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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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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齊尙書僕射(우복야) 勢傾朝野 咸陽王 惡之하여 하니 聞而怨之러니
23-4-가
北齊의 尙書右僕射 祖珽이 권세가 朝野를 뒤흔들었다. 咸陽王 斛律光이 그를 미워하여 그를 보면 반드시 멀리에서 욕을 하자 조정이 듣고서 곡률광을 원망하였다.
常求牧田於어늘 又爭之不與하니 由是祖‧穆 皆怨之하더라
女侍中 陸令萱의 아들 穆提婆가 일찍이 後主(高緯)에게 목장을 청하였는데, 곡률광이 또 이를 간쟁하여 주지 않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과 목제파가 모두 곡률광을 원망하였다.
性節儉하여 不好聲色하며 罕接賓客하며 杜絶饋餉하며 不貪權勢하고 每朝廷會議 常獨後言이요 言輒合理러라
斛律光은 천성이 검소하여 歌舞와 女色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賓客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고 음식 대접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으며 권세를 탐하지 않았다. 매번 조정에서 회의할 때에는 늘 혼자서 나중에 말하였고 말을 하면 번번이 이치에 맞았다.
行兵 營舍未定이면 終不入幕하고 身不脫介冑하여 常爲士卒先하니 結髮從軍하여 未嘗敗北 深爲鄰敵所憚이러니
군대를 이끌 때에는 군영이 정해지지 않으면 끝내 막사에 들어가지 않고 몸에서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아서 항상 士卒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어렸을 때 군대에 들어와 일찍이 패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적에게는 매우 두려운 대상이었다.
刺史 密爲謠言曰 飛上天이요 明月 照長安注+光, 字明月.이라하고
北周의 勳州刺史 韋孝寬이 남몰래 謠言을 지어 “百升이 높은 하늘을 날고, 明月이 長安을 비추네.”注+斛律光은 자가 明月이다.라고 하고,
又曰 高山自崩注+高, 齊姓也.이요 不扶自擧라하여 令諜人傳之於鄴하니 鄴中小兒 歌之於路어늘
또 “高山은 밀지 않아도 절로 무너지고,注+‘高’는 北齊의 國姓이다. 槲木은 붙들지 않아도 절로 우뚝하네.”라고 하여 첩자에게 이것을 鄴에 퍼뜨리게 하자, 업의 어린아이들이 길에서 이것을 노래하였다.
因續之曰 盲老公背受大斧 饒舌老母不得語라하여 使其妻兄鄭道蓋 奏之한대
北齊의 祖珽이 이로 인해 그 뒤를 이어서 짓기를 “눈먼 老公은 등에 큰 도끼를 받고, 말 많은 老母는 말을 하지 못하네.”라고 하여, 그 매형인 鄭道蓋로 하여금 이를 북제의 後主(高緯)에게 아뢰게 하였다.
以問珽하시니 珽與陸令萱 皆曰 實聞有之니이다
후주가 이 노래에 대해 조정에게 묻자, 조정과 陸令萱이 모두 함께 “참으로 그런 노래를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因解之曰 百升者 斛也 與國同憂 饒舌老母 似謂女侍中陸氏也로소이다
조정이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百升은 斛이고 눈먼 老公은 소신을 이르니 나라와 근심을 같이한다는 뜻이며, 말 많은 老母는 女侍中 陸氏(陸令萱)를 말하는 듯합니다.
且斛律 累世大將이라 明月 聲震하고 하니 謠言 甚可畏也니이다
그리고 斛律光은 대를 이어 대장이 된 자입니다. 명월의 명성이 關西에 진동하고 명월의 위엄이 突厥에 행해지니 요언이 매우 두렵습니다.” 마침내 곡률광을 불러 들어오게 해서 죽였다.
血流於地어늘 剗之호대 終不滅이러라
聞光死하고 爲之大赦러니 하다
곡률광의 피가 땅에 흘렀는데, 이 핏자국을 깎아냈으나 흔적이 끝내 없어지지 않았다. 北周의 武帝가 곡률광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大赦令을 내렸다. 6년 뒤에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켰다.
역주
역주1 23-4-가 : 《資治通鑑》 卷171 〈陳紀5 宣帝 上之下〉 太建 4년(572) 5월‧6월 조에 보인다.
역주2 : 《資治通鑑》에는 ‘右’, 《北齊書》 권39 〈祖珽列傳〉에는 ‘左’로 되어 있다.
