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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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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 卷23
大學衍義 卷23
格物致知之要(二)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知性의 힘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방법들(2)
辨人材
人材를 구별하는 방법들
憸邪罔上之情[讒臣]
奸邪한 자들이 임금을 속인 정상[참소하는 신하들]
23-1-가
晉 武帝晉 武帝
尙書 以文學才識으로 名重一時하니 論者 皆謂華宜爲이라하더니
晉 武帝 때에 尙書 張華가 학문과 재능과 식견으로 당대에 명망이 높자 논하는 자들이 모두 장화가 三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深疾之러니
中書監 荀勗과 侍中 馮紞이 吳나라 정벌에 대한 논의로 장화를 매우 미워하였다.
會帝 問華誰可託後事者어시늘 對以明德至親 莫如이라하니
마침 무제가 누구에게 뒷일을 부탁할 만하느냐고 장화에게 묻자, 장화가 덕망이 높고 지극히 가까운 친척으로는 齊王(司馬攸)만 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由是忤旨 因而譖之한대 하다
이로 말미암아 무제의 뜻을 거슬렀다. 순욱이 이를 기회로 삼아 장화를 참소하자, 무제가 장화를 都督幽州諸軍事에 임명하였다.
至鎭하여 撫循하니 譽望 益振이어늘 復欲徵之러시니
張華가 鎭에 도착하여 胡人과 漢人을 慰撫하자 명망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에 武帝가 다시 장화를 부르고자 하였다.
馮紞 侍帝하여 從容語及러니 曰 會之反 頗由太祖니이다
馮紞이 무제를 모시고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때 鍾會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풍담이 말하였다. “종회의 반란은 상당 부분 태조(司馬昭)에게서 연유한 것입니다.”
變色曰 卿是何言邪 謝曰 臣 聞善馭者 必知六轡緩急之宜하나니
무제가 안색이 변하여 말하였다. “卿의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풍담이 冠을 벗어 사죄하고 말하였다. “신은, 수레를 잘 모는 자는 반드시 여섯 마리 말에 맨 고삐의 완급을 적절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공자가 仲由(子路)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하여 물러나게 하고 冉求는 유약하다고 하여 나아가게 했던 것이며, 漢 高祖가 다섯 왕을 존귀하게 하고 총애하여 이들이 주멸되었던 것이며, 後漢 光武帝가 여러 장수들을 억제하여 이들이 죽을 때까지 복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非上有仁暴之殊 下有愚智之異也 蓋抑揚 使之然耳
이것은 윗사람에게 어짊과 포악함의 다름이 있고 아랫사람에게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억제와 선양, 부여와 박탈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뿐입니다.
鍾會 才智有限而太祖 誇獎無極하사 居以重勢하며 以大兵하여
종회는 재능과 지모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태조는 칭찬과 장려를 끝없이 하여 큰 권세를 주고 많은 군대를 맡김으로써,
使會 自謂算無遺策하며 功在不賞이라하여凶逆耳
종회로 하여금 자신이 낸 계책은 잘못된 계책이 없고 자신이 이룬 공은 상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모반을 꾸미도록 한 것입니다.
向令太祖 錄其小能하시며 節以大禮하시고 抑之以威權하시며 納之以軌則하시면 則亂心 無由生矣리이다 曰 然하다
당초에 태조가 그 작은 재능을 써서 임용하고 大禮로 절제하며 위엄과 권세로 억제하고 올바른 법도를 따르도록 하셨다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생겨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제가 말하였다. “옳은 말이다.”
曰 陛下 旣然臣之言이신대 宜思하사 勿使如會之徒 復致傾覆하소서
馮紞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에 말하였다. “폐하께서 이미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의당 단단한 얼음은 점점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시어 鍾會와 같은 자들이 다시 나라를 기울게 하고 전복시키도록 하지 마소서.”
