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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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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8-15-나(按)
按 賈充 自司馬昭相魏時注+昭, 魏三公. 充, 昭之黨. 輔成簒弑之事하니 在晉室則爲元功이나 其實 天下之大賊也
18-15-나(按)
[臣按] 賈充은 司馬昭가 魏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부터注+司馬昭는 魏나라의 三公이었다. 賈充은 사마소의 당여이다. 魏나라의 황제를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하는 일을 도와 이루어주었으니, 晉나라에 있어서는 元勳이지만 사실은 천하의 큰 도적입니다.
用事日久하니 姦邪小人如荀 朋而翼之하여 一出外而失其所恃也
권력을 전횡한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荀勗의 무리와 같은 간사한 소인들이 그 당여가 되어 도와서 오직 가충이 한 번 지방으로 나가면 의지할 곳을 잃게 될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故秦‧涼之行 且赴鎭矣而荀 爲畫結婚之謀하고 且力稱充女之才德하니 於是 充遂留而婚以成하니
이 때문에 가충이 秦州‧涼州로 곧 부임하러 떠나려 하자 순욱이 태자와의 혼인을 맺어줄 모략을 꾸미는 동시에 가충의 여식이 재주와 덕이 있다고 힘주어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충은 마침내 경사에 남게 되었고 그의 여식과 태자는 혼인이 이루어졌습니다.
注+見後. 然內則楊后 受郭槐之賂하여 以主之하고 外則荀諸人 更相從臾하여 以助之하니
武帝는 일찍이 賈充의 여식에게 태자비로 불가한 점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注+뒤의 后德篇에 보인다. 그러나 안으로는 楊황후가 郭槐의 뇌물을 받고서 가충의 여식을 태자비로 세우자고 주장하고, 밖으로는 荀勗 등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부추겨서 이 주장을 도우니,
雖帝 初心之明이나 至此 亦眩惑不能自決矣 蓋姦臣 用事 未有不內結宮闈하며 外交群小而後 能遂其所欲者
비록 무제가 애초의 마음은 밝았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무제 역시 현혹되어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신이 권력을 전횡할 때 안으로는 后妃와 결탁하고 밖으로는 여러 소인들과 결탁하지 않음이 없은 뒤에야 마침내 그가 바라던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妃立而하니 先儒邵雍 以爲之時라하니 豈不然哉리오
가충의 여식이 태자비가 되면서 晉나라의 혼란이 싹트게 되었으니, 先儒 邵雍이 “진나라의 재앙은 夕陽亭의 한마디에 있었고, 石勒이 上東門에서 긴 휘파람을 불 때에 있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 어찌 옳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역주
역주1 : 대전본에는 ‘勉’으로 되어 있으나,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2 : 대전본에는 없다.
역주3 : 대전본에는 ‘勉’으로 되어 있으나,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4 帝嘗……可矣 : 晉 武帝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위공의 여식은 다섯 가지 가한 점이 있고, 가공의 여식은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 위씨 집안의 후손은 어질고 자녀가 많으며, 본인은 아름답고 키가 크고 피부가 희다. 가씨 집안의 후손은 투기하고 자녀가 적으며, 본인은 못생기고 키가 작고 피부가 까맣다.[衛公女有五可 賈公女有五不可 衛氏種賢而多子 美而長白 賈氏種妬而少子 醜而短黑]” 《資治通鑑 卷79 晉紀1 武帝 上之上 泰始 7年》
