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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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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9-19-나(按)
按 古者 君視臣如手足이라 故其疾也 憂之至焉하시고 其死也 䘏之至焉하시니 禮記而下三條 可見其略이요
而鄕黨 亦有君視臣疾之하니이라하니 則疾而見君之禮也
하니 하시고 釋祭而弔之하시고
荀盈 未葬而晉侯 飮樂則屠蒯 以爲譏하니 世降春秋호대 君臣之間 愛且敬 猶若此하니 三代之盛 從可知矣로소이다
原注
古道 旣淪 斯禮 埽地하나 然唐太宗之於三臣 其疾也 憂惻之하시고
其亡也 愍悼之하사 極君臣終始之遇注+ 後忽夢如晦若平生, 勅所御饌往祭. 側乃下, 相對流涕, 因留宮中. 小愈則喜形於色, 加則憂悴, 篤, 上自臨視, 握手與訣, 悲不自勝. 寢疾, 上與太子同至其第, 撫之流涕, 問所欲言. 後數日, 上夢徵若生平, 及旦而奏徵薨.하시고之歿 雖辰日이나 不爲之輟哭하시니
視古 蓋庶幾焉이라 太宗 賢矣哉신저


原注
9-19-나(按)
[臣按] 옛날에는 임금이 신하를 수족처럼 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하가 병들었을 때 걱정이 지극하였고 신하가 죽었을 때 돌보아주는 것을 지극히 하였으니, 《예기》 이하 세 조목에서 그 대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논어》 〈鄕黨〉에도 임금이 신하가 병들었을 때 문병 간 내용의 글이 있는데,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서 朝服을 몸에 올려놓고 띠를 조복 위에 걸쳐놓았다.”라고 하였으니, 병들었을 때 임금을 뵙는 예입니다.
衛나라에 太史 柳莊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社稷之臣이었는데, 衛 獻公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지내고 있던 제사를 버려두고 조문을 갔습니다.
그리고 荀盈의 매장을 앞두고 있었을 때 晉나라 임금이 술을 마시며 음악을 연주하자 屠蒯는 이를 비판하였습니다. 세상은 혼란했던 춘추시대로 내려왔지만 군신간에 아껴주고 공경했던 것이 여전히 이와 같았으니, 三代 때 군신간의 예가 얼마나 성대했는지를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原注
옛날의 도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이러한 禮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唐 太宗은 房玄齡‧杜如晦‧魏徵 세 신하에 대하여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는 걱정하며 슬퍼하였고,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애도하여 군신간에 시종일관 예우를 극진히 하였습니다.注+杜如晦의 병이 위독해지자, 당 태종은 친히 문병을 갔다. 두여회가 죽은 뒤에 태종이 좋은 물건을 얻을 때면 번번이 두여회를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그의 집에 하사하였다. 오랜 뒤에도 두여회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후에 불현듯 두여회의 살아생전과 같은 모습을 꿈에서 보고는 御饌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가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房玄齡의 병이 위중하자, 태종은 그가 肩輿에 탄 채 어전으로 올라와 御座 옆에까지 와서 바로 내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궁중에 머무르게 하였다. 방현령의 병이 조금 나으면 태종의 낯빛에 기쁨이 드러났고, 병이 더 심해지면 걱정으로 몸이 초췌해졌다. 방현령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태종은 친히 문병을 가서 방현령의 손을 잡고 영결할 때에 슬픔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였다. 魏徴이 몸져눕자, 태종은 태자와 함께 위징의 집으로 가서 위징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는 위징이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며칠 뒤 태종은 위징의 평소와 같은 모습을 꿈에서 보았는데, 아침이 되자 위징이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리고 張公謹이 죽었을 때에는 辰日이었지만 그것을 이유로 곡을 멈추지 않았으니,
옛날과 비교해보았을 때 거의 손색이 없었습니다. 태종은 역시 현군이었습니다.


