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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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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6-10-나(按)
按 德裕 在文宗朝하여 與李宗閔으로 迭爲宰相而德裕 卒爲宗閔所傾하니 以文宗 不能辨邪正也
及相武宗하여 深陳二者之辨而武宗 能聽之 故德裕 得效其忠謀하여 하니 由武宗 能辨其邪正故也
德裕松栢‧藤蘿之辨 此善喩也 蓋正人 以直道 自將하여 雖於人主라도 猶無所容悅이온 況肯有依憑以進乎
邪人 以枉道 求合이라 故權臣 用事則附權臣하고 近習 得志則附近習하고 妃嬪 有寵則附妃嬪하여
無所不至하나니 德裕此言 足以判正邪之情狀矣로다
原注
之計 甚密而天下百姓之利害 我不顧焉 小人也
志在於爲道하여 不求名而名自歸之 君子也
志在於爲利하여 掠虛美‧邀浮譽 小人也
其言之剛正不撓하여 無所阿徇 君子也
辭氣柔佞하여 切切然伺候人主之意於眉目顔色之間 小人也
樂道人之善하고 惡稱人之惡 君子也
人之有善 必攻其所未至而掩之하고 人之有過則欣喜自得 如獲至寶하여 旁引曲借하여 必欲開陳於人主之前 小人也
臣嘗以此而求之호니 君子‧小人之分 庶幾其可以槪見矣라하니
原注
謂 人主 欲知群臣之邪正인대 惟以德裕‧浚之言으로 參而考之則亦何難辨之有리오
然德裕所謂邪人 競爲朋黨 獨不思君子 其無同類矣乎 으로 議我矣
必如裴度曰 이라사 則爲得之 德裕之所以不及度也니이다
以上 論帝王知人之事하니라


原注
16-10-나()
[신안臣按] 이덕유가 문종조文宗朝이종민李宗閔과 번갈아 재상이 되었는데 이덕유가 마침내 이종민에 의해 기울어졌으니 문종이 간사함과 올바름을 분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종武宗 때 재상이 되어서는 이 두 가지의 분변을 심도 있게 아뢰어 무종이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덕유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계책을 아뢸 수 있어서 회창會昌 연간(841~846)의 업적이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가까웠으니, 무종이 그 간사함과 올바름을 분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덕유가 군자와 소인을 송백松栢등라藤蘿에 비유하여 분변했던 것이 좋은 비유입니다. 올바른 사람은 올곧은 방법으로 스스로 이끌어 비록 임금에게라도 환심을 사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것에 기대어 조정에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간사한 사람은 간사한 방법으로 영합하기를 추구하므로 권신權臣이 권세를 휘두르면 권신에게 붙고 근신近臣이 득세하면 근신에게 붙으며 비빈妃嬪이 총애를 받으면 비빈에게 붙어,
비루하고 천박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덕유의 이 말에서 올바름과 간악함의 정상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原注
근세의 명신 장준張浚이 또 이를 미루어 확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제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아 개연慨然하게 천하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사람은 군자이며,
제 자신을 도모하는 계책은 매우 치밀하지만 천하 백성의 이해를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를 행하는 데에 뜻이 있어 명성을 추구하지 않지만 명성이 저절로 따르는 사람은 군자이며,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뜻이 있어 거짓 명성을 훔치고 허명虛名을 꾀하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그 말이 강정剛正하여 흔들리지 않아 아부하고 굴종하는 바가 없는 사람은 군자이며,
말이 부드럽고 알랑거려 임금의 뜻을 표정과 안색에서 살살 엿보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남의 선을 말하기 좋아하고 남의 악을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군자이며,
남이 선을 행하면 기어이 드러나기 전에 공격하여 덮어버리고 남이 잘못을 저지르면 마치 큰 보배라도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득의양양하여 두루 끌어들이고 샅샅이 짜 맞추어 기어이 임금 앞에서 떠벌리고자 하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조정에 출사出仕하기를 어려워하고 조정에서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사람은 군자이며, 작록爵祿을 탐내고 염치를 모르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신이 일찍이 이러한 기준으로 탐구해보니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거의 대체로 알 수 있었습니다.”
原注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임금이 신하들의 간사함과 올바름을 알고자 할 경우 오로지 이덕유와 장준의 말을 참조하여 살펴보면 또한 변별하기 어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덕유가 말한 “간사한 사람은 경쟁적으로 붕당을 만든다.”라고 한 것은, 유독 군자에게 동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붕당을 짓는다고 소인을 비판하면 소인 또한 장차 붕당을 짓는다고 나를 비판할 것이니,
반드시 배도가 “군자의 무리는 덕을 함께하고 소인의 무리는 악을 함께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덕유가 배도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이상은 역대 성왕聖王이 인재를 알아본 사례들을 논하였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2 會昌……元和 : 會昌은 武宗 때의 연호로, 회창 5년(845)에 廢佛 정책을 추진하여 4천 6백여 곳에 달하는 사찰을 헐고 僧尼 26만여 명을 환속시켰다. 元和는 憲宗 때의 연호로, 원화 12년(817)에 淮西의 난을 평정하였다. 원화 14년(819)에는 헌종이 法門寺의 탑에 보관된 佛骨을 맞이하게 하여 韓愈가 〈佛骨表〉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역주3 : 사고본에는 ‘他’로 되어 있다.
역주4 鄙猥 : 사고본에는 ‘猥鄙’로 되어 있다.
역주5 張浚 : 1097~1164. 자는 德遠으로 漢州 綿竹 사람이다. 張栻의 부친이다. 徽宗 때 進士가 되었으며 高宗 때에는 樞密院 編修官‧殿中侍御史 등을 지냈다. 建炎 3년(1129)에 苗傅와 劉正彦이 반란을 일으켜 고종을 퇴위시켰을 때 勤王兵을 일으켜 고종을 복위시킨 공으로 知樞密院事가 되었다. 紹興 5년(1135)에 尙書右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해에 金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徽宗이 죽자 황제에게 진언할 때 늘 復讎雪恥를 말하였다. 그러나 主和派인 秦檜가 집권하자 약 20년 동안 외직으로 떠돌았다. 孝宗이 즉위하자 魏國公으로 봉해졌으며 隆興 원년(1163)에 북벌을 했다가 실패하였다. 얼마 후 右僕射가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진회의 잔당인 左僕射 湯思退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었다. 시호는 忠獻이다.
역주6 不私……見矣 : 《張魏公集》 〈辨君子小人疏〉에 보인다. 같은 내용이 李心傳의 《建炎以來繫年要錄》 卷85 등에도 보인다. 이 글은 紹興 5년(1135) 2월에 장준이 高宗에게 올린 글이다.
역주7 : 대전본‧사고본에는 ‘求’로 되어 있다.
역주8 難進……人也 :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역주9 我以……朋黨 : 대전본에는 ‘我以朋黨’으로, 사고본에는 ‘或以朋黨’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君子之徒……同惡 : 16-9-가 참조.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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