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文帝가 태자였을 때 王粲‧阮瑀 등과 같은 한 시대의 문사들과 교유하였으니, 이들을 ‘建安七子’라고 부릅니다.
문제와 왕찬 등이 지었던 문장들이 지금까지 모두 남아 있는데,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참으로 있다고 하겠지만 《詩經》의 風‧雅나 《書經》의 典‧誥를 가지고 헤아려보면 죄인입니다.
광대한 도량과 공평한 성심으로 뜻에 매진하고 도를 보존하여 능히 덕스러운 마음을 넓히는 것은 모두 임금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자가 되어서는 기쁨이 안색에 드러났고, 상을 당해서는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슬퍼하지 않았으며, 동기간의 은혜에 야박하였고, 총애가 사라진 배필을 죽였으며, 玩好 때문에 먼 지역에서 나는 물건을 찾고, 개인적인 유감 때문에 간언한 관원을 욕보였으니, 이는 힘써야 할 점에 대해 힘쓸 줄 몰랐던 것입니다.
書‧論‧詩‧賦는 文士의 변변치 못한 재주일 뿐이니 임금이 힘써야 할 것이 아닌데도 마침내 우쭐대며 스스로 자랑하여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식견과 도량이 이러하였으니, 史臣(陳壽)에게 비판을 받았던 것도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