역주
역주1 : 대전본에는 ‘又’로 되어 있다.
역주2 東首……拖紳 : 《논어》 〈鄕黨〉에 보인다. 주희에 따르면 머리를 동쪽으로 하는 것은 生氣를 받기 위한 것이며, 병중이라 조복을 착용할 수는 없어도 평상복으로 임금을 뵐 수 없기 때문에 조복과 띠를 몸 위에 걸쳐놓은 것이다.
역주3 衛有……弔之 : 《예기》 〈檀弓 下〉에 보인다. 유장이 병으로 몸져눕자 헌공은 “그대의 병이 위독해지면 내가 제사를 지내고 있어도 반드시 알려주시오.[若疾革 雖當祭 必告]”라고 하였다. 뒤에 제사를 지내던 도중 유장의 부음을 듣자, 헌공은 입고 있던 제복 차림으로 유장의 집으로 가서 襚(수)를 행하였다. 陳澔의 주에 따르면, ‘수’는 망자에게 의복을 주는 것이다. 《禮記集說 檀弓 下》
역주4 柳莊 : 衛 獻公이 기원전 559년에 齊나라로 망명했을 때 수행하였다. 기원전 547년에 헌공이 귀국할 때 교외에 이르러 자신을 수행했던 자에게 상으로 邑을 내리려 하자, 유장이 “만약 모두 사직을 지켰다면 누가 말고삐와 굴레를 잡고 수행했겠으며, 모두가 수행했다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고국으로 돌아오시면서 사심을 두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如皆守社稷 則孰執羈靮而從 如皆從 則孰守社稷 君反其國而有私也 毋乃不可乎]”라고 하여 결국 헌공을 단념시켰다. 그가 죽은 뒤 위 헌공이 제사를 지내고 尸童에게 고하면서 “신하 유장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과인의 신하일 뿐만 아니라, 바로 사직의 중신입니다.[有臣柳莊也者 非寡人之臣 社稷之臣也]”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 下》
역주5 社稷之臣 : 《논어》 〈季氏〉 제1장에, “저 顓臾는 옛날에 선왕이 東蒙山의 祭主로 삼았고, 또한 우리나라 안에 있으니, 이는 사직지신이다. 어찌 정벌할 수 있는가.[夫顓臾 昔者先王以爲東蒙主 且在邦域之中矣 是社稷之臣也 何以伐爲]”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6 獻公 : ?~기원전 544. 재위 기원전 576~기원전 559, 기원전 546~기원전 544. 衛나라의 24대 임금으로 이름은 衎(간)이다. 원한이 있었던 孫林父에 의해 쫓겨나 齊나라로 망명하였다. 손림보와 寧殖이 헌공의 동생 剽(표)를 세우니, 이 사람이 殤公(재위 기원전 558~기원전 547)이다. 나중에 헌공이 大夫 寧喜의 도움으로 귀국하였지만, 정사는 영식의 손에서 좌우되었다. 후에 영희가 상공을 시해하여 복위하였다. 얼마 뒤 晉나라 사람에게 잡혔다가 齊나라와 鄭나라의 도움으로 귀국하였다.
역주7 : 사고본에는 ‘其’로 되어 있다.
역주8 : 房玄齡(579~648)을 가리킨다. 자는 喬인데, 일설에는 현령이 자이고 교가 이름이라고도 한다. 齊州 臨淄 사람으로, 隋나라에서 隰城 尉를 지냈다. 唐의 군대가 關中에 들어오자 李世民에게 가담하여 秦王府 記室이 되었다. 이세민이 즉위하자 貞觀 원년(627) 中書令이 되고, 邢國公에 봉해졌다가 정관 11년(637)에는 梁國公으로 이봉되었다. 시호는 文昭이다.
