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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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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0-9-나(按)
按 姦臣 必求士大夫柔懦緘默易制者하여 爲己之貳然後 權一出於己而莫與爭하나니
20-9-나(按)
[臣按] 간신이 국정을 전단할 때에는 반드시 사대부 중에 유순하고 말이 없으며 제어하기 쉬운 자를 찾아서 자신의 보좌관으로 만듭니다. 그런 뒤에 권력이 한결같이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과 권력을 다투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之用 之用 是也 彼其人品 素下하니 何敢以廊廟自期리오
霍光이 楊敞을 등용했던 것과 李林甫가 陳希烈을 등용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저들은 인품이 평소 낮았으니 어찌 감히 조정의 높은 벼슬을 스스로 기약하였겠습니까.
爲權臣引拔至此 方銜恩思報之不暇有所同異乎
그런데 하루아침에 權臣에 의해 발탁되어 이런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은혜에 감격하여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권신과 다른 뜻을 두겠습니까.
杞之用關播 意蓋 近世 之徒 亦倣此術이라 故能久하니 人主 不可以不察이니이다
노기가 관파를 등용했던 것은 그 뜻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근세에 蔡京‧秦檜‧韓侂冑의 무리가 마찬가지로 이 방법을 본떠서 썼기 때문에 나라의 權柄을 오랫동안 전단할 수 있었으니, 군주는 이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專’으로 되어 있다.
역주2 霍光 : ?~기원전 68. 西漢 武帝‧昭帝‧宣帝 연간의 대신으로, 麒麟閣 11공신 중 한 사람이다. 자는 子孟이다. 河東 平陽 사람이다. 驃騎將軍 霍去病의 이복동생이며, 宣帝의 繼后 霍成君의 부친이다. 武帝 때 奉車都尉가 되었다. 무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後元 2년(기원전 87)에 大司馬大將軍이 되고 博陸侯에 봉해졌다. 金日磾(김일제), 桑弘羊, 上官桀 등과 함께 무제의 遺詔를 받들어 昭帝를 보필하였다. 소제 元鳳 1년(기원전 80)에 燕王 劉旦의 모반을 기화로 정적인 상관걸, 상홍양 등을 숙청하고 대권을 장악했다. 소제의 사후에 昌邑王 劉賀를 옹립했으나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다시 宣帝를 옹립했다. 시호는 宣成이다.
역주3 楊敞 : ?~기원전 74. 華陰 사람으로 司馬遷의 사위이다. 사람이 매우 신중하여 곽광의 추천을 받아 昭帝 元鳳 6년(기원전 75)에 승상에 임명되었으며 安平侯에 봉해졌다. 곽광이 燕飮에만 빠져 사는 昌邑王 劉賀(기원전 92~기원전 59, 재위 27일)를 폐위할 계획을 처음 말했을 때 망설이며 가부를 표하지 않았으나 처의 말을 듣고 결심하여 이튿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황태후에게 창읍왕을 폐위하고 宣帝를 옹립할 것을 주청하였다. 시호는 敬이다.
역주4 李林甫 : ?~752. 당나라 왕실의 종실이자 재상이다. 자세한 것은 20-1-나 ‘李林甫’ 주석 참조.
역주5 陳希烈 : ?~758. 唐 玄宗 때의 재상으로, 지금의 하남성 商丘市인 宋州 사람이다. 玄學에 정통하였으며 글을 잘 지어 玄宗 開元 연간에 궁궐에서 《老子》와 《周易》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秘書少監, 工部侍郞, 集賢院學士, 門下侍郞을 역임하였으며 臨潁侯에 봉해졌다. 李林甫의 추천으로 재상이 되어, 현종 天寶 5년(746)에 同中書門下平章事, 천보 6년에 左相 兼兵部尙書에 임명되었다. 潁川郡公에 봉해지고 또 許國公에 進封되었다. 재상으로 있는 동안 李林甫‧楊國忠의 뜻에 따를 뿐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安史의 난에 포로가 되자 반란군에게 투항하여 재상에 임명되었다가 長安이 수복된 뒤 賜死되었다. 열전이 《新唐書》 권223上 〈姦臣列傳〉에 보인다.
