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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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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7-10-나(按)
按 肅宗之平長安也 上皇 自蜀還都曰 朕 爲五十年太平天子로되 未爲貴러니 今爲天子父하니 乃貴耳라하시니
7-10-나(按)
[臣按] 肅宗이 長安을 평정했을 때 상황이 蜀에서 도성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짐이 5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린 천자였지만 그때까지는 귀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천자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이제야 귀하게 되었다.” 하셨는데,
所謂宗廟再安‧二聖重者也 豈不盛哉리오
이것이 元結의 〈大唐中興頌〉에서 이른바 “宗廟는 다시 편안해지고 두 聖皇은 다시 재회의 기쁨을 누리셨다.”라는 것입니다.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徒以內侍握兵하여 妄爲讒間而迫遷之謀 出焉하니 其所以然者 肅宗 柔懦無斷이라
다만 내시가 병권을 장악하여 망령되이 참언으로 이간하여 협박하고 유폐하는 모략이 나왔으니, 아마도 그렇게 된 까닭은 숙종이 우유부단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故張后‧輔國 得以劫之하니 以天子之貴而不能其父하여 使抑鬱無聊하여 遂以致疾하니 肅宗之罪 於是乎通天矣니이다
그러므로 張皇后와 이보국이 숙종을 겁박할 수 있었으니, 존귀한 천자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하여 답답하고 근심하여 마침내 병이 들게 하였으니, 숙종의 죄가 이 점에 있어 하늘을 찌를 정도로 큽니다.
原注
方其少在東宮 本以孝名하니 儻能勵純乾之德하고 絶柔道之牽하여
숙종이 젊어서 동궁에 있었을 때에는 본래 효성스럽다는 명성이 있었으니, 만일 순수한 乾德을 면려하고 陰柔의 道에 이끌리는 것을 끊어버려서,
當輔國進言之時 奮發威斷하여 明諭諸將하여 斥其離間父子之罪하여 執而戮之하고 命駕西宮하여 俯伏謝過하면
이보국이 진언할 때 발분하여 결단을 내려 장군들을 분명하게 깨우쳐 그가 부자간을 이간한 죄를 배척하여 잡아서 주륙하고 서궁으로 거둥하여 엎드려 잘못을 사죄할 수 있었다면,
二帝 懽然하여 和氣充塞하리니 彼爪牙之士 不過爲輔國所迫耳 人誰無父子之情이리오
두 황제가 기뻐하여 화목한 기운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저 무신들은 이보국에게 핍박받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누군들 부자의 정이 없겠습니까.
若告戒明切이면 必將幡然悔悟 孰肯舍仁孝之天子而從悖逆之內侍哉리오
만약 명백하고 절실하게 일러주어 깨우쳤다면 반드시 단번에 뉘우쳤을 것이니, 누구인들 인자하고 효성스런 천자를 버리고 패역한 내시를 따르고자 했겠습니까.
帝乃泯然無所開曉하고 但有垂涕而已 將士 見帝不言하고 未必不謂實已心許而不欲形之於口 輔國之計 所以得行也니이다
황제가 마침내 전혀 깨우쳐 인도하지는 않고 단지 눈물만 흘렸기 때문에 將士들이 황제가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반드시 실은 이미 마음속으로 허락했지만 입으로 말하지 않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보국의 계책이 행해질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原注
大抵姦賊之臣 離人骨肉 率以利害 惑其主하여 使疑情으로 動於中하여 徊徨顧慮하여 欲爲自保之計然後 墮其機穽하나니
대저 간사하고 불충한 신하가 골육지친을 이간할 때에는 대체로 이익과 손해로 그 군주를 현혹시켜 의심하는 마음이 속에서 동하여 불안해하며 고민하여 스스로를 보전할 방책을 행하고자 하게 된 뒤에야 그 함정에 빠뜨리는 법입니다.
肅宗之不能力卻脅遷之請者 亦以輔國所陳 有以動其疑情故也
숙종이 겁박하여 옮기라는 청을 힘써 물리치지 못했던 것은 또한 이보국이 진언한 말이 그의 의심하는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疑情 萌則懼心하고 保身之念 勝則愛親之志하나니 肅宗之罪 正坐於此 吁可戒哉니이다
의심하는 마음이 싹트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몸을 보전하려는 생각이 우세해지면 부모를 사랑하는 의지가 약해지는 법입니다. 숙종의 죄가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아!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以上 論天理人倫之正二 [帝王事親之孝]
이상은 천리와 인륜에 임하는 올바른 처신을 논한 두 번째이다. [역대 聖王이 부모를 섬기는 효]
역주
역주1 元結之頌 : 元結(723~772)의 〈大唐中興頌〉을 말한다. 원결은 자가 次山, 호는 漫叟‧聱叟로, 河南 魯山 사람이다. 天寶 12년(753)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종족을 이끌고 猗玗洞(湖北 大冶境內)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猗玗子로 불렀다. 乾元 2년(759) 山南東道節度使 史翽(홰)의 참모가 되어 의병을 모아 史思明의 반군을 공격하여 15개 城을 보전하였다. 代宗 때 道州刺史 調容州를 맡았고 封容州都督을 더하여 本管經略守捉使에 充任되었다. 大曆 7년(772) 입조하여 같은 해 장안에서 졸하였다. 문집으로는 《元次山集》이 있다.
역주2 : 사고본에는 ‘歡’으로 되어 있다.
역주3 : 대전본‧사고본에는 ‘芘’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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