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신안臣按] 이 글 또한 앞 4장의 뜻과 같습니다. 문왕文王이 선정善政을 펴고 인仁을 베풀 때 반드시 환鰥․과寡․고孤․독獨을 우선시하였는데, 맹자孟子는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천하의 곤궁한 백성으로서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문왕이 우선시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을 학대하지 않고 곤궁한 자들을 방치하지 않은 것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때부터 이미 그렇게 했던 것이니 문왕이 기주岐周를 다스릴 때의 마음은 바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의 마음이었습니다.
제齊 선왕宣王이 맹자의 말을 좋게 여길 줄 알았으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를 행할 수 없는 이유는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공류公劉와 태왕太王의 사례를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여
“군주가 어찌 비축의 넉넉함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직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서 백성들 역시 마른 양식의 비축이 있을 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군주가 어찌 배필의 받듦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오직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서 백성들 역시 배필의 편안함이 있을 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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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공류公劉는 재물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거처할 때에는 노적가리와 창고의 곡식이 있고 길을 떠날 때에는 자루에 싼 양식이 있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 역시 남아 있는 자들과 떠나는 자들이 모두 스스로 먹을 것이 있어 굶주리는 근심이 없었으니 공류가 백성들과 그 욕구를 함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왕太王은 여색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강녀姜女와 함께 와서 집터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궁중에는 혼인 적령기에 혼인을 하지 못한 여자가 없었고 민간에는 혼인 적령기에 혼인을 하지 못한 남자가 없었으니 태왕이 백성들과 그 욕구를 함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류와 태왕이 백성들과 욕구를 함께했던 것이 이와 같았으니 왕업이 어떻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후세의 군주는 사해四海의 부富를 사유화하여 거교鉅橋와 낙구洛口 창고에 비축한 곡식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백성들은 하루 버틸 양식조차 없고, 육궁六宮의 봉양을 지나치게 하여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미녀 같은 비빈들이 객사客舍와 금원禁苑에 가득한데도 백성들은 홀아비와 고아의 탄식 소리가 많습니다. 후세의 군주들이 욕망을 혼자서만 채워 백성을 병들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화란과 병란이 어떻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어질고 훌륭한 군주만이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백성들은 명아주 잎과 콩잎도 배불리 먹지 못할까를 근심하며, 비빈의 봉양을 마주하고서도 백성들은 아내가 없을까를 염려합니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이러한 정사를 행하신다면 아마도 치세에 가까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