역주5 后德篇 : 자세하지 않다. 내용으로 볼 때 《대학연의》 권36~37 〈齊家之要〉 ‘重妃匹’ 조에 있어야 할 듯하나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고, 권43 〈齊家之要〉 ‘敎戚屬’ 조에 賈황후가 태자비로 있을 때와 황후로 있을 때의 악행에 대한 언급은 보이나 ‘五不可’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역주6 : 대전본에는 ‘勉’으로 되어 있으나,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7 晉室之亂 : 晉 惠帝(259~307, 재위 290~307) 元康 원년(291)부터 光熙 원년(306)까지 16년 동안 지속된 ‘八王之亂’을 가리킨다. 290년에 武帝가 죽고 혜제가 즉위한 뒤 태후의 아버지 楊駿(?~291)이 太傅로서 권력을 전횡하자, 291년 3월에 賈황후(257~300)는 조서를 위조하여 都督荊州軍事 楚王 司馬瑋(271~291)에게 入京하도록 하여 양준과 그 당여 및 일족 수천 명을 죽이고 楊태후를 폐위하였다. 양준을 뒤이어 汝南王 司馬亮(?~291)과 太保 王瓘이 권력을 잡자, 가황후는 다시 사마위로 하여금 이들을 살해하도록 하고, 이어서 ‘조서를 위조하여[矯詔]’ 제멋대로 大臣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사마위를 죽였다. 또 태자 司馬遹(사마휼, 278~300)이 자신의 소생이 아니라고 하여 살해하였다. 혜제 永康 원년(300) 4월에 宿衛禁兵을 관장하던 趙王 司馬倫(?~301, 재위 301.1~301.4)이 군사를 일으켜 가황후 및 張華‧裴顗(의)‧賈謐(밀) 등을 살해하고 스스로 相國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혜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사마륜은 齊王 司馬冏(사마경, ?~302) 등에게 패하자 혜제를 복위시키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곧 賜死되고 뒤이어 사마경이 대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사마경은 다시 長沙王 司馬乂(277~304)에게, 사마예는 東海王 司馬越(?~311)에게 피살되었다. 사마월은 또 태자를 폐위하고 스스로 皇太弟가 된 成都王 司馬穎(사마영, 279~306)과 혼란을 틈타 대권을 쥔 河間王 司馬顒(사마옹, ?~306)을 죽이고 이어서 혜제를 독살한 뒤 武帝의 25번째 아들을 옹립하였다. 바로 西晉 제3대 황제 懷帝(284~313, 재위 307~311)이다. 이 八王의 난으로 인해 西晉은 급속히 와해되어 316년에 멸망하고, 317년에 南京을 도읍으로 정한 東晉이 시작되었다.
역주8 禍在……之時 : 북송의 儒者 邵雍(1011~1077)의 〈觀西晉〉이라는 칠언율시 마지막 구절 “재앙은 석양정의 한마디에 있었으니, 상동문의 휘파람 소리 아득하도다.[禍在夕陽亭一句 上東門嘯浪悠悠]”에서 나온 말이다. 《宋文鑑 卷25 七言律詩 觀西晉》
역주9 石勒長嘯上東門 : 石勒(274~333, 재위 319~333)은 5胡 16國 시대 後趙를 건립한 後趙 明帝이다. 初名은 石㔨(배), 자는 世龍이다. 羯族이며 지금의 산서성 楡社縣인 上黨 武鄕 사람이다. 처음에는 前趙의 개국 황제 劉淵(?~310, 재위 304~310) 아래로 들어갔으나 319년에 前趙 昭文帝 劉曜(?~329, 재위 318~329)와 결별하고 자립하여 趙王을 칭하였다. 329년에 前趙를 멸망시키고 북쪽으로 冀‧幷‧幽‧司‧豫‧兗‧靑‧徐‧雍‧秦 등 10州를 점령하며 16국 중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로 만들었다. ‘長嘯上東門’은 석륵이 14세 때 고향 사람을 따라 洛陽에 와서 18개의 성문이 있는 낙양성의 동문 세 곳 중 가장 북쪽에 있는 上東門에서 장사할 때 이 문에 기대고서 긴 휘파람을 불던 것을 이른다. 당시 지나가던 西晉의 尙書左僕射 王衍(256~311)이 우연히 이를 보고 “이 胡人 아이는 내가 보니 그 소리에 비범한 뜻이 있어 보인다. 장차 천하의 우환이 될 것이다.[胡雛 吾觀其聲視有奇志 恐將爲天下之患]”라고 하여 사람을 보내 붙잡게 하였으나 석륵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고 한다. 《晉書 卷104 載記4 石勒 上》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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