曰 當今 豈復有如會者邪리오 因屛左右而言曰 陛下謀畫之臣 著大功於天下하여
武帝가 말하였다. “지금 어찌 다시 종회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풍담이 이로 인해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였다. “폐하의 謀臣이 천하에 큰 공을 드러내어
據方鎭總戎馬者 皆在陛下聖慮矣니이다 默然이러시니 由是 止不徵華하시다
한 지역의 鎭을 차지하고 군대를 통수하는 것은 모두 폐하께서 염려해두실 일입니다.” 무제가 묵묵히 말이 없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張華를 부를 생각을 그만두었다.
역주
역주1 23-1-가 : 《資治通鑑》 卷81 〈晉紀3 武帝 中〉 太康 3년(282) 1월 조에 보인다.
역주2 晉武帝 : 236~290(재위 265~290). 西晉의 초대 황제 司馬炎으로, 자는 安世이다. 河內 溫縣 사람이며, 司馬懿의 손자이자 司馬昭의 적장자이다. 魏 元帝 咸熙 2년(265)에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晉王이 되고, 몇 달 뒤에 원제 曹奐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아 국호를 晉이라 하고, 수도를 洛陽으로 정하였다. 咸寧 6년(280)에 吳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연호를 太康으로 바꾸고 율령을 새로 정비하여 太康之治를 이루었다. 만년에 佚樂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였으며 어리석은 司馬衷을 태자로 세움으로써 훗날의 혼란에 빌미를 조성하였다. 病死하였다. 시호는 武皇帝, 묘호는 世祖이다.
역주3 張華 : 232~300. 西晉의 문학가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茂先이며 范陽 方城 사람이다. 晉 武帝 咸寧 5년(279)에 度支尙書에 임명되었다. 衆論과 달리 羊祜(221~278)‧杜預(222~285)와 함께 東吳를 토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진 무제 太康 1년(280) 3월에 동오가 멸망하자 廣武縣侯에 봉해졌다. 荀勗에게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나가 都督幽州諸軍事가 되었다. 惠帝가 즉위하자 太子少傅에 제수되었다. 楚王 司馬瑋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侍中에 제수되고 司空을 거쳐 壯武郡公에 봉해졌다. 趙王 司馬倫에게 피살되었다. 죽은 뒤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고 오직 서적만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저서에 《博物志》가 있다.
역주4 三公 : 서진의 3公은 太尉, 司空, 司徒이다. 뒤에 太宰, 太傅, 太保, 太尉, 司徒, 司空, 大司馬, 大將軍의 8公으로 확대되었으며, 대체로 황제의 친척이나 世家大族으로 충임되었다.
역주5 中書監 : 관직명이다. 魏 文帝 黃初 연간에 처음 설치하였으며, 주로 기밀문서를 관장하였다.
역주6 荀勗 : ?~289. 서진의 개국공신이자 音律學家, 文學家, 藏書家이다. 자는 公曾이며, 潁川 潁陰 사람이다. 후한 말의 경학가인 荀爽(128~190)의 증손자이다. 대장군 司馬昭의 記室이 되어 자주 계책을 진달하여 깊은 신임을 얻었다. 晉나라가 건국된 뒤 濟北郡侯에 봉해졌으며, 中書監, 侍中, 領著作을 역임하였다. 오랫동안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 군주의 은미한 뜻을 탐지하는 데 뛰어나서 죽을 때까지 寵祿을 보전하였다. 시호는 成이다. 열전이 《晉書》 卷39에 있다.
역주7 侍中 : 관직명이다. 동한 獻帝 이후 덕망이 높고 학식이 많은 儒者로 충임되었다. 晉나라에 와서 門下省의 장관이 되어 주로 간쟁을 담당하고 황제의 자문에 응하였다.
역주8 馮紞 : ?~286. 西晉의 奸臣이다. 자는 少冑이며 安平 사람이다. 魏郡太守, 步兵校尉, 越騎校尉, 左衛將軍, 御史中丞, 侍中, 散騎常侍 등을 역임하였다. 젊어서 經史 전적을 섭렵하고 변론에 뛰어났다. 晉 武帝의 총애를 받았으며 賈充‧荀顗(순의)와 함께 당을 이루었다.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가충의 딸을 훗날 晉 惠帝가 되는 태자 司馬衷에게 시집보내도록 무제를 설득하기도 하였다. 東吳 정벌을 반대했으나 결과적으로 순조롭게 동오가 멸망하자 정벌을 주장했던 張華와 더욱 틈이 벌어졌다. 病死하였다. 열전이 《晉書》 卷39에 있다.
