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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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敏于辯論하여 多大言하고 自標置하더니 어늘 往見하여 相得甚歡이라
介之하여 謁王守澄注+中人用事者.한대 守澄 善遇之하여 幷薦訓‧注于帝注+也.하다
持詭하여可聽하고 善鉤揣人主意 見其言縱橫하시고 謂果可任이라하사 遂不疑而待遇 莫與比러니
하여 居中倚重하니 實行宰相事러라 本挾奇進하여 及大權在己 銳意去惡이라
故與帝言天下 無不如所欲하고 挾注相朋比하여恩復讎하더니
不踰月 同平章事하여 每進見 宰相 避位하고 天子 傾意하시니 宦官‧衛兵 皆慴憚迎拜하고
天下險怪士 徼取富貴 皆憑以爲資러라 時時進賢才偉望하여 以悅士心하니 人皆惑之하더라
鄭注 江湖間하여 多藝하고 詭譎陰狡하여 億探人廋隱하더니 하여늘
한대 하여 賜賚至渥이러니 是夜 彗出東方하니 三尺이요 芒耀怒急하더라
하다 天資貪沓이라 旣藉權寵하여는 鬻官射利하여
貲積鉅萬호대 不知止하니 險人躁夫 有所干請 日走其門하더라
李訓 旣附注進이라 於是 兩人 權震天下矣러라하다
이라 日日議論帝前하여 相倡和謀鉏翦中官하여 謂功在晷刻이라한대 惑之하시니
乘是進退士大夫하며 撓骫朝法하니 策其必亂이러니 未幾 라하여늘
李訓 浮躁寡謀하고 鄭注 斬斬小人으로 邀幸天功하니 寧不殆哉
文宗 與宰相으로 稱訓호대하여 服人倫之敎 不如公等이어니와 然天下奇才 公等 弗及也리라
曰 訓 曾不得齒徒隷 尙才之云이니잇가 世以德裕言으로 爲然하더라
이라하니 若訓等 持腐株하여 支大厦之顚하니
天下 爲寒心豎毛어늘 文宗 偃然倚之成功하사 卒爲所乘하니 天果厭唐德哉인저


20-14-가
이훈李訓은 변론에 뛰어나 거창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화자찬하는 자였다. 정주鄭注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의 막부에서 직임을 맡고 있었는데, 이훈이 찾아가 만나보고서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정주가 소개하여 왕수징王守澄注+왕수징王守澄은 환관으로 권력을 전횡한 자이다. 만나자, 왕수징은 이훈을 매우 잘 대우하여 이훈과 정주를 문종文宗에게注+’는 당 문종唐 文宗이다. 모두 천거하였다.
이훈李訓이 궤변의 재주를 가져서 격앙된 어조로 하는 말은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었으며 군주의 의중을 잘 헤아렸다. 문종은 그가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과연 등용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의심하지 않고 아무도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대우하였다.
그리고 이훈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승진시켜 궐내에서 기대와 중시를 하자, 이훈이 실제로 재상의 일을 행하였다. 이훈은 본래 특출한 생각을 가지고 궁궐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권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악을 제거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 때문에 문종과 천하의 일을 논할 때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정주鄭注에 의지하여 한패가 되어서 사사로운 은혜에 보답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갚는 데에 힘썼다.
한 달이 못 되어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어 매번 나아가 문종을 알현할 때마다 다른 재상들은 자리를 피하고 천자는 이훈에게 마음을 다 기울이자, 환관과 위병衛兵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이훈을 맞이하여 절하였고,
천하의 온갖 괴상한 자들이 부귀를 거머쥘 때 모두 이훈에 기대어 매개로 삼았다. 이훈이 때때로 명망이 높은 어진 인재들을 천거하여 사대부의 마음을 기쁘게 하자, 사람들이 모두 이에 현혹되었다.
