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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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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卽位 淮南王長注+高帝少子, 孝文之弟. 自以爲最親注+時, 高帝子唯二人在.이라하여 驕蹇數不奉法이어늘 寬赦之러시다
8-9-가
漢 孝文帝(기원전 202~기원전 157)가 갓 즉위했을 때 淮南王 劉長(기원전 198~기원전 174)은注+淮南王 劉長은 高祖의 막내이자 文帝의 아우이다. 자신이 文帝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생각하여注+당시에 고조의 아들로는 文帝 劉恒과 淮南王 劉長 두 사람만이 생존해 있었다. 교만하고 불순하며 자주 법을 무시하였는데, 문제는 너그럽게 이를 용서하였다.
三年 入朝甚橫하여 從上入苑獵할새 與上同輦하여 常謂上이라하고 歸國益恣하여 하더니
문제 3년(기원전 177)에 유장이 입조했는데 너무 제멋대로였다. 문제를 따라 園囿에 들어가 사냥할 때는 문제와 輦을 함께 타고서 줄곧 문제를 ‘큰 형님[大兄]’이라고 하였으며, 자신의 封國으로 돌아가서는 더욱 방자하여 漢나라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
六年 謀反事覺이어늘 迺使使召하여 至長安이러니
문제 6년(기원전 174)에 유장이 반역을 꾀하다 일이 발각되자, 문제는 사신을 보내 유장을 불렀다. 그리하여 유장이 長安에 이르렀는데,
丞相張蒼等 雜奏長所犯 不軌 臣請論如法하노이다
승상 張蒼 등이 분분히 上奏하기를, “유장이 저지른 죄는 不軌이니 棄市刑에 해당합니다. 신은 법대로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制曰 朕 不忍置法於王하노니 其與列侯‧吏하라
문제는 명하기를, “짐은 차마 회남왕에게 법을 적용하지 못하겠노라. 열후 및 二千石과 함께 논의하라.” 라고 하였다.
列侯‧吏二千石‧臣嬰等 皆曰 宜論如法이라하여늘 制曰 其赦長死罪하고 廢勿王하라
汝陰侯 夏侯嬰(?~기원전 172) 등 열후와 이천석의 議에 모두들 “법대로 논죄해야 한다.”라고 하자, 문제는 명하기를, “유장의 死罪를 용서하고 왕의 작위는 폐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有司 奏請處蜀嚴道卭郵어늘 於是 盡誅所與謀者하고 迺遣長載以하여 하니
담당 관리가 淮南王 劉長을 蜀郡 嚴道縣 卭郵에 付處하기를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역모에 가담했던 자들을 모두 주살하고, 마침내 유장을 輜車에 태워 보내면서 지나가는 현마다 차례대로 맞이하여 전송하도록 하였다.
爰盎 諫曰 上 素驕淮南王하사 不爲置嚴相傅하시니 以故至此 且淮南 爲人하니
爰盎이 간하였다. “폐하께서 평소 회남왕을 교만하도록 풀어놓아 회남왕을 위해 엄한 승상과 太傅를 두지 않으셨으니, 이 때문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회남왕은 성품이 강한 사람입니다.
暴摧折之 恐其逢霧露道死하여 陛下 有殺弟之名이니 奈何
지금 갑자기 그를 꺾으신다면, 신은 그가 이슬과 서리를 맞으면서 가는 도중에 죽어 폐하께서 아우를 죽였다는 오명을 가지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上曰 吾 特苦之耳 今復之호리라 謂侍者曰 吾 以驕不聞過 故至此라하고 迺不食而死하다
문제가 말하였다. “나는 단지 그를 단련시키고자 하는 것뿐이다. 이제 그를 돌아오게 할 것이다.” 유장이 侍者에게 말하였다. “내가 교만함으로 인해 내 잘못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유장은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縣傳者 不敢發이러니 至雍이어늘 雍令 發之하여 以死聞한대
지나가는 현에서 淮南王을 전송하는 자들이 감히 수레의 봉인을 뜯지 못했는데, 雍縣에 이르러 옹현의 현령이 이를 뜯어보고서 죽었다고 보고하였다.
悲哭하시고 謂爰盎曰 吾公言하여 卒亡淮南王호라
文帝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爰盎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아 결국 회남왕을 죽였구나.”