역주9 伐吳之謀 : 장화가 東吳를 토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을 이른다.
역주10 齊王 : 晉 武帝 司馬炎의 同母弟인 司馬攸(248~283)를 이른다. 사마유는 자는 大猷, 어렸을 때의 자는 桃符로, 河內郡 溫縣 사람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총명하였으며, 書法에 뛰어났다. 백부 司馬師의 양자로 들어가 舞陽侯에 襲封되었다. 西晉이 건립된 후에 齊王에 봉해졌고, 驃騎將軍, 司空, 開府儀同三司 등을 역임하였다. 무제 말년에 荀勖‧馮紞 등의 참소로 조정에서 쫓겨나자 병이 나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시호는 獻王이다.
역주11 以華……軍事 : 晉 武帝 太康 3년(282) 1월 18일 甲午日의 일이다.
역주12 夷夏 : 사고본에는 ‘軍民’으로 되어 있다.
역주13 鍾會 : 225~264. 삼국시대 魏나라의 名將이자 서법가이다. 자는 士季이며, 潁川 長社 사람이다. 太傅 鍾繇(151~230)의 아들이다. 秘書郞, 黃門侍郞, 司徒를 역임하고 東武亭侯에 봉해졌다. 毌丘儉(관구검)과 諸葛誕을 정벌할 때 여러 번 묘책을 내어 前漢의 張良에 비견되었다. 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자 曹操의 증손 사위인 嵇康(224~263)의 죽음 역시 그의 무고에서 나왔다. 魏 元帝 景元 4년(263)에 鄧艾와 함께 鎭西將軍‧假節‧都督關中諸軍事가 되어 蜀漢 정벌에 참여하였는데, 촉한이 멸망하자 촉한의 降將 姜維와 함께 촉을 근거지로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부하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亂軍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4 免冠 : 사죄의 뜻을 나타내거나 파면도 불사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시한다.
역주15 孔子……進之 : 《논어》 〈先進〉 제21장에 “자로가 ‘옳은 것을 들으면 실행하여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부형이 계시니 어찌 들으면 곧 실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염유가 ‘옳은 것을 들으면 곧 실행하여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들으면 곧 실행하여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공자가 말하였다. ‘求(염유)는 물러나므로 곧 나아가게 한 것이고, 由(자로)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물러가게 한 것이다.[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子曰 求也退故進之 由也兼人故退之]”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6 漢高……夷滅 : ‘五王’은 楚王 韓信, 梁王 彭越, 淮南王 英布, 燕王 盧綰, 韓王 信을 가리킨다. 韓信(?~기원전 196)은 서한 개국공신으로 淮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楚의 項梁‧項羽를 섬겨 郎中이 되었으나 중용되지 못하였다. 뒤에 劉邦軍에 들어왔다가 승상 蕭何의 인정을 받아 대장군에 임용되었다. 三秦의 점령부터 垓下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漢軍을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高帝 4년(기원전 203)에 相國이 되고, 다음 해에 齊王이 되었다. 漢나라의 통일이 이룩되자 다시 楚王에 책봉되었으나 모반을 꾀한다는 참언을 받아 淮陰侯로 강등되었다. 고제 11년(기원전 196)에 陳豨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呂后에 의해 長樂宮에서 참살되었다. 彭越(?~기원전 196)은 서한 개국공신으로 山陽 昌邑 사람이다. 秦나라 말기에 군사를 모아 기병하였으며, 뒤에 3만 군사를 끌고 劉邦에게 귀의하여 魏相國, 建成侯에 봉해졌다. 