정주鄭注방기方技로 강호에서 행세하였다. 재주가 많았으며 속임수에 능한 데다 음험하고 교활하여 사람들의 속마음을 잘 알아맞혔다. 이소李愬가 정주를 왕수징王守澄에게 추천하였는데,
왕수징이 정주를 문종文宗에게 천거하자 문종은 정주를 들어오도록 불러서 욕당문浴堂門에서 응대하고 상을 매우 후하게 하사하였다. 이날 밤 혜성彗星이 동방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3이었으며 빛이 번쩍거리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마 뒤에 태복경 겸어사대부太僕卿 兼御史大夫로 승진하였다. 정주는 천성적으로 탐욕스러웠다. 이미 권세와 총애를 받게 되자 관직을 팔아서 이익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수만금 쌓았는데도 그칠 줄을 모르니, 간사하고 출세에 조급한 자들이 청탁할 일이 있으면 날마다 그의 집 문으로 달려갔다.
이훈李訓정주鄭注에게 의지하여 벼슬길에 나오자 이에 두 사람의 권세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얼마 뒤에 정주가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에 발탁되었다.
이때 이훈은 이미 궁중에서 직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매일같이 문종文宗 앞에서 의론하여 서로 주거니 받거니 환관들을 제거할 모의를 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짧은 시간 내에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하자, 문종이 이에 현혹되었다.
두 사람이 이를 틈타 사대부들을 등용하고 물러나게 하며 조정의 법도를 왜곡시켜 어지럽히자, 사람들은 그들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얼마 뒤에 이훈 등이 거짓으로 감로甘露금오 좌장원金吾 左仗院의 나무에 내렸다고 하자,
문종은 중위 구사량中尉 仇士良에게 명하여 가서 보게 하고 이를 기화로 구사량 등을 주살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일이 실패하여 이훈 등은 모두 멸족되었다.
사신史臣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훈李訓은 조급하고 지모가 부족하였으며 정주鄭注는 작은 재능이 다 보이는 소인이었다. 그런데도 제왕의 공업을 바랐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문종文宗이 재상 정담鄭覃과 함께 이훈을 평가하기를 ‘이훈이 오상五常의 본성을 타고나서 인륜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공들만 못하지만, 천하의 기이한 재주는 공들이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자,
이덕유李德裕가 대답하기를 ‘이훈은 일찍이 복역하는 죄인들 축에도 끼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무슨 재주를 말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덕유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에 이르기를 ‘나라가 장차 망할 때에는 하늘이 난인亂人을 내려보낸다.’라고 하였으니, 이훈과 같은 자들은 썩은 나무를 가지고서 기울어가는 큰 건물을 지탱하는 것과 같았다.
천하 사람들은 두려워서 머리털이 곤두섰는데도 문종은 태평하게 이들에게 기대어 공을 이루고자 하여 끝내 환관들에게 이용당하였으니, 하늘은 정말로 당나라의 존립을 싫어했다 할 것이다.”


역주
역주1 20-14-가 : 《新唐書》 권179 〈李訓列傳〉과 〈鄭注列傳〉에 보인다.
역주2 李訓 : ?~835. 唐 肅宗 때의 재상이다. 초명은 仲言이며 자는 子訓이다. 뒤에 자를 子垂로 고쳤다. 肅宗 때의 재상인 李揆의 族孫이자 敬宗 때의 재상인 李逢吉의 조카이다. 당시 留守였던 이봉길에게 鄭注를 잘 안다고 하자, 이봉길은 다시 재상이 되고 싶은 생각에 이훈에게 金帛珍寳 수백만 뇌물을 들고 長安에 가서 정주를 만나보게 하였다. 정주를 통해 환관 王守澄을 알게 되고, 다시 왕수징의 추천을 받아 文宗에게 《周易》을 강론하였다. 四門助敎, 國子監博士, 侍講學士, 兵部郞中 등을 역임하였다. 문종 太和 9년(835)에 禮部侍郞‧同平章事에 임명되었다. 仇士良 등 환관을 제거하기 위해 甘露之變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여 終南山으로 달아났다가 피살되었다. ‘李揆’는 20-10-가 ‘李揆’ 주석, ‘李逢吉’은 20-13-가 ‘李逢吉’ 주석, ‘甘露之變’은 아래 ‘命中……誅之’ 주석 참조.
