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克’은 싸워서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는 것을 이릅니다. 사욕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외적의 침범보다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용감히 나아가고 힘써 행하여 사욕을 이겨 없애는 것입니다.
原憲이 묻기를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克]과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려는 마음[伐]과 원망하는 마음[怨]과 탐하는 마음[欲]을 행하지 않으면 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仁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려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과 탐하는 마음 이 네 가지는 모두 私心입니다.
注+原憲이 말한 ‘克’은, 남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지 사욕을 극복하는 것을 이른 것이 아니다. 原憲은 단지 이를 억눌러서 행하지 않는 것을 곧 ‘仁’으로 생각하고자 하였기에 孔夫子가 이를 허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克己(사욕을 이기는 것)는 분발하여 결연히 떨쳐버린다는 말이지 억누르고 막아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로운 나무를 제거할 때에 비단 그 가지와 줄기를 잘라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顔子와 같은 큰 용기[大勇]가 아니라면 聖人인 孔子가 이를 쉽게 허여하고자 했겠습니까.
原注
‘仁’이라는 글자가 經書에 보이는 것은 《書經》 〈商書 仲虺之誥〉부터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너그럽고 능히 인자하여 드러나서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으셨습니다.[克寬克仁 彰信兆民]”라고 하였고, 伊尹이 이를 이어서 “백성은 일정하게 흠앙하는 사람이 없어 어진 사람을 흠앙한다.[民罔常懷 懷于有仁]”라고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에 있는 것으로는 이를테면 〈虞書〉에 이른바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면 은혜로운 것이다.[安民則惠]”와 같은 것이 곧 이른바 ‘仁’이지만 아직 ‘仁’이라는 명칭은 있지 않았습니다.
〈商書〉에 이르러 ‘仁’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났지만 〈商書〉에서 ‘仁’이라고 한 것은 대체로 모두 仁의 작용이고, 顔子가 묻고 孔子가 답한 것이 곧 仁의 본체입니다.
原注
二帝와 三王은 비록 이겨야 할 사욕이 없었지만 舜임금이 이른바 “人心은 위태롭고 道心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專一하게 지켜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라고 한 것과,
成湯이 “음란한 음악과 아름다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재화와 이익을 증식하지 않으시며, 예에 따라 마음을 제어했다.[不邇聲色 不殖貨利 以禮制心]”라고 한 것은 그 힘을 쓴 것이 애당초 顔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대개 반드시 顔子와 같은 仁을 소유한 뒤에야 二帝와 三王과 같은 仁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덕을 이루는 것과 만물의 덕을 이루어주는 것이 서로 끝과 시작이 되는 이유입니다.
原注
唐 太宗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으로 말하면 仁의 작용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또한 간언을 받아들여 과실을 고쳐 사욕을 이기는 것을 대강이나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과가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욕을 이기는 공부는 적었고 사욕을 부리는 잘못은 많았기 때문에 겨우 太宗 정도의 仁이 될 수 있었을 뿐이고 二帝‧三王과 같은 仁은 될 수 없었습니다.
바라옵건대 聖明한 임금이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쓰기를 二帝‧三王과 같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漢‧唐 시대 임금들 정도에 스스로 안주하지 않는다면,
바로 孔門의 克己復禮하는 공부에 매진하여 그 힘을 써서 반드시 天理가 온전히 보존되고 인욕이 없어지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仁으로 돌아가는 날이 머지않을 것입니다. 신은 간절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