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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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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6-6-나2(按)
按 武帝 託孤於霍光 善矣而又參之以上官桀‧桑弘羊하시니 是知人之明於高帝也
桀等 皆姦邪嗜利之徒 外交藩王而하니 非昭帝天性夙成하여 能知光爲忠臣而保持之하여 使桀等得志 其禍 可勝言哉
是昭帝知人之明 反過於孝武也 然孝武 不立燕‧注+燕王旦‧廣陵王胥.而立昭帝하시니 明於知子
不屬輩而屬霍光하시니 明於知臣而乃失之桀等者 以諂進하고 弘羊 以利合故也
라하니 故人君 必先正其心하여 不爲諂惑하며 不爲利動然後 可以辨群臣之邪正矣리이다


原注
16-6-나2()
[신안臣按] 무제武帝가 곽광에게 어린 아들(소제昭帝)을 부탁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또 상관걸과 상홍양을 참여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인재를 알아보는 명철함이 고제高帝에 비하면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상관걸 등은 모두 간사하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이므로 밖으로는 번왕藩王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존귀한 공주와 결탁하였습니다. 소제의 천성이 일찍 이루어지지 않아서 곽광이 충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감싸주지 못하여 상관걸 등이 득의하게 했더라면 그 재앙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소제가 인재를 알아보는 명철함이 도리어 효무제孝武帝보다 월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효무제가 연왕燕王이나 광릉왕廣陵王注+’‧‘광릉廣陵’은 연왕 유단燕王 劉旦광릉왕 유서廣陵王 劉胥이다. 후사로 세우지 않고 소제를 세웠으니 이는 자식을 아는 데 밝았던 것이고,
전천추田千秋의 무리에게 후사를 맡기지 않고 곽광에게 맡겼으니 이는 신하를 아는 데 밝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상관걸 등에서 실책을 범했던 것은 상관걸이 아첨으로 나오고 상홍양이 이익으로 영합했기 때문입니다.
옛 글에 이르기를 “겨를 뿌려 눈에 들어가면 천지사방이 그 때문에 위치를 구별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아 아첨에 미혹되지 않으며 이익에 흔들리지 않은 뒤에야 신하들의 간사함과 올바름을 변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媿 : 사고본에는 ‘愧’로 되어 있다.
역주2 內結貴主 : 貴主는 昭帝의 누이인 蓋長公主를 가리킨다. 16-6-가 주석 참조.
역주3 廣陵 : ?~기원전 54. 廣陵王 劉胥를 가리킨다. 武帝의 아들로 陳皇后의 소생이다. 元狩 6년(기원전 117)에 광릉왕으로 봉해졌다. 倡樂과 오락을 좋아하였으며 鼎을 들어 올리고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나 행동이 규범에 맞지 않아 태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자 무당을 시켜 저주를 하게 하였는데 宣帝가 즉위한 뒤에도 저주 행위를 계속하였다. 地節 원년(기원전 69)에는 楚王과 반역을 획책했다가 미수에 그쳤는데 선제는 그를 치죄하지 않았다. 그 후 五鳳 4년(기원전 54)에 저주한 죄 때문에 하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시호는 厲이다.
역주4 田千秋 : ?~기원전 77. 馮翊 長陵 사람이다. 처음에 高寢郞이 되어 高帝의 陵인 長陵을 지켰는데, 戾太子 劉據가 난을 일으켜 江充을 죽인 뒤 자살하자 武帝에게 上書하여 태자의 원통함을 알렸다. 이 일로 大鴻臚가 되어 九卿의 반열에 올랐으며 征和 4년(기원전 89)에는 丞相이 되고 富民侯에 봉해졌다. 무제가 죽은 뒤에는 昭帝를 보필하였다. 소제의 배려로 조회할 때 작은 수레를 타고 궁중을 출입하게 되어 사람들이 ‘車丞相’이라 불렀기 때문에 ‘車千秋’라고도 하였다. 元鳳 4년(기원전 77)에 병사하였다.
역주5 播糠……易位 : 《莊子》 〈天運〉에, 공자와 老聃이 만나 仁義에 대해 말할 때 노담이 “겨를 뿌려 눈에 들어가면 천지사방의 위치를 구별하기 어렵다.[夫播糠眯目 則天地四方易位矣]”라고 한 말이 보인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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