역주3 鄭注 : ?~835. 당나라 때의 대신이다. 본래 성은 魚씨이기 때문에 魚鄭 또는 魚注라고도 한다. 지금의 산서성 翼城縣인 絳州 翼城 사람이다. 음험하고 교활하며 의술로 행세하다가 憲宗 元和 13년(818)에 襄陽節度使 李愬에게 의탁한 것으로 인해 이소를 통해 王守澄을 알게 되었다. 文宗 太和 7년(833) 12월에 왕수징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風疾을 앓아 말을 하지 못하던 문종을 치료하여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태화 9년(835) 4월에 太僕卿 兼御史大夫으로 승진하고 동년 8월 4일 丁丑日에 工部尙書‧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이훈의 배척을 받아 동년 9월 25일 丁卯日에 鳳翔節度使로 나갔다. 뒤에 문종을 도와 甘露之變을 계획하고 鳳翔에서 군사를 끌고 경사로 들어가다가 이훈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 군대를 돌렸으나 監軍使 張仲淸 등에게 피살되었다. 甘露之變은 아래 ‘命中……誅之’ 주석 참조.
역주4 佐昭義府 : 文宗이 즉위한 뒤 鄭注는 당시 昭義節度副使로 있었다. 《新唐書 卷179 李訓列傳》
역주5 文宗 : 809~840(재위 826~840). 武則天을 포함하면 당나라 제16대 임금으로 휘는 昂이다. 初名은 涵이며 시호는 元聖昭獻孝皇帝이다. 제14대 임금 穆宗 李恒의 둘째아들이자 제15대 임금 敬宗의 아우이다. 환관 王守澄 등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궁녀 3천여 명을 내보내고 五坊의 사냥용 매와 사냥개를 금지시키며 불필요한 관원 2백여 명을 줄이는 등 정사에 힘썼으나, 조정 관원들과 환관의 다툼이 끊이지 않자 환관을 제거하기 위해 甘露之變을 계획했다가 실패로 돌아가 연금되었다. 이후 모든 권한을 환관에게 넘긴 뒤 울분을 삭이며 술로 달래다가 病死하였다. 甘露之變은 아래 ‘命中……誅之’ 주석 참조.
역주6 : 사고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다.
역주7 : 대전본에는 ‘卬(앙)’으로 되어 있다.
역주8 進翰林學士 : 문종 太和 9년(835) 7월 21일 甲子日의 일이다.
역주9 : 대전본에는 ‘可’로 되어 있다.
역주10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11 : 사고본에는 ‘他’로 되어 있다.
역주12 方技 : 의약이나 養生과 같은 기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의술을 이른다. 위 ‘鄭注’ 주석 참조.
역주13 : 사고본에는 ‘游’로 되어 있다.
역주14 李愬薦之王守澄 : 穆宗 長慶 3년(823) 4월의 일이다. 李愬가 그 당시 監軍이었던 왕수징에게 鄭注를 만나보라고 추천하자 왕수징은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였으나 정주를 한번 만나본 뒤에는 늦게 만난 것을 탄식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역주15 守澄薦注 : 文宗 太和 7년(833) 12월 18일 庚子日의 일이다. 이때 鄭注는 昭義行軍司馬였다. 위의 ‘鄭注’ 주석 참조.
