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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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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在蜀也注+天寶十四載安祿山反, 明皇幸蜀. 以辯學得幸이러니
在鳳翔하사 每命宰相 輒啓聞이러시니
16-7-가
唐 明皇(玄宗)이 蜀에 있을 때注+天寶 14년(755)에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明皇이 蜀으로 播遷하였다. 給事中 裴士淹이 말재주와 학식으로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때 肅宗이 鳳翔에 있으면서 宰相을 임명할 때마다 현종에게 보고를 올렸는데,
爲將 帝曰 非破賊才也 賊不足滅이리라하여
房琯이 장군에 임명되어 그 보고가 올라오자 현종이 말하였다. “叛賊을 격파할 재목이 아니다. 만약 姚崇이 살아 있었다면 반적은 토멸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宋璟에 대해 말이 나오자 현종이 말하였다. “그 사람은 정직함을 팔아 명성을 얻은 것일 뿐이다.”
因歷評十餘人 皆當하시고하여 曰 是子 妬賢疾能 無與比者니라 士淹 曰 陛下 誠知之신댄 何任之久잇고 默不應하시다
그리고 이어서 10여 사람들에 대해 하나하나 평한 것이 모두 합당하였다. 李林甫에 대해 말이 나오자 현종이 말하였다. “이자는 어진 사람을 시기하고 유능한 사람을 미워했던 것이 비길 자가 없다.” 배사엄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정말로 그러한 줄 아셨다면 왜 그를 오래도록 임용하셨습니까?” 현종은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역주
역주1 16-7-가 : 관련 내용이 《新唐書》 卷223上 〈李林甫傳〉에 보인다. 天寶 14년(755)에 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12월에 東京 洛陽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6월에는 潼關까지 함락시켜 長安을 압박하자 玄宗은 蜀으로 몽진하였다. 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들고 일어난 장졸들을 진정시키고자 楊貴妃를 자진시켰으며, 마외역을 떠날 때 자신을 가로막는 父老들을 달래고자 현종은 태자 李亨을 남겨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현종이 이형에게 전위하려 하였으나 이형은 받지 않았는데, 마침내 현종은 촉으로 가고 이형은 북상하면서 변란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다음 달인 7월에 이형이 靈武에 도착하자 裴冕‧杜鴻漸 등이 箋을 올려 이형에게 현종이 마외역에서 내렸던 전위의 명을 따라 즉위할 것을 청하였다. 이형은 처음에 허락하지 않았으나 배면 등이 다섯 번에 걸쳐 전을 올리자 마침내 허락하여 靈武城 南樓에서 즉위하고 현종을 上皇天帝로 높였다. 이때까지 현종은 이형의 즉위를 몰랐다가 成都에 도착한 뒤 8월에 영무에서 사자가 오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현종은 자신을 太上皇으로 칭하도록 하고 군국대사를 肅宗이 먼저 재결하게 한 뒤에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韋見素‧房琯 등에게 명하여 國寶와 玉冊을 받들어 영무로 전달하게 하였다. 《資治通鑑 卷218 唐紀34 肅宗 上之上》
역주2 唐明皇 : 685~762. 재위 712~756. 당나라의 황제 李隆基로, 明皇帝는 시호이며 묘호는 玄宗이다. 睿宗의 셋째 아들로 9세에 臨淄郡王에 봉해졌다. 26세 때 擧兵하여 中宗을 암살한 韋皇后 세력을 제거한 뒤 부친을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태자가 되었다. 이후 太平公主 세력을 제압하고 28세에 예종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전반에는 姚崇‧宋璟‧張說‧張九齡 등 명재상을 등용하고 屯田制와 府兵制를 확대하는 등 開元之治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天寶 연간(742∼756)으로 접어들면서 李林甫를 재상으로 기용하고 失政을 거듭하면서 천보 14년(755)에 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 이듬해 蜀으로 피난을 갔으며 같은 해에 태자 李亨이 즉위하여 肅宗이 됨으로써 자신은 太上皇이 되었다. 長安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쓸쓸한 노년을 보냈다.
역주3 給事中 : 秦나라 때 설치된 관직으로, 顧問에 응대하고 정사를 토론하였다. 唐 高宗 龍朔 2년(662)에 東臺舍人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咸亨 원년(670)에 다시 급사중이라는 명칭을 회복하였는데 조칙에 부당한 점이 있으면 이를 바로잡는 封駁을 담당하였다. 《兩唐書辭典 給事中》
역주4 裴士淹 : ?~?. 河東 聞喜 사람이다. 玄宗 때 司勳郎中을 지냈으며 天寶 14년(755)에 給事中이 되었다. 이해에 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을 수행하여 蜀으로 피난 갔는데, 翰林學士‧知制誥가 되었다. 代宗 永泰 2년(766)에는 檢校禮部尙書로 儀禮使가 되었다. 大曆 연간 초기에는 尙書에 임명되고 絳郡公이 되었다. 대력 5년(770)에는 魚朝恩의 당여에 연좌되어 饒州 刺史로 폄적되었다.
