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 武帝 時
에 尙書
가 以文學才識
으로 名重一時
하니 論者
가 皆謂華宜爲
이라하더니
會帝
가 問華誰可託後事者
어시늘 華
가 對以明德至親
이 莫如
이라하니
華
가 至鎭
하여 撫循
하니 譽望
이 益振
이어늘 帝
가 復欲徵之
러시니
馮紞
이 侍帝
하여 從容語及
러니 紞
이 曰 會之反
이 頗由太祖
니이다
帝
가 變色曰 卿是何言邪
오 紞
이 謝曰 臣
은 聞善馭者
는 必知六轡緩急之宜
하나니
非上有仁暴之殊
요 下有愚智之異也
라 蓋抑揚
奪
이 使之然耳
니
鍾會
가 才智有限而太祖
가 誇獎無極
하사 居以重勢
하며 以大兵
하여
使會
로 自謂算無遺策
하며 功在不賞
이라하여 遂
凶逆耳
니
向令太祖로 錄其小能하시며 節以大禮하시고 抑之以威權하시며 納之以軌則하시면 則亂心이 無由生矣리이다 帝가 曰 然하다
紞
이 曰 陛下
가 旣然臣之言
이신대 宜思
하사 勿使如會之徒
로 復致傾覆
하소서
帝가 曰 當今에 豈復有如會者邪리오 紞이 因屛左右而言曰 陛下謀畫之臣이 著大功於天下하여
據方鎭總戎馬者가 皆在陛下聖慮矣니이다 帝가 默然이러시니 由是로 止不徵華하시다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성知性의 힘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방법들(2)
간사奸邪한 자들이 임금을 속인 정상[참소하는 신하들]
진 무제晉 武帝 때에 상서 장화尙書 張華가 학문과 재능과 식견으로 당대에 명망이 높자 논하는 자들이 모두 장화가 삼공三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중서감 순욱中書監 荀勗과 시중 풍담侍中 馮紞이 오吳나라 정벌에 대한 논의로 장화를 매우 미워하였다.
마침 무제가 누구에게 뒷일을 부탁할 만하느냐고 장화에게 묻자, 장화가 덕망이 높고 지극히 가까운 친척으로는 제왕齊王(사마유司馬攸)만 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무제의 뜻을 거슬렀다. 순욱이 이를 기회로 삼아 장화를 참소하자, 무제가 장화를 도독유주제군사都督幽州諸軍事에 임명하였다.
장화張華가 진鎭에 도착하여 호인胡人과 한인漢人을 위무慰撫하자 명망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에 무제武帝가 다시 장화를 부르고자 하였다.
풍담馮紞이 무제를 모시고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때 종회鍾會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풍담이 말하였다. “종회의 반란은 상당 부분 태조(사마소司馬昭)에게서 연유한 것입니다.”
무제가 안색이 변하여 말하였다. “경卿의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풍담이 관冠을 벗어 사죄하고 말하였다. “신은, 수레를 잘 모는 자는 반드시 여섯 마리 말에 맨 고삐의 완급을 적절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공자가 중유仲由(자로子路)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하여 물러나게 하고 염구冉求는 유약하다고 하여 나아가게 했던 것이며, 한 고조漢 高祖가 다섯 왕을 존귀하게 하고 총애하여 이들이 주멸되었던 것이며, 후한 광무제後漢 光武帝가 여러 장수들을 억제하여 이들이 죽을 때까지 복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윗사람에게 어짊과 포악함의 다름이 있고 아랫사람에게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억제와 선양, 부여와 박탈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뿐입니다.
종회는 재능과 지모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태조는 칭찬과 장려를 끝없이 하여 큰 권세를 주고 많은 군대를 맡김으로써,
종회로 하여금 자신이 낸 계책은 잘못된 계책이 없고 자신이 이룬 공은 상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모반을 꾸미도록 한 것입니다.
당초에 태조가 그 작은 재능을 써서 임용하고 대례大禮로 절제하며 위엄과 권세로 억제하고 올바른 법도를 따르도록 하셨다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생겨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제가 말하였다. “옳은 말이다.”
풍담馮紞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에 말하였다. “폐하께서 이미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의당 단단한 얼음은 점점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시어 종회鍾會와 같은 자들이 다시 나라를 기울게 하고 전복시키도록 하지 마소서.”
무제武帝가 말하였다. “지금 어찌 다시 종회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풍담이 이로 인해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였다. “폐하의 모신謀臣이 천하에 큰 공을 드러내어
한 지역의 진鎭을 차지하고 군대를 통수하는 것은 모두 폐하께서 염려해두실 일입니다.” 무제가 묵묵히 말이 없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장화張華를 부를 생각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