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22-3-나(안按)
[신안臣按] 비무극費無極이 태자의 총애를 받지 못한 이유로 태자를 참소할 적에, 처음에는 평왕平王에게 며느리를 들이자고 권했고 이미 진秦나라의 여인을 며느릿감으로 맞아들이고 나서는 또 평왕에게 평왕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자간에 의심이 싹트고 나서는 또 평왕에게 성보城父에 크게 성을 쌓고 태자를 머물게 하여 북방北方과 통교할 것을 권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여희驪姬와 이오二五(양오梁五‧동관폐오東關嬖五)가 신생申生을 내보내 곡옥曲沃에 살게 했을 때 썼던 낡은 수법입니다.
부자간의 형세가 서로 떨어져 있어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고, 또 태자의 거처가 북방과 가까우므로 제齊나라‧노魯나라와 통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무극이 태자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참소하고 아울러 오사伍奢까지 연루되게 하였습니다.
비무극이 점차적으로 흔들고 결정적인 순간을 노려 말을 꺼내자, 평왕의 마음에는 언제나 비무극이 자기에게 충성한다고만 생각했지,
아들의 배필감을 빼앗는 것이 금수만도 못하며 무고하게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 범이나 이리만도 못한 줄은 알지 못했으니, 모두 비무극이 실로 그 지경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사가 죽고 나서 아들 오원伍員(오자서伍子胥)이 오吳나라로 달아나 마침내 훗날 오吳나라의 군대가 초楚나라의 도성인 영郢으로 쳐들어오는 재앙을 불러와서 초 소왕楚 昭王이 달아나고 초나라가 거의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 비무극이 실로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참소하는 사람의 폐해가 한결같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