曰 陛下 遷淮南王 欲以苦其志하여 使改過어늘 有司 宿衛不謹하여 故病死니이다
원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회남왕을 유배한 것은 그의 뜻을 단련시켜 잘못을 고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당 관리가 宿衛를 신중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한 것입니다.”
於是 迺解曰 將柰何 曰 斬丞相‧御史하여 以謝天下 迺可니이다
이에 문제가 마음이 풀려서 말하였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법대로 논죄하라고 한 승상과 어사를 참수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고하신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卽令丞相‧御史 逮諸縣不發封餽侍者하여 皆棄市하고 以列侯 葬淮南王于雍하고 置守三十家하고 하다
문제가 곧바로 승상과 어사로 하여금 봉인을 뜯지 않은 채로 음식물을 준 여러 현의 현령들을 체포하여 모두 棄市刑에 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회남왕을 列侯의 禮로 雍縣에 장사하고, 守墓人煙戶로 30戶를 두었다. 뒤에 劉長의 아들 4명을 侯로 봉하였다.
어떤 백성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淮南王을 노래하였다.
一尺布 尙可縫이요
한 자의 베로도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고一尺布尙可縫
一斗粟 尙可舂이어늘
한 말의 곡식도 방아 찧어 먹을 수 있건만一斗粟尙可舂
兄弟二人 不相容이로다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구나兄弟二人不相容
聞之曰 昔 注+工皆堯同姓.하시고 하사대 天下 稱聖 不以私害公이니
文帝가 이 노래를 듣고 말하였다. “옛날에 堯임금과 舜임금이 골육을 추방하고注+鯀과 共工은 모두 堯임금과 同姓이었다. 周公이 管叔과 蔡叔을 죽이셨으나 천하 사람들이 聖人이라고 칭송한 것은, 私情으로 公道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天下 豈以爲我 貪淮南地邪아하시고 迺追諡爲厲王하고 置園如諸侯儀하다
천하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회남왕의 封地가 탐나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마침내 시호를 추증하여 ‘厲王’이라 하고, 제후의 儀節과 같이 園을 조성해주었다.
十六年 憐淮南王 廢法不軌하여 自使失國早夭라하여 하시다
문제 16년(기원전 164)에, 회남왕이 법을 무시하고 不軌를 도모하여 스스로 나라를 잃고 일찍 요절하게 된 것을 불쌍히 여겨, 문제는 회남왕의 세 아들을 왕으로 세워 회남왕의 옛 봉지에 봉하였다.
역주
역주1 8-9-가 : 《前漢書》 卷44 〈淮南衡山濟北王傳〉에 보인다. 漢 文帝(기원전 202~기원전 157)가 이복 아우인 淮南王 劉長(기원전 198~기원전 174)의 교만 방자함에 어떠한 훈계도 하지 않고 관대하게만 대함으로써 결국 유장의 역모를 초래하여 죽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유장은 漢 高祖 11년(기원전 196)에 회남왕 黥布가 반역으로 주살된 뒤 회남왕에 봉해졌다.
역주2 孝文 : 사고본에는 ‘文帝’로 되어 있다.
역주3 : 사고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역주4 不用漢法 : 淮南王 劉長이 출입할 때 “물렀거라![警蹕]”라고 외치고, 황제의 命을 지칭하는 ‘制’라는 말을 자신의 命에 쓰며, 스스로 법령을 만들어 천자에 비견한 등의 일을 이른다. ‘制’는 8-1-가 ‘古者君臣通稱’ 주석 참조. 《史記 卷118 淮南衡山列傳》 《前漢書 卷44 淮南衡山濟北王傳》
역주5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6 棄市 : 顔師古에 따르면 죄인을 저잣거리에서 죽이는 것이다. 沈家本에 따르면 漢나라 때의 기시는 저잣거리에서 죄인을 참수하는 것이다. 《漢書 卷5 景帝本紀 顔師古注》 《歷代刑法考 刑法分考4 棄市》
역주7 二千石 : 九卿을 이른다. 九卿의 녹봉은 모두 中二千石이었다.
