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13-4-나(按)
[臣按] 百家의 학설 중에 오직 老子만이 포괄하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그중에서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들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가지 보물은 자애와 검소함과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 것이다.”라든가
“내가 작위하는 바가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내가 일삼아서 애쓰지 않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소박해지며, 정이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깨끗해진다.”와 같은 것들은 이치에 가까운 말들입니다.
曹參이 이것으로 漢나라의 재상이 되어 백성을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효과를 거두었고, 文帝가 이것으로 漢나라를 다스려서 물자가 풍부해지고 인구가 많아지는 공효를 이루었으니, 비록 군자라 할지라도 노자의 학술에서 취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原注
“玄牝(코와 입)의 문이 천지의 元氣와 통하는 근원이다. 실낱같이 이어져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쉬지만 이를 쓰는 것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養生의 말입니다. 이것을 方士들이 祖述하고 있습니다.
“장차 움츠리려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陰謀의 말입니다.
范蠡가 이 말을 써서 吳나라를 취하고 張良이 이를 근본으로 項羽를 멸하여서 用兵을 말하는 자들이 숭상하는 구절입니다.
“大道가 없어진 뒤에 仁義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으며,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仁이 있게 되며, 仁을 잃은 뒤에 義가 있게 되고, 義를 잃은 뒤에 禮가 있게 되니, 禮는 忠信이 희박해진 것이며 혼란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병폐를 바로잡는 말인데 방탕한 자들이 宗旨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형체 있는 사물을 조잡한 자취로 여기고 공허함을 오묘한 쓰임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蒙莊氏(장자)가
注+‘蒙莊氏’는 莊周이다. 이를 그대로 따라 황당무계한 말로 세상에서 떠들어대자 淸談을 일삼는 자들이 이를 본받았습니다.
이것이 이치에 가깝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참으로 취할 만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모두 우리 儒家의 聖人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이보다 못한 설들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한쪽만의 학설일 뿐입니다.
原注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漢나라 이래로 黃老라는 명칭이 있으니, 黃帝 역시 聖人이다. 그 도가 노자와 같은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원들이 神農을 祖宗으로 삼고 무당들이 大禹를 조종으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올바른 전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漢 文帝는 黃老學을 써서 천하가 편안하였고 武帝는 儒術을 써서 천하가 피폐했으니, 그렇다면 유술이 과연 황로학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맑고 조용하고 자애롭고 검소함은 노자 학설의 장점인데, 문제가 이것을 썼기 때문에 그 효과가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백성을 부유하게는 하였으나 교화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만일 공자의 도를 썼다면 그 이룬 공이 어찌 여기에 그쳤겠습니까. 무제는 儒術에 대해 단지 그 이름만 존숭한 것뿐이며 백성을 해친 것은 神仙術‧刑名術‧兵家의 죄이니,
유술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신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