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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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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7-3-나(按)
按 呂不韋 非直大賈 蓋大盜也 方其見子楚曰 奇貨可居라하니
固料己之能使子楚 得國이요 又能移子楚之國하여 爲己之國矣
其捐千金也 非輕利也 謂其利有乎此也 其獻姬也 非能割己之欲也 謂其所欲 有萬乎此也
史稱子楚之請姬也 不韋라가 旣不獲已與之라하니
夫不韋 不出飮子楚而以娠者飮子楚하니 固知其見而悅하고 悅而請이라
請而與之則異時得國者 吾之子也 其獻也 所欲而非强也 其怒也 僞而非情也
深而布置하니 非獨子楚 不能察이라 雖後之作史者라도 猶莫之察也
且孝文之立三日而薨 莊襄之立三年而薨 豈其偶然邪 抑必有其故矣로다
原注
夫以不韋之智巧 能使子楚外入하여 超在內二十餘公子而得國하니 安知其不能速二君之死而趣立其子乎리오
子政 立則嬴氏之國 轉而呂氏有矣 蓋自子楚之嗣 至此 不二十年而呂氏得國이라
之祀 已絶하니 史氏紀錄 宜曰後秦 可也라하니
自孝公以至昭王 國勢 日益雄張하니
而不韋 以一女子 從容談笑하여 奪其國於袵하니 故曰 不韋 非獨大賈 蓋大盜也라하노이다
原注
其後 楚相 亦先納之妹하여 娠而獻之君하여
生子爲太子하여 遂以黃으로하니 其竊國之術 與不韋同하니이다 然二人 卒以是自族하니 果何益哉리오
今列此於簒臣之篇者 欲人君으로 知姦臣用智之可畏하여 謹毋以色而傾其國也하노이다


原注
17-3-나()
[신안臣按] 여불위는 그저 큰 장사꾼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큰 도둑일 것입니다. 그가 자초子楚를 보았을 때 “진기한 물건이다. 사둘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자신이 자초가 나라를 얻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자초의 나라를 옮겨 자신의 나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가 천금을 쓴 것은 이익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이 천금보다 백 배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가 여자를 바친 것은 자신의 욕망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는 것이 여자보다 만 배는 컸기 때문입니다.
사서史書에 이르기를 자초가 여자를 달라고 청했을 때 여불위가 노여워하다가 부득이하게 된 뒤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저 여불위가 다른 여자를 나오게 하여 자초를 술자리에서 모시게 하지 않고 임신한 여자를 나오게 하여 자초를 술자리에서 모시게 하였으니, 참으로 자초가 그 여자를 보면 기뻐할 것이고 기뻐하면 달라고 청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청해서 주게 되면 훗날 나라를 얻는 자는 자신의 아들일 것이니, 여불위가 바친 것은 바라던 바이지 억지로 바친 것이 아니며, 여불위가 노여워한 것은 거짓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속셈이 깊고 포석布石이 원대하였으니 자초만 살피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비록 훗날 역사를 쓰는 자도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은 것과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아마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原注
여불위의 기지와 술책으로 자초가 국외에서 들어가 나라 국내에 있던 20여 공자들을 제치고 나라를 얻게 할 수 있었으니, 그가 능히 두 임금의 죽음을 앞당기고 제 자식의 즉위를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아들 이 즉위하면 영씨嬴氏의 나라가 바뀌어 여씨呂氏의 소유가 됩니다. 자초子楚가 후사가 되고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되지 않아 여씨가 나라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이를 두고 논평하기를 “진 시황이 즉위하게 되자 백예伯翳의 제사가 끊어져 버렸으니, 역사서에서 후진後秦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라가 효공孝公 때부터 소왕昭王 때에 이르기까지 국세國勢가 날로 더욱 강성하여 일찍이 다섯 나라 백만 대군을 규합하여 나라를 공격하고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불위가 여자 하나로 느긋하게 담소하면서 그 나라를 잠자리에서 빼앗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여불위가 그저 큰 장사꾼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큰 도둑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原注
그 후에 나라의 재상 황헐黃歇이 또한 이원李園의 누이동생을 먼저 받아들여 임신이 된 후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태자로 삼아 마침내 황씨黃氏미씨羋氏를 대신하였으니 황알이 나라를 훔친 방법이 여불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끝내 이 때문에 스스로 멸족을 당하였으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지금 이 사례를, 정권을 찬탈했던 역신逆臣들을 다룬 에 넣은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간신이 꾀를 쓰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알게 하여, 삼가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지 말도록 하고자 해서입니다. 아.