역주6 : 저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조선의 國諱이기 때문에 바로잡았다. 대전본‧사고본‧509본에는 ‘旦’으로 되어 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安’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사고본에는 ‘如’로 되어 있다.
역주9 蔡京 : 1047~1126. 북송 權相 중의 하나이다. 자는 元長이며 지금의 복건성 莆田市 仙遊縣에 있던 興化軍 仙遊縣 사람이다. 中書舍人, 龍圖閣待制 등을 역임하였다. 徽宗 崇寧 원년(1102)에 右僕射 兼門下侍郞이 되었으며, 앞뒤로 네 차례 재상에 임명되어 모두 17년 동안 執政하였다. 宋 徽宗 崇寧 4년(1105) 3월에 趙挺之(1040~1107)를 적극 추천하여 尙書右僕射 兼中書侍郞에 임명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채경이 홀로 재상의 자리에 있어서 휘종이 右輔를 두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欽宗(1100~1156, 재위 1125~1127)이 즉위한 뒤 嶺南으로 좌천되어 가는 도중 지금의 호남성 長沙市인 潭州에서 죽었다. 열전이 《宋史》 권472 〈姦臣列傳2〉에 보인다.
역주10 秦檜 : 1090~1155. 남송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主和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는 會之이며 지금의 강소성 南京市인 江寧 사람이다. 欽宗 때 左司諫, 御史中丞을 역임하였다. 靖康 2년(1127)에 포로로 잡혀가는 徽宗과 欽宗을 수종하여 金나라에 가서 금나라의 종실이자 대장인 撻懶에게 신임을 얻었다. 高宗 建炎 4년(1130)에 臨安으로 도망쳐 와서 금나라에 땅을 떼어주고 稱臣하며 조공을 바칠 것을 내용으로 하는 主和政策을 주장하였다. 고종 紹興 원년(1131)에 參知政事에 임명되고 이어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소흥 8년(1138)에 다시 재상이 되어 앞뒤로 19년 동안 執政하면서 張浚(1097~1164)과 趙鼎(1085~1147)을 유배 보내고 대장군 岳飛(1103~1142)를 무함하여 ‘莫須有’라는 죄명으로 살해하였는데, 악비의 죽음은 그의 당여인 監察御史 万俟卨(묵기설, 1083~1157)을 이용한 것이다. 秦國公과 魏國公에 봉해졌다. 사후에 申王에 추증되었다. 처음 시호는 忠獻이었으나, 開禧 2년(1206)에 宋 寧宗이 그 王爵을 追奪하고 謬醜로 시호를 고쳤다.
역주11 韓侂冑 : 1152~1207. 남송의 權臣이자 외척이다. 자는 節夫이며 河南 安陽 사람이다. 북송의 名臣 韓琦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宋 高宗의 吳皇后의 여동생이고, 조카손녀는 南宋 寧宗의 恭淑皇后이다. 紹熙 5년(1194)에 송나라 종실 趙汝愚(1140~1196) 등과 함께 寧宗을 옹립하여 그 공으로 뒤에 재상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었던 14년 동안 岳飛를 鄂王으로 追封하고 秦檜의 관작을 추탈하였으며 북벌을 주장하였다. 재상이었던 趙汝愚 등을 몰아내기 위해 慶元黨禁(1195~1200)을 일으켰는데, 먼저 京鏜(1138~ 1200)‧何澹(1146~1219)‧劉德秀(1135~1207)‧胡紘(약 1137~1204) 등을 言官 등의 요직에 앉힌 뒤 조여우를 永州(현재 호남성 소재)로 좌천시켜 그곳에서 죽게 하고, 조여우의 추천을 받아 영종의 스승이 되었던 朱熹(1130~1200) 등 59명을 僞學逆黨이라 하여 내쫓았다. 뒤에 金나라의 사주를 받은 楊皇后와 史彌遠(1164~1233)에 의해 살해된 뒤 首級은 금나라에 보내졌다.
역주12 : 사고본에는 ‘專’으로 되어 있다.
역주13 : 사고본에는 ‘政’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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