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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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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陰計하여 附離權强하고 其外自處 若簡重而中險譎可畏러니 하다
20-16-가
崔胤이 음모를 좋아하여 권세 있는 자들에게 붙었으며 겉으로는 그 자신의 처신이 매우 장중한 듯 보였지만 내면은 무서울 정도로 음험하고 간사하였는데, 昭宗이 그를 등용하여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하였다.
素厚注+全忠, 卽朱溫. 本黃巢之將, 後降以爲節度使.하여 委心結之러니 陰爲全忠地하여 俾擅兵四討하고 數爲全忠하여 畫醜計하더니
최윤은 평소 朱全忠과 친분이 두터워注+朱全忠은 즉 朱溫이다. 본래 黃巢의 장수였는데, 뒤에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절도사가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그와 사귀었는데, 암암리에 주전충의 기반이 되어 주전충이 병권을 전단하여 사방으로 토벌을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자주 주전충을 위하여 흉계를 꾸미곤 하였다.
先是하여 全忠 雖據河南하나諸侯 相持 未敢移國이러니
이에 앞서 주전충은 비록 河南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강한 方鎭들을 돌아보았을 때 서로들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나라를 찬탈하지 못했었다.
及胤 與相結 得梯其禍하여 取朝權以하여 終亡天下하고 亦身屠家滅하니라
최윤이 그와 결탁하게 되자 화란을 일으킬 계제를 만들 수 있어서, 조정의 권력을 손에 넣어 강대하게 되어 끝내 당나라를 멸망시켰다. 최윤 역시 자신은 도륙되고 집안은 멸족되었다.
亦相昭宗하여 密結中人하며 外連諸侯하여 制天子以固其權하더니 誅死하다
당시 崔昭緯라는 자가 또한 昭宗의 재상이 되어 남몰래 환관들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강한 方鎭들과 연계하여 소종을 제어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였는데, 뒤에 죽임을 당하였다.
又有 爲相하여 挾全忠爲重하더니
또 柳璨이라는 자가 재상이 되어 朱全忠을 믿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마침 혜성이 太微星과 文昌星 사이에 출현하자,
占者 曰 君臣 皆不利 宜多殺하여 以塞天變이라하여늘
점을 치는 자가 “임금과 신하가 모두 이롭지 않으니 대대적으로 살륙하여 하늘의 이변을 막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等三十餘人하여 皆誅死한대 天下 以爲寃하더라 全忠 急於하여 하다
유찬이 이에 자신이 원수로 여기고 꺼리던 獨孤損과 같은 자들 30여 명을 손수 열기하여 이들을 모두 죽이자 천하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다. 뒤에 주전충은 九錫을 받는 데 마음이 급하여 유찬이 자신을 저지한다고 의심하여 죽였다.
曰 木將壞 蟲實生之하고 國將亡 妖實産之
《新唐書》 〈姦臣列傳 贊〉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무가 썩으려고 할 때에는 벌레가 반드시 생겨나고, 나라가 망하려고 할 때에는 요망한 일이 반드시 발생한다.
그러므로 세 재상이 흉인을 불러들이자 암탉이 새벽에 울고,注+‘三宰’는 李勣‧許敬宗‧李義府를 이르니, 모두 高宗에게 武后를 책봉할 것을 권했던 자들이다. 李林甫가 藩將을 기용하자 황제가 피난 갔으며, 못생긴 盧杞가 大計를 그르치자 興元 연간의 조정이 위축되고,注+‘鬼質’은 盧杞를 이른다.
崔‧柳 注+謂崔‧柳璨也.하니 嗚呼 有天下者 可不戒哉
崔胤과 柳璨이 權柄의 칼날을 거꾸로 쥐고 남에게 건네주자 당나라 왕실이 전복되었던 것이다.注+‘崔柳’는 崔胤과 柳璨을 이른다. 아, 천하를 소유한 자들은 경계로 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역주
역주1 20-16-가 : 《新唐書》 권223下 〈姦臣列傳 崔胤, 崔昭緯, 柳璨〉에 보인다.