韓信‧英布와 함께 漢初 3대 名將으로 불린다. 서한 건립 후에 梁王에 봉해졌으나 뒤에 모반했다는 고발을 받아 ‘모반의 형적이 이미 갖추어졌다.[反形已具]’라는 이유로 三族이 주멸되었다. 英布(?~기원전 196)는 秦末 漢初의 名將으로 六縣 사람이다. 秦나라 때 黥刑을 받았기 때문에 黥布라고도 불린다. 처음에는 項梁에게 귀의하였다가 항량이 죽자 項羽의 막하로 들어가 九江王에 봉해졌다. 일찍이 항우의 명을 받고 義帝를 격살하였다. 뒤에 漢나라에 귀의하여 유방을 따라 垓下에서 항우를 격멸하고 淮南王에 봉해졌다. 뒤에 韓信과 彭越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반란을 일으켰으나 고조에게 토벌되어 피살되었다. 盧綰(기원전 256~기원전 193)은 沛國 豊縣 사람으로 劉邦과 동향인이라 하여 총애를 받았다. 楚‧漢 전쟁 때 太尉가 되었고 長安侯에 봉해졌다. 뒤에 劉賈와 臨江王 共尉를 격멸하고 유방을 따라 燕王 藏荼를 격파하여 燕王에 봉해졌다. 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 12년(기원전 195)에 군사를 일으켜 진희를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흉노와 연대하려는 진희의 계획을 도왔는데, 뒤에 이 일이 알려지자 흉노로 달아났다. 흉노가 東胡盧王으로 삼았으나 1년여 만에 흉노에서 죽었다. 韓王 信(?~기원전 196)은 전국시대 말 韓나라 襄王의 庶孫이다. 張良을 따라 韓에 가서 장수가 되었다가 유방을 따라 漢中에 들어갔다. 고조 2년(기원전 205)에 韓王에 옹립되었다. 고조 6년(기원전 201)에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太原郡에 移封되어 태원군을 韓國으로 만들고 晉陽을 수도로 삼아 흉노에 대비토록 하였다. 뒤에 다시 馬邑으로 옮겨졌다. 여러 차례 冒頓單于(묵특선우)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다. 고조 11년(기원전 196)에 漢나라 장수 柴武에게 죽었다.
역주17 光武……克終 : 東漢 光武帝 劉秀(기원전 5~57)가 공신들로 하여금 정권을 잡지 못하게 하여 공신들이 모두 복록을 누리고 주벌되는 자가 없었던 것을 이른다. 동한 明帝 永平 3년(60)에 洛陽 南宮 雲臺閣에 동한의 개국공신 28명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를 雲臺二十八將 또는 中興二十八將이라 일컫는다. 이들 중 馮異(?~34), 岑彭(?~36), 祭遵(?~33), 劉植(?~26)이 일찍 죽은 것을 제외하고는 鄧禹(2~58), 吳漢(?~44)을 비롯하여 다른 공신들은 모두 평안한 여생을 보내고 천수를 누렸다. 《後漢書》에 이들의 열전이 있다.
역주18 : 사고본에는 ‘予’로 되어 있다.
역주19 : 대전본에는 ‘季’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20 : 대전본에는 ‘措’로 되어 있으나, 南宋 高宗 趙構를 피휘한 것이다.
역주21 稽首 : 신하가 임금에게 무릎을 꿇고 하는 절로,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하는 것[拜頭至地]’이다. 《周禮》 〈春官宗伯 大祝〉에 보이는 稽首, 頓首, 空首, 振動, 吉拜, 凶拜, 奇拜, 襃拜, 肅拜의 9拜 중 가장 중한 절이다. 凌廷堪의 《禮經釋例》 권1 〈周官九拜解〉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신하가 임금과 禮를 행할 때에는 계단을 내려가 再拜稽首하며 임금이 사양하면 당에 올라와 다시 再拜稽首한다.
역주22 堅冰之漸 : 《주역》 〈坤卦〉 初六 爻辭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곧 얼게 된다.[履霜堅氷至]”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미세한 조짐이 있을 때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알아서 경계하고 제거해야 함을 이른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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