역주3 祖珽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北齊의 대신이자 저명한 시인이다. 자는 孝徵이며 范陽 狄道 사람으로, 東魏 護軍將軍 祖瑩의 아들이다. 음률에 뛰어났고 鮮卑語를 잘 알았다. 秘書郞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中書侍郞, 齊郡太守, 太常少卿, 散騎常侍 등을 역임하였으며, 後主 高緯(556~577, 재위 565~576)가 즉위한 뒤에는 秘書監, 侍中, 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 燕郡公에 봉해졌다. 탐욕스럽고 교만하였다. 재상의 지위를 탐하여 和士開(524~571)를 무고했다가 光州로 유배되어 토굴에 갇히면서 실명하였다. 후주 天統 4년(568)에 복관되었으나 후주 武平 4년(573)에 권신 韓鳳 등의 참소로 侍中, 僕射에서 면직되고 北徐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北齊書》 권39에 열전이 있다.
역주4 斛律光 : 515~572. 北齊의 名將이다. 자는 明月이며 朔州 敕勒部 사람이다. 北魏의 武衛大將軍‧左丞相을 역임한 斛律金의 아들이다. 말 타고 활 쏘는 데 뛰어나 射雕手로 불렸으며, 여러 번 北周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大將軍, 太傅, 右丞相, 左丞相 등을 역임하고 咸陽王에 봉해졌다. 後主 高緯의 장인이기도 하다. 뒤에 祖珽의 참소를 받아 後主 高緯에 의해 피살되었다.
역주5 見必遙罵 : 斛律光은 祖珽이 멀리서 보이면 “끝도 없이 탐하여 나라에 일을 많이 만드는 소인이 무슨 계략을 꾸미고자 하는가.[多事乞索小人 欲行何計]”라고 욕을 하고, 또 장수들에게도 그를 가리켜 “병마의 처분에 대해 趙令(尙書令 趙彦深)이 늘 우리들과 논의하였는데 장님이 기밀을 관장한 뒤로는 전혀 우리와 말을 하지 않으니 바로 국가의 일을 그르칠까 두렵다.[兵馬處分 趙令恒與吾軰參論 盲人掌機密以來 全不與吾軰語 正恐誤國家事耳]”, “장님이 들어왔으니 우리나라가 필시 망할 것이다.[盲人入 國必破矣]”라고 욕하기도 한 것을 이른다.
역주6 女侍……不與 : 北齊 後主가 穆提婆에게 晉陽의 땅을 하사하려 하자, 斛律光이 간언하여 “이 땅은 신무제 이래로 항상 벼를 심어 말 수천 필을 먹여서 적을 막는 데 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목제파에게 내려주려 하시니 군무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此田 神武帝以來常種禾 飼馬數千匹 以擬寇敵 今賜提婆 毋乃闕軍務也]”라고 한 것을 이른다. 《資治通鑑 卷171 陳紀5 宣帝 上之下 太建 4年》
역주7 女侍中 : 外命婦에 속한 女官 이름이다. 3품 여관 중에 가장 높으며 어전에서 칼을 찰 수 있었다. 대체로 공주 등 지위를 가진 종실 여성, 황제의 이모, 황후의 친족, 조정 중신의 처나 모친 등의 신분을 가진 여성을 임명하였다.
역주8 陸令萱 : 504~576. 北齊 後主 高緯의 유모이자 女官이다. 漢族이다. 남편이 모반죄로 伏誅되자 掖庭에 배치되어 태자 고위를 양육하였는데, 간교한 변설로 태후에게 아첨하여 상벌을 내리는 권한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佞臣 和士開와 高阿那肱 등을 수양아들로 삼고 후궁 穆昭儀를 양녀로 삼았다. 郡君, 女侍中에 봉해졌다. 후주가 즉위한 뒤 아들 穆提婆가 총애를 받자 모자의 권세가 朝野를 뒤흔들어 매관매직과 聚斂을 끝없이 하였으며, 황후의 廢立과 대신의 黜殺에 관여하였다. 北周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자살하였다.
역주9 穆提婆 : ?~577. 北齊의 간신이다. 秦州 漢陽 사람으로, 본래 성은 駱이었다. 아버지가 모반죄로 죽자 어머니 陸令萱을 따라 궁에 들어와 노비가 되었다. 어머니가 총애를 얻자 後主를 모시게 되어 벼슬이 侍中, 尙書左僕射, 領軍大將軍 錄尙書事에까지 이르렀으며, 城陽郡王에 봉해졌다. 陸令萱이 양녀로 삼은 穆昭儀가 총애를 받자 성을 穆氏로 바꾸었다. 목소의가 뒤에 황후가 되자 母子가 안팎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나라를 어지럽혔다. 北周의 군대가 晉陽으로 쳐들어오자 항복하고 宣州刺史가 되었는데, 北齊가 망하자 모반죄로 주살되었다.