역주2 崔胤 : 854~904. 당나라의 재상이다. 자는 昌遐이며 일설에는 垂休라고도 한다. 지금의 산동성 武城縣인 淸河 武城 사람이며 재상 崔愼由의 아들이다. 中書舍人, 御史中丞 등을 거쳐 昭宗(재위 888~904) 景福 2년(893)에 재상이 되었다. 朱溫(852~912), 즉 朱全忠과 결탁하여 그 힘으로 네 차례 재상이 되었기 때문에 崔四入이라고 불린다. 901년에 주온으로 하여금 군대를 끌고 가서 환관 韓全誨(?~903)의 겁박으로 鳳翔에 가 있는 昭宗을 맞이해오도록 하여 侍中‧魏國公에 봉해졌다. 뒤에 주온이 제위를 찬탈할 것을 예상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다가 주온의 아우 朱友諒에게 피살되었다.
역주3 昭宗 : 867~904(재위 888~904). 武則天과 殤帝를 포함하면 당나라 제23대 임금으로 휘는 曄이다. 初名은 杰이며 즉위한 뒤 敏으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曄으로 바꾸었다. 시호는 聖穆景文孝皇帝이다. 21대 임금 懿宗(재위 859~873)의 일곱째 아들이자 22대 임금 僖宗(재위 873~888)의 아우이다. 처음에 壽王에 봉해졌다. 희종 文德 원년(888)에 환관 楊復恭에 의해 皇太弟로 옹립되고 얼마 뒤 즉위하였다. 당시 재상 崔胤과 환관 韓全誨가 각각 藩鎭과 결탁하고 권력을 다투었는데, 昭宗 天復 원년(901)에 한전회가 소종을 겁박하여 鳳翔으로 끌고 가서 절도사 李茂貞에게 의탁하자, 최윤은 宣武節度使 朱溫을 끌어들여 이를 공격하였다. 천복 3년(903)에 이무정이 한전회를 죽이고 주온과 화친을 맺음으로 인해 장안으로 돌아온 소종은 환관 700여 명을 죽였다. 모든 일을 주온에게 제재받고 洛陽으로 천도까지 하였으나 얼마 뒤에 주온에게 피살되었다.
역주4 用爲平章事 : 昭宗 景福 2년(893) 9월 27일 壬辰日의 일이다. 이때 御史中丞이었던 崔胤은 戶部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역주5 朱全忠 : 859~912. 재위 907~912. 五代 後梁의 태조 朱溫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朱三이며, 당나라 조정에서 朱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나 後梁을 건국한 뒤에 朱晃으로 개명하였다. 宋州 碭山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黃巢 밑으로 들어가 同州防御使가 되었다. 唐 僖宗 中和 2년(882)에 당나라에 항복하여 河中行營招討副使에 임명되고 朱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황소의 군대를 격퇴하는 등의 공을 세워 梁王에 봉해지고 宣武‧宣義‧護國‧天平 4鎭의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904년에 昭宗을 죽이고 907년에 稱帝하여 국호를 梁이라 하고 도읍을 汴州로 정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哀帝(892~908, 재위 904~907)를 살해하였다. 912년에 셋째 아들 朱友珪(884~913)에게 피살되었다.
역주6 : 사고본에는 ‘强’으로 되어 있다.
역주7 : 대전본에는 ‘疆’, 사고본에는 ‘强’으로 되어 있다.
역주8 崔昭緯 : ‘緯’는 대전본에는 ‘偉’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崔昭緯(?~895)는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蘊曜이며 지금의 하북성 淸河縣 서북쪽에 있던 淸河 사람이다. 僖宗 中和(881~894) 연간에 進士에 급제하고 昭宗 大順 2년(891)에 戶部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안으로 환관과 결탁하고 밖으로 藩鎭과 연결하여 임금을 속이고 권력을 전횡하였다. 소종이 미워하여 乾寧 2년(895)에 재상에서 파직시키고 梧州司馬 등으로 좌천시켰다가 賜死하였다.
역주9 : 사고본에는 ‘强’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柳璨 : ?~907. 당나라 말기의 재상이다. 자는 炤之이며 京兆 華原 사람이다. 서법가 柳公綽‧柳公權 형제의 족손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다. 昭宗 光化(898~900) 연간에 進士에 합격하고 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 904년에 재상 崔胤이 피살된 뒤 諫議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朱全忠이 帝位 찬탈을 도모하는 것을 알고 위험한 시국에 兵權을 장악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불탑을 무너뜨리고 구리와 철을 꺼내 병기를 만들었는데, 마침 주전충의 아들 朱友倫이 球戱를 하다가 낙마하여 죽자 유찬이 남몰래 손을 쓴 것이라고 의심한 주전충에 의해 崖州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참수되었다.
역주11 會彗……天變 : 哀帝 天祐 2년(905) 5월의 일이다.