역주9 : 杜如晦(585~630)를 가리킨다. 자는 克明으로, 京兆 杜陵 사람이다. 秦王 李世民의 兵曹參軍으로 있다가 후에 文學館學士를 겸했다. 이세민을 따라 출정하여 참모로 활약했으며, 이세민이 태자가 되자 兵部尙書가 되고 蔡國公에 봉해졌다. 貞觀 2년(628)에 吏部尙書, 이듬해 右僕射가 되어 관리 선발을 담당하였으며, 당나라의 법률 제도와 인사 행정을 정비하였다. 사후에 萊國公으로 이봉되었으며, 시호는 成이다.
역주10 : 魏徵(580~643)을 가리킨다. 자는 玄成으로, 魏郡 內黃 사람이다. 隋나라 말에 元寶藏의 典書記로 있다가 李密에게 귀순했으며, 다시 唐 高祖에게 귀순하여 태자 李建成의 측근이 되었다. 玄武門의 변(626) 이후에는 태종의 부름을 받아 諫議大夫, 左光祿大夫 등을 역임하고 鄭國公에 봉해졌으며, 貞觀 16년(642) 太子太師가 되었다.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11 杜如……流涕 : 貞觀 4년(630)의 일이다. 두여회가 병이 들자 태종은 태자를 보내 문병하고 다시 몸소 문병을 갔다. 두여회의 사후에 두여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방현령에게 “공이 두여회와 함께 짐을 보좌하더니, 지금 공만 보이고 두여회는 안 보이는구려.”라고 말하며 슬퍼하였다. 《資治通鑑 卷193 唐紀9 太宗 上之中 貞觀 22年》
역주12 房玄……自勝 : 貞觀 22년(648)의 일이다. 방현령이 병중에도 태종의 고구려 정벌에 극력 반대하는 주청을 올렸다. 그러자 태종은 자신의 딸이자 방현령의 며느리인 高陽公主에게 “저 사람의 병이 이렇게 위독한데도 오히려 우리나라를 걱정하는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資治通鑑 卷199 唐紀15 太宗 下之下 貞觀 22年》
역주13 : 사고본에는 ‘座’로 되어 있다.
역주14 : 사고본에는 ‘極’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 대전본에는 ‘疾’로 되어 있다.
역주16 魏徵……徵薨 : 貞觀 17년(643)의 일이다. 위징이 병이 들자 태종은 계속 약을 하사하고 中郞將 李安儼을 위징의 집으로 보내 유숙하면서 동정을 보고하게 했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9품 이상의 백관들에게 위징의 장례에 참석하도록 명하였으며 직접 碑文을 지었다. 《資治通鑑 卷196 唐紀12 太宗 中之中 貞觀 17年》
역주17 : 대전본에는 ‘證’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이하도 같다.
역주18 於張……輟哭 : 貞觀 7년(633)의 일로, 《貞觀政要》 卷6 〈仁惻〉에 보인다. 《資治通鑑》에는 정관 6년(632)의 일로 되어 있다. 장공근이 졸한 날은 4월 辛卯일로, 그 다음날이 壬辰일이었다. 당시 장공근의 죽음에 태종이 매우 슬퍼하였는데, 有司가 “陰陽書에 따르면 십이지 가운데 辰이 들어간 날에는 哭泣을 하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流俗에서 꺼리는 일입니다.”라고 진언하였음에도 태종은 “군신간의 의리는 부모자식과 같다. 감정이 마음에서 나오는데 어찌 辰日을 피하겠느냐.”라고 하고서 곡을 하였다.
역주19 張公謹 : ?~633. 자는 弘愼으로, 魏州 사람이다. 隋나라가 어지러울 때 王世充 밑에서 洧(유)州長史를 지내다가 唐 高祖에게 귀순하였는데, 李勣 등이 아뢰어 당시 秦王이었던 태종의 王府에 들게 되었다. 玄武門의 변에 가담하였으며 태종이 즉위한 뒤 突厥을 격파한 공으로 鄒國公에 봉해졌다. 이후 襄州都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재직하던 중 졸하였다.
역주20 : 대전본에는 ‘之’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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