역주10 : 北齊의 제5대 임금인 後主 高緯(556~577, 재위 565~576)이다. 간신을 등용하고 충신을 해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 망국에 이르게 만들었다. 576년 21세에 태자 高恒에게 傳位하고 태상황이 되었다. 577년에 北周의 군대에 의해 수도 鄴이 함락되자 달아났다가 붙잡혀 溫公에 봉해졌다가 동년 10월에 賜死되었다.
역주11 周勳……畏也 : 陳 宣帝 太建 4년(572) 5월의 일이다.
역주12 勳州 : 지금의 산서성 稷山縣 서남쪽에 있었다. 北齊 개국황제 高洋(529~559, 재위 550~559)의 아버지 高歡(496~547)이 北周 개국황제 宇文覺(542~557, 재위 557~557)의 아버지 宇文泰(507~556)와 싸울 때 우문태가 韋孝寬을 보내 玉璧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고환이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곧 죽자 우문태가 위효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훈주를 세웠다고 한다.
역주13 韋孝寬 : 509~580. 西魏와 北周의 군사가이자 전략가이다. 이름은 叔裕이나 세상에 字(孝寬)로 통용한다. 京兆 杜陵 사람이다. 일생을 전장에서 보냈으며 공을 많이 세웠다. 大司空, 上柱國을 역임하였고 鄖國公에 봉해졌다. 사후에 太傅‧十二州諸軍事‧雍州牧이 증직되었다. 시호는 襄이다.
역주14 百升 : 1斛으로, 여기에서는 斛律光을 가리킨다. 10升이 1斗, 10斗가 1斛이다.
역주15 : 사고본에는 ‘推’로 되어 있다.
역주16 槲木 : 斛律光을 가리킨다.
역주17 盲老公謂臣也 : 곡률광이 祖珽을 ‘盲人’이라고 욕한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위 ‘見必遙罵’ 주석 참조.
역주18 關西 : 지금의 河南省 新安縣 동쪽에 있는 函谷關 서쪽의 땅으로, 여기에서는 北周를 이른다.
역주19 威行突厥 : 《資治通鑑》‧《北齊書》‧《北史》 등에는 이 앞에 ‘豐樂’ 2자가 더 있는데, 풍락은 斛律光의 아우인 斛律羨(?~572)의 字이다. 北齊 武成帝 河淸 3년(564) 가을에 돌궐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변경을 침략하자 都督幽‧安‧平‧南‧北營‧東燕六州諸軍事,幽州刺史였던 곡률선이 이에 응전하였는데, 돌궐군이 곡률선의 군대가 기강이 엄정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물러가고, 이듬해인 後主 天統 원년(565) 5월부터 북제에 조공을 보내온 것을 이른다. 곡률선은 후주 武平 3년(572)에 곡률광이 피살될 때 연루되어 함께 피살되었다. 《北齊書 卷17 斛律金列傳 羨》
역주20 遂召……不滅 : 陳 宣帝 太建 4년(572) 7월의 일이다. 《자치통감》에는 동년 6월 조에 보이나 이는 오류로 보인다. 《北齊書》 권8 〈後主紀〉 武平 3년(572) 조에 “가을 7월 무진일에 좌승상‧함양왕 곡률광을 죽였다.[秋七月戊辰 誅左丞相咸陽王斛律光]”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北史》 권8 〈齊本紀下 後主紀〉의 기록도 동일하다.
역주21 : 사고본에는 ‘跡’으로 되어 있다.
역주22 周主……大赦 : 북주의 武帝는 斛律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6년 뒤에 北齊의 수도 鄴을 함락시켰는데, 이때 곡률광을 上柱國公에 추증하고는 추증 조서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짐이 어찌 업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此人若在 朕豈能至鄴]”라고 하였다 한다. 《北齊書 卷17 斛律金列傳 光》
역주23 周主 : 북주 제3대 임금 武帝 宇文邕(543~578, 재위 560~578)이다. 제2대 임금 明帝 宇文毓(534~560, 재위 557~560)을 독살한 사촌형 宇文護(513~572)에 의해 옹립되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577년에 北齊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하였으며, 이듬해에 病死하였다.
역주24 後六年周滅齊 : 陳 宣帝 太建 9년(577) 2월의 일이다. 北齊 幼主 高恒(570~577, 재위 577~577)이 동년 1월 1일 乙亥日에 즉위한 지 한 달이 채 못 된 동월 20일 甲午日에 北周의 군대가 북제의 수도 鄴으로 쳐들어오자 북제의 왕공 이하가 모두 항복하였으며, 동년 2월에 북제의 任城王 高湝(고개)가 信都에서 4만여 군대로 마지막 항전하였으나 결국 패배함으로써 북제는 멸망하였다. 태상황인 後主 高緯와 幼主 고항은 달아났다가 포로로 잡혀 동년 10월에 賜死되었다. 北周는 북제를 멸망시킴으로써 북방을 통일하였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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