역주12 璨乃……誅死 : 애제 천우 2년(905) 5월에 점치는 자의 말을 들은 柳璨이, 자신이 평소 원수로 여긴 자들을 朱全忠에게 열기하고서 이들을 죽여 하늘의 재이를 막자고 하자, 주전충은 이를 옳게 여겨 獨孤損‧裴樞 등을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가 동년 6월에 白馬驛에 이들을 모이게 한 뒤 賜死하고 그 시신은 渭水에 던졌다.
역주13 獨孤損 : ‘損’은 대전본에는 없다. 獨孤損(?~905)은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又損이며 지금의 하남성 洛陽市인 河南 사람이다. 昭宗 天復 3년(903) 12월 15일 辛巳日에 兵部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애제 천우 2년(905)에 安南都護‧靜海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인 5월 15일 癸酉日에 棣州刺史로 좌천되고, 다시 5월 23일 신사일에 瓊州司戶로 좌천되었다가, 6월 1일 戊子日에 裴樞 등과 함께 白馬驛에서 朱全忠에게 賜死되었다.
역주14 九錫 : 천자가 최고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제후나 大臣에게 내려준 車馬, 衣服, 樂則, 朱戶, 納陛, 虎賁, 弓矢, 鈇鉞, 秬鬯 등 아홉 가지 특전을 이른다. 여기에서는 權臣이 帝位를 찬탈하는 것을 비유한다. 《春秋公羊傳 莊公 元年 何休注》
역주15 疑璨沮己殺之 : 朱全忠에게 宣徽北院使 王殷이 柳璨의 죄를 날조하여 배신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하자, 이 말을 전해들은 유찬은 두려워서 哀帝를 협박하여 주전충에게 제위를 선위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주전충은 유찬 등이 자신을 배신했을 것이라고 의심했을 때 유찬보다 먼저 자신에게 달려와 변명했던 유찬의 동료 蔣玄暉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찬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하여 登州刺史로 좌천시켰다. 얼마 뒤에 주전충은 유찬을 평민으로 만들고 崖州로 추방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유찬을 살해하였다.
역주16 唐史姦臣傳贊 : 《新唐書》 권223下 〈姦臣列傳〉의 贊을 이른다.
역주17 : 대전본에는 ‘溥’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18 三宰嘯凶牝奪晨 : 19-2-가, 19-4-가 참조.
역주19 李勣 : 594~669. 당 고조‧태종‧고종 때의 명장이자 재상으로, 凌煙閣 24공신 중 1인이다. 원래의 姓名은 徐世勣이다. 자는 懋功이다. 曹州 離狐 사람이다. 唐 高祖 李淵에게 ‘李氏’로 賜姓되었다. 처음에는 李密의 瓦崗軍에 종군하였다. 당에 귀순하여 黎陽總管이 되었다. 秦王 李世民을 따라 竇建德‧王世忠‧劉黑闥 등을 격파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태종이 즉위한 뒤에 幷州都督이 되어 돌궐을 격파하고 英國公에 봉해졌다. 이후로 薛延陀, 高句麗 원정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兵部尙書, 太常卿, 太子詹事, 遼東道行軍總管 등을 역임하였으며, 고종 때 尙書左僕射‧司空에 임명되었다. 總章 2년(669)에 죽었다. 太尉‧揚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貞武이다.
역주20 許敬宗 : 592~672. 唐나라의 대신이다. 자는 延族이다. 杭州 新城 사람이다. 부친은 隋代의 禮部侍郎 許善心이다. 隋 煬帝 大業 연간에 秀才로 천거되었다. 얼마 뒤 李密 휘하에서 記室이 되었다. 唐初에는 秦王府 18學士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태종 貞觀 연간에 著作郞‧中書舍人‧修國史‧洪州司馬‧給事中‧太子右庶子 등을 역임하였다. 高宗 때 禮部尙書가 되어 李義府 등과 함께 高宗이 武則天을 황후로 세우는 것을 도와 侍中에 발탁되었다. 또 무측천을 도와 褚遂良을 축출하고 長孫無忌와 上官儀 등을 압박해 살해했다. 고종 顯慶 연간에 中書令‧右相이 되고, 이의부 등과 함께 조정을 관장했다. 일찍이 監修國史를 지냈다. 高陽郡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繆이다. 19-2-가 ‘許敬宗’ 주석, 19-4-가 참조.
