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4)

대학연의(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原注
23-1-나(按)
按 伐吳之役 實主之而馮紞‧荀勗則附以沮其議者也 平吳之後 紞等 不知自媿하고 乃反加讒疾焉하니
23-1-나(按)
[臣按] 東吳를 정벌하는 전쟁을 張華가 실로 주장하였고 馮紞과 荀勗은 賈充에게 붙어서 그 논의를 저지했던 자들입니다. 동오를 평정한 뒤에 풍담 등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참소하고 질시하였습니다.
觀其言於武帝者 援據古今하여 從容近理하니 人主 聽之 安得不爲之動이리오 其實則誣善之巧辭 蔽賢之邪說也
그들이 武帝에게 한 말을 보면 고금의 일을 근거로 끌어들여 유혹한 것이 이치에 가까우니, 군주가 듣고서 어찌 여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善人을 무고한 교묘한 말이었고 賢者를 가린 간사한 말이었습니다.
詩人之所謂 殆此類邪인저 人主 於此 尤不可以不察이니이다
시인이 이른바 ‘조개무늬 비단[貝錦]’이라는 것이 아마도 이러한 종류일 것입니다. 군주가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주
역주1 賈充 : 217~282. 魏晉 시기의 重臣이다. 자는 公閭이며 지금의 山西省 襄汾 동북쪽에 있었던 平陽 襄陵 사람이다. 曹魏의 건국을 도왔던 賈逵(174~228)의 아들이며 西晉의 개국공신이다. 魏나라 제4대 임금 高貴鄕公 曹髦(241~260, 재위 254~260)가 당시 재상이었던 司馬昭를 공격하자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맞아 싸웠는데, 敗色이 짙을 무렵 太子舍人 成濟를 독려하여 성제가 고귀향공을 시해하도록 하였다. 이 일로 司馬氏의 신임을 얻었다. 뒤에 두 딸을 司馬炎(236~290, 晉 武帝)의 아우인 司馬攸(248~283)와 차자인 司馬衷(259~307, 晉 惠帝)에게 출가시켜 사마씨와 인척을 맺으면서 더욱 현달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晉나라가 건립된 뒤 車騎將軍, 散騎常侍, 尙書僕射, 司空, 太尉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魯郡公에 봉해졌다. 東吳 정벌을 반대하였으나 동오를 정벌할 때 大都督으로서 6군을 통수하였다. 사후에 太宰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武이다. 열전이 《晉書》 권40에 있다.
역주2 貝錦 : 참소를 비유한다. 21-5-가 참조.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