역주8 : 문체의 한 종류이다. 劉勰(465?~520)에 따르면, ‘議’는 ‘마땅하다[宜]’라는 뜻으로, ‘두루 묻고 상의하여 일의 마땅함을 살피는 것[周爰諮謀以審事宜]’이다. 軒轅 때부터 議가 있었다고 하며, 漢나라에 이르러 처음으로 駁議 제도를 확립하였다. 나라에 大事가 있을 때 신하들이 모여 조정에서 이를 의론한 뒤에 公卿에게 議를 내리면 이에 대한 글을 지어 올린 것을 이른다. 대체로 경문을 근거로 하여 이치를 분석하고 時勢를 고찰하였으며, 간결함을 숭상하고 명확한 것을 좋게 여겼다. 《文體明辨序說 議》
역주9 : 사고본에는 ‘曰’로 되어 있다.
역주10 輜車 : 輜는 ‘검다’는 뜻으로, 수레의 몸체가 검은색이다. 顔師古에 따르면 ‘輜’는 또 ‘수레의 옷[衣車]’이라는 뜻으로, 방수포 용도의 苫布로 몸체를 덮어 비나 더위를 막을 수 있는 수레를 이른다. 수레의 몸체 앞쪽에는 창문이 있어 통풍할 수 있었고, 뒤쪽에는 문이 있었다. 漢나라에서는 죄를 저지른 王侯나 고위 관원을 압송할 때는 일반 죄인에 사용하는 檻車 대신 종종 비교적 편안한 輜車를 사용하였으며, 노복 등도 수종할 수 있도록 하였다. 《宋杰, 漢代的檻車押解制度, 首都師範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12, 第2期》
역주11 令縣次傳 : ‘傳’의 해석에 따라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傳’을 ‘전하다’의 뜻으로 보아 각 縣들로 하여금 차례로 劉長을 전송하도록 했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傳’을 역참 또는 ‘傳車’로 보아 차례로 역의 傳車를 제공하도록 했다는 해석이다. 《二十四史全譯》에서는 첫 번째로 해석하였고, 胡三省은 ‘傳’을 ‘直戀翻’으로 보아 두 번째 해석으로 보았다. 《二十四史全譯, 許嘉璐主編, 漢書, 上海:漢語大詞典出版社, 2004, 1001쪽》 《資治通鑑 卷14 漢紀6 太宗 中 6年 胡三省音註》
역주12 : 대전본에는 없다.
역주13 : 대전본에는 ‘令’으로 되어 있다. 이하도 같다.
역주14 車封 : 죄인을 호송하는 檻車의 몸체 뒤쪽에 있는 문을 봉인한 종이로, 이동 중에 죄인의 도주나 외부와의 연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宋杰, 漢代的檻車押解制度, 首都師範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12, 第2期》
역주15 : 사고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다.
역주16 : 대전본에는 ‘家’로, 사고본에는 ‘塜’으로 되어 있다.
역주17 封長子四人爲侯 : 漢 文帝 8년(기원전 172)의 일이다. 회남왕 劉長은 아들이 모두 4명이었는데, 당시에 모두 7,8세였다. 아들 劉安(기원전 179~기원전 122)을 阜陵侯에, 劉勃(?~기원전 152)을 安陽侯에, 劉賜(?~기원전 122)를 陽周侯에, 劉良(?~?)을 東城侯에 봉하였다. 《前漢書 卷44 淮南衡山濟北王傳》
역주18 民有……侯儀 : 漢 文帝 12년(기원전 168)의 일이다. 《前漢書 卷44 淮南衡山濟北王傳》
역주19 堯舜放逐骨肉 : 8-2-가 참조.
역주20 鯀及……同姓 : 司馬遷에 따르면, 黃帝부터 舜임금‧禹王에 이르기까지는 각각의 덕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라를 세운 뒤에 호칭을 달리했을 뿐 모두 同姓이다. 黃帝의 호칭은 有熊, 顓頊은 高陽, 帝嚳은 高辛, 堯임금은 陶唐, 舜임금은 有虞이며, 禹王은 夏后라고 부르고 별도로 姒姓을 가졌다. 商나라의 시조 契의 姓은 子이며, 周나라의 시조 棄의 姓은 姬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역주21 : 대전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다.
역주22 周公殺管蔡 : 8-4-가 참조.
역주23 立王……故地 : 阜陵侯 劉安을 淮南王에, 安陽侯 劉勃을 衡山王에, 陽周侯 劉賜를 廬江王에 봉하였다. 東城候 劉良은 후사 없이 이 이전에 죽었다. 《前漢書 卷44 淮南衡山濟北王傳》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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