역주21 李義府 : 614~666. 唐 高宗 때의 재상이다. 瀛州 饒陽 사람이다. 성품이 음흉하고 남을 대할 때 유순하면서도 남몰래 해쳐서 ‘웃음 속에 칼이 있다.[笑中有刀]’라고 일컬어졌다. 監察御史, 太子舍人, 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고종이 태자일 적에 동궁 속관이 되었는데, 고종에게 영합하여 신임을 얻었다. 고종에게 王皇后를 폐위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삼을 것을 건의하여 처음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삼품에 제수되어 재상으로 朝政에 참여하고 廣平縣男에 봉해졌다. 사당을 결성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권력을 휘둘렀다. 후에 중서령에 제수되고 河間郡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뇌물을 수수하고 매관매직한 일로 右金吾倉曹參軍 楊行穎의 탄핵을 받아 巂州로 유배되어 실각하여 울분 속에 죽었다. 무측천의 즉위 후에 揚州大都督에 추증되었으나 睿宗 연간에 다시 거두어졌다. 19-3-가 ‘李義府’ 주석, 19-4-가 참조.
역주22 高宗 : 628~683(재위 649~683). 唐나라 제3대 황제 李治이다. 소자는 雉奴이다. 자는 爲善이다. 시호는 天皇大聖大弘孝皇帝이다. 長安 사람이다. 唐 太宗의 제9남이며, 모친은 文德順聖皇后 長孫氏이다. 성품이 유약하였다. 貞觀 5년(631) 晉王에 봉해졌다. 정관 17년(643)에 태자 李承乾이 폐위되자, 태자로 책립되었다. 즉위 후에는 貞觀之治의 遺風을 계승하여 태종의 舊臣을 중용하고 정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唐朝의 典章制度를 모두 갖추어 永徽之治를 이루었고, 서돌궐 평정과 고구려 멸망 등 대외 확장에 성과를 거두어 唐代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영휘 6년(655)에 王皇后를 폐하고 武后(則天武后)를 세우고 이에 반대한 褚遂良‧長孫無忌 등 고명대신을 축출하였다. 顯慶 5년(660) 병이 심해진 뒤에는 무후에게 정치를 위임하여 실권을 잃었다. 19-2-가 ‘唐高宗’ 주석 참조.
역주23 武后 : 624~705. 唐 高宗의 后妃인 則天武后이다. 幷州 文水 사람이다. 시호는 則天大聖皇后이다. 지혜가 많고 문사를 겸했다. 14세에 太宗의 才人이 되었다가 태종의 사후에 感業寺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高宗 永徽 초에 고종이 다시 입궁시켜 昭儀로 삼았다. 영휘 6년(655)에 황후가 되었고, 顯慶 5년(660)에 고종의 병환이 중해지자 국정을 위임받아 처리했다. 上元 원년(674)에 天后라고 칭했다. 고종의 사후, 中宗이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어 臨朝稱制했다. 중종을 폐위하고 睿宗을 세운 후에 국정을 혼자 처리했다. 天授 원년(690)에 국호를 周로 고치고 聖神皇帝라고 칭제하였다. 재위 동안 정적을 축출하고 酷吏를 중용하여 밀고를 크게 장려했다. 宗室과 舊臣을 크게 탄압했다. 《氏族志》를 《姓氏錄》으로 바꾸어 5품 이상의 관원을 士流로 편입하고, 殿試와 武擧를 실시하여 인재를 발탁했다. 불교를 진흥시키고 명당을 만들었으며 員外試官을 설치했다. 농업을 중시해 호구를 증가시킴으로써 경제를 발전시켰다. 말년에 병이 위중해지자, 張柬之 등이 중종을 복위시켰다. 사후 고종과 함께 건릉에 합장되었다. 19-2-가 ‘武昭儀’ 주석 참조.
역주24 林甫將蕃黃屋奔 : ‘黃屋’은 왕의 수레를 덮는 누런 비단으로, 여기서는 唐 玄宗을 가리킨다. 관련 내용은 19-16-가 참조.
역주25 鬼質敗謀興元蹙 : 20-10-가1, 20-11-가 참조.
역주26 盧杞 : ‘杞’는 대전본에 ‘相’으로 되어 있다. ‘盧杞’는 20-5-가 ‘盧杞’ 주석 참조.
역주27 倒持 : 검을 거꾸로 쥐고 칼자루를 남에게 주었다가 도리어 자신이 해를 입는 것을 이른다.
역주28 : 대전본‧사고본에는 ‘李’로 되어 있다.
역주29 : 대전본에는 ‘嗣’로 되어 있으나, 北宋 태조 趙匡胤을 피휘한 것이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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