역주16 召入……怒急 : 문종 태화 8년(834) 9월 12일 庚申日의 일이다. 당시 王守澄은 右軍中尉였으며, 鄭注는 昭儀節度副使였다. 문종은 정주를 접견하고 錦彩銀器를 하사하였다. 《舊唐書 卷17下 文宗本紀下 太和 8年》 《資治通鑑 卷245 唐紀61 文宗 太和 8年》
역주17 浴堂門 : 大明宮 편전 가운데 하나인 浴堂의 문으로, 욕당은 翰林院 북쪽, 紫宸殿 동쪽에 있었다. 德宗 이후의 군주들은 늘 이곳에 거하며 文人學士들을 召見하였다.
역주18 俄遷……大夫 : 문종 태화 9년(835) 4월 18일 癸巳日의 일이다.
역주19 擢翰林侍講學士 : 文宗 太和 9년(835) 8월 4일 丁丑日의 일이다.
역주20 時訓已在禁中 : 李訓은 문종 태화 9년(835) 7월 21일 甲子日에 兵部郞中‧知制誥에 임명되었는데, 侍講學士의 직임은 그대로 띤 채로였다.
역주21 : 대전본에는 ‘可’로 되어 있다.
역주22 訓等……仗樹 : 문종 태화 9년(835) 11월 21일 壬戌日의 일이다. ‘金吾’는 ‘金吾衛’로, 황제의 호위와 호종 등의 일을 담당하는 禁衛軍이다.
역주23 命中……誅之 : 甘露之變을 이른다. 18-14-나(按) ‘仇士……儒生’ 주 참조. ‘中尉’는 당나라 때 神策軍에 두었던 특수한 軍職으로, 환관으로 충임하였다. ‘仇士良’은 20-15-가 ‘仇士良’ 주석 참조.
역주24 史臣贊曰 : 이하의 내용이 《新唐書》 권179 〈李訓列傳〉과 〈鄭注列傳〉의 贊에 보인다.
역주25 鄭覃 : ?~842. 당나라 때의 재상으로 鄭州 滎澤 사람이다. 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文宗 때 翰林侍講學士가 되고, 이후 同中書門下平章事, 門下侍郞, 弘文館大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병으로 사직하였다.
역주26 五常性 : 仁, 義, 禮, 智, 信을 이른다.
역주27 李德裕 : 787~850. 唐 武宗 때의 재상이다. 자는 文饒이며 지금의 하북성 贊皇縣인 趙郡 贊皇 사람이다. 中書侍郞 李吉甫(758~814)의 차남이자 牛李黨爭 때 李黨의 영수이다.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校書郞, 監察御史, 翰林學士, 中書舍人, 浙西觀察使, 兵部侍郞, 中書侍郞, 淮南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憲宗‧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 때 벼슬하였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밖으로는 回紇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쓸데없는 관원을 줄이고 환관을 제어하였다. 宣宗이 즉위한 뒤 牛僧孺가 이끄는 牛黨의 모함에 걸려 崖州司戶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病死하였다. 사후에 尙書左僕射, 太子少保, 衛國公에 추증되었다.
역주28 國將……亂人 : 晉 幽公(?~기원전 416) 때의 太史 屠餘의 말이다. 도여가 진나라의 어지러움과 임금의 교만을 보고 西周 威公을 만나 천하의 제후국 중에서 진나라가 가장 먼저 멸망할 것이라고 예견하며 그 이유를 말하였는데, 이 가운데 “나라가 흥할 때에는 하늘이 賢人과 極諫하는 인물을 내려 보내며, 나라가 망할 때에는 하늘이 亂人과 아첨을 잘하는 자를 내려보낸다.[國之興也 天遺之賢人與之極諫之士 國之亡也 天與之亂人與善諛者]”라고 말한 내용이 보인다. 일설에는 晉 平公(?~기원전 532) 때의 태사라고도 한다. 《呂氏春秋 先識》 《說苑 權謀》
역주29 閹謁 : 환관이 담당했던 관직명으로, 수나라‧당나라 때의 內謁者이다. 內侍省에 소속되어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여기에서는 환관을 가리킨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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