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9-19-나(按)
[臣按] 옛날에는 임금이 신하를 수족처럼 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하가 병들었을 때 걱정이 지극하였고 신하가 죽었을 때 돌보아주는 것을 지극히 하였으니, 《예기》 이하 세 조목에서 그 대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논어》 〈鄕黨〉에도 임금이 신하가 병들었을 때 문병 간 내용의 글이 있는데,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서 朝服을 몸에 올려놓고 띠를 조복 위에 걸쳐놓았다.”라고 하였으니, 병들었을 때 임금을 뵙는 예입니다.
衛나라에 太史 柳莊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社稷之臣이었는데, 衛 獻公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지내고 있던 제사를 버려두고 조문을 갔습니다.
그리고 荀盈의 매장을 앞두고 있었을 때 晉나라 임금이 술을 마시며 음악을 연주하자 屠蒯는 이를 비판하였습니다. 세상은 혼란했던 춘추시대로 내려왔지만 군신간에 아껴주고 공경했던 것이 여전히 이와 같았으니, 三代 때 군신간의 예가 얼마나 성대했는지를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