역주
역주1 : 대전본에는 ‘伯’으로 되어 있다.
역주2 : 사고본에는 ‘他’로 되어 있다.
역주3 : 사고본에는 ‘而’로 되어 있다.
역주4 : 대전본에는 ‘苞’로 되어 있다.
역주5 先儒……可也 : 先儒가 누구인지 논평한 내용이 어느 문헌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혔던 宋나라 江贄의 《通鑑節要》에서는 秦 始皇부터 秦王 子嬰 때까지의 秦나라 역사를 〈後秦紀〉로 다루었다.
역주6 伯翳 : ?~?. 益‧伯益‧柏翳 등으로도 부른다. 少昊의 후예로 성은 嬴이다. 費에 봉해져서 費侯라고도 하는데 秦나라의 선조이다. 鳥獸를 잘 키워 순임금 때에는 山澤을 관장하는 虞를 지냈으며 禹王 때에는 治水를 도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우왕이 죽기 전에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였는데 결국 우왕의 아들 啓가 그 뒤를 이어 천자가 되었다.
역주7 嘗合……能克 : 秦 惠文王 更元 7년(기원전 318)에 楚‧趙‧魏‧韓‧燕 등 다섯 나라가 흉노와 함께 秦나라를 침공하여 函谷關을 공격하였다. 진나라는 庶長 疾을 보내어 한나라 장수 信差를 사로잡고 조나라 공자 渴‧한나라 태자 奐을 패퇴시켰으며 8만2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마침내 다섯 나라 군대가 모두 패주하였다. 《資治通鑑 卷3 周紀3 愼靚王 3年》 《史記 卷5 秦本紀》
역주8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之’가 있다.
역주9 黃歇 : ?~기원전 238. 春申君을 가리킨다. 전국시대 말기 楚나라 사람이다. 초나라 頃襄王 때 左徒가 되었으며, 秦 昭王을 설득하여 秦과 화친을 맺고 태자 完(考烈王)과 함께 秦나라의 인질이 되었다. 경양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꾀를 내어 태자를 탈출시키고 즉위하게 하였다. 이후 令尹이 되고 春申君에 봉해졌으며 淮北의 땅 12개의 縣을 봉지로 받고 3천 명의 식객을 두었다. 또한 재상으로 있을 때 秦나라 군대에게 도성을 포위당한 趙나라를 구원하였으며 고열왕 7년(기원전 256)에 魯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國勢를 떨쳤다. 고열왕에게 아들이 없어 여자를 물색하던 차에 李園이 자신에게 누이동생을 바쳤는데 그 여자가 임신을 하자 다시 그녀를 고열왕에게 바쳤다. 후에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었는데, 고열왕이 죽자 태자의 출생에 관한 진상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한 이원에게 살해당하였다.
역주10 李園 : ?~기원전 228. 전국시대 말기 趙나라 사람으로 후에 楚나라로 가서 春申君의 舍人이 되었다. 누이동생을 먼저 춘신군에게 바쳤다가 임신을 하자 초나라 考烈王에게 바쳐 총애를 얻게 함으로써 권력을 잡았다. 고열왕이 죽자 춘신군을 모살한 뒤 누이동생의 소생인 幽王을 옹립하고 令尹이 되었다. 유왕이 죽자 同母弟인 哀王이 즉위하였는데 公子 負芻가 애왕을 시해할 때 멸족당했다.
역주11 : 저본‧사고본에는 ‘芉’, 대전본에는 ‘芊’으로 되어 있으나 통행본 《史記》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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