따라 내사시랑‧중서시랑‧西臺侍郞‧鳳閣侍郞‧紫微侍郞 등으로 개칭을 거듭하였다. 唐 太宗 이후에는 중서령을 비워두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실질적인 중서성의 장관으로 기능하였고, 同平章事를 더하면 首相이 되었다.
역주3 薛道衡 : 540~609. 隋의 개국공신이다. 자는 玄卿이다. 河東 汾陰 사람이다. 문장에 뛰어나 李德林‧盧思道와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謀事에 능하였으나 처세에는 우활하였다. 北齊‧北周‧隋에서 벼슬하였다. 隋初에 內史舍人이 되어 기밀업무를 담당하였다. 관직이 內史侍郞 開府儀同三司에까지 올랐지만, 文帝 말에 당파를 결성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嶺南으로 폄척되었다. 당시에 揚州 總管이었던 晉王 楊廣은 설도형의 문학적 재능을 흠모하여 막하에 두고자 하였지만, 설도형은 양광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煬帝 즉위 후에 사직을 청하였다. 양제는 본래 秘書監에 임용하고자 하였는데 설도형이 올린 〈高祖文皇帝頌〉을 읽고 노하여 司隷大夫로 삼고 나중에 빌미를 잡아 죄에 빠뜨려 죽였다.
역주4 魚藻……武王 : ‘魚藻’는 《시경》 〈小雅 魚藻〉로 원주에서 〈大雅〉의 편명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幽王을 풍자하고 武王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풀이한 것은 毛序를 따른 것으로, 주희의 《詩集傳》에는 “천자가 제후를 연향할 때 제후들이 천자를 찬미한 시이다.[天子燕諸侯 而諸侯美天子之詩也]”라고 설명하였다.
역주5 高熲 : 541~607. 隋初의 개국공신이자 宰相이다. 자는 昭玄이다. 渤海 蓚 사람이다. 北周 明帝 2년(558)에 齊王 宇文憲의 記室이 되었다. 北齊 정벌에 공을 세워 開府儀同三司에 올랐다. 開皇 元年(581)에 隋가 건국되자, 尙書左僕射 兼納言에 제수되어 약 21년간 재상으로 집정하였다. 북제의 법률을 참고하여 鄭譯‧楊素와 형률을 수정하고 大興城를 건설하는 등 공이 컸고 개황 8년(588)에는 元帥長史로 陳을 평정하였다. 太子 楊勇의 폐위를 반대하여 獨孤皇后의 원한을 사고 文帝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결국 上柱國 王世積의 죄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작위를 몰수당했다. 隋 煬帝의 즉위 후에 太常卿에 임명되었으나 散樂 수집과 장성 수축 등에 우려를 표명하다가 朝政을 비방하였다는 죄명으로 주살되었다.
역주6 : 사고본에는 ‘如’로 되어 있다.
역주7 宇文述 : ?~616. 北周와 隋의 무장이자 재상이다. 本姓은 破野頭인데 宇文氏로 고쳤다. 자는 伯通이다. 北周 代郡 武川 사람이다. 선비족이다. 용맹하고 궁술과 기마에 능했다.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고 뇌물을 좋아하였다. 北周 때 初仕하여 隋 文帝 開皇 초에 右衛大將軍에 제수되었다. 楊廣을 도와 文帝의 태자 楊勇의 폐위에 찬동하였다. 煬帝 大業 원년(605)에 開府儀同三司‧左衛大將軍‧許國公이 되었다. 蘇威‧裴矩‧裴蘊‧虞世基 등과 함께 ‘五貴’로 병칭되며 朝政에 참여하였다. 대업 4년(608) 토욕혼을 정벌하고, 대업 8년(612) 于仲文과 함께 30만 육군을 지휘하여 高句麗 원정에 종군하였는데, 薩水에서 乙支文德에게 대패하여 평민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양제의 江都 순행에 배행하였다가 병사하였다. 시호는 恭이다.
역주8 郭衍 : ?~611. 北周‧隋의 무장이자 관료이다. 字는 彦文이다. 太原 介休 사람이다. 용맹하고 騎射에 능하였다. 北周에서 初仕하였고 隋 건국 후에는 文帝의 친애를 받아 行軍總管이 되어 平涼에 주둔하며 돌궐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開皇 4년(584)에 廣通渠의 개착을 주관하였다. 개황 5년(585)에는 瀛州 刺史가 되었다. 뒤에 朔州 總管으로 옮겨 屯田制를 시행하였다. 隋 煬帝가 즉위한 뒤에는 左武衛大將軍, 光祿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大業 5년(609)에 양제를 호종하여 吐谷渾을 정벌하였다. 眞定侯에 봉해졌다. 대업 7년(611)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襄이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