역주5 肅宗在鳳翔 : 肅宗은 즉위한 해인 至德 원년(756)에 扶風을 鳳翔郡으로 고쳤다. 鳳翔으로 간 것은 현종이 촉으로 파천한 이듬해인 至德 2년(757) 2월이다. 이해 정월에 안녹산이 아들 安慶緖에게 피살되었다. 숙종은 范陽을 먼저 취해 반군을 궤멸하자는 李泌의 건의를 듣지 않고, 먼저 長安과 洛陽을 수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역주6 肅宗 : 711~762. 재위 756~762. 당나라의 황제 李亨으로 숙종은 묘호이다. 초명은 嗣昇으로, 후에 浚‧璵‧紹 등으로 개명했다가 亨으로 고쳤다. 玄宗의 아들로 開元 26년(738)에 태자가 되었다. 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을 수행하여 피난을 갔으며, 馬嵬驛에 이르러 禁軍이 楊國忠을 살해하고 楊貴妃가 목을 맨 뒤에는 현종은 蜀으로 가고 자신은 그곳에 남았다. 그해 7월에 靈武로 가서 황제로 즉위하고 현종은 上皇으로 높였다. 나중에 回紇에게 병사를 빌리고 郭子儀에게는 兩京을 수복하라고 명하였다. 환관 李國輔‧魚朝恩 등을 총애하여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역주7 房琯 : 697~763. 자는 次律로 河南 사람이다. 則天武后 때 재상을 지낸 房融의 아들로 蔭仕를 통해 弘文生이 된 후 監察御史‧宜春 太守 등을 지냈다. 天寶 15년(756)에 일어난 安祿山의 난 때 蜀으로 파천하는 현종을 뒤따라와 文部 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으며 成都로 와서는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8월에 左相 韋見素 등과 靈武에서 肅宗을 옹립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나서는 군대를 이끌고 난을 평정하기를 청하였다. 용병술에 어두워 군대를 잘못 지휘하여 여러 차례 패전을 거듭하였음에도 숙종은 치죄하지 않았다. 후에 성품이 주밀하지 않고 호언장담을 일삼는다는 탄핵을 받았으며,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자 至德 2년(757)에 재상에서 파직되어 太子少師가 되었다. 乾元 원년(758)에는 邠州 刺史가 되어 治積이 있었는데, 光德 원년(763)에 刑部 尙書로 임명되어 도성으로 올라오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역주8 姚崇 : 650~721. 초명은 元崇, 자는 元之로, 陜州 硤石 사람이다. 일찍이 文才가 있었으며 則天武后 때 재주를 인정받아 同鳳閣鸞臺平章事‧夏官 尙書‧同鳳閣鸞臺三品 등을 역임하였다. 中宗 神龍 원년(705)에 張柬之 등과 張易之 형제를 주살한 공으로 梁縣侯에 봉해지고, 睿宗이 즉위하자 中書令에 올랐다. 玄宗 開元 원년(713)에 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으며 후에는 梁國公으로 進封되었다. 여러 차례 재상으로 있으면서 직무를 잘 수행하였으며 農桑의 권면을 주장하여 민생이 안정되게 하였다. 개원 4년(716)에 아들들이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재상에서 물러났다. 開元 9년(721)에 졸하였으며, 시호는 文獻이다.
역주9 宋璟 : 663~737. 邢州 南和 사람이다. 高宗 調露 원년(679)에 進士가 된 후 監察御史‧御史中丞 등을 지냈다. 中宗 때 吏部 尙書가 되고 諫議大夫를 겸하였으며, 睿宗 景雲 원년(710)에 吏部 尙書‧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다. 玄宗이 즉위한 후 御史大夫‧刑部 尙書를 역임했으며 開元 4년(716)에 吏部尙書 兼 侍中이 되었다. 이윽고 姚崇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는데, 간신을 내치고 형벌을 관대하게 하며 변경의 장수들이 병력을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엄금하는 등 치적을 쌓아 요숭과 함께 명재상으로 불렸다. 개원 20년(732)에 치사하여 낙양에 살았다. 강직하고 장중한 풍도가 있었으므로 현종이 경외하여 늘 뜻을 굽혀 의견을 받아들였다.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10 彼賣直以取名爾 : 당 현종 開元 4년(716)에 송경이 요숭의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송경은 과감하게 犯顔諫爭을 하여 현종이 송경을 매우 공경하면서도 꺼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따라주었다. 훗날 안녹산의 난 때 현종이 촉에서 송경을 폄하한 것은 당시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資治通鑑 卷211 唐紀27 玄宗 上之中》 《古今紀要 卷11 唐3》
역주11 李林甫 : ?~752. 아명은 哥奴, 호는 月堂으로, 隴西 狄道 사람이다. 당나라의 宗室로 李思誨의 아들이다. 開元 14년(726)에 御史中丞이 되고 刑部 侍郞‧吏部 侍郞을 역임했다. 開元 22년(734)에는 禮部 尙書‧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다가 이윽고 戶部 尙書‧兵部 尙書‧中書令 등을 지내고 晉國公에 봉해졌다. 天寶 연간(742~756) 초에는 右丞相이 되었다. 권력을 휘두르며 모략을 일삼아 張九齡‧裴耀卿과 같은 현신을 모해하고 牛仙客‧楊國忠과 같은 간신을 끌어들였다. 또한 현종이 태자 李瑛을 폐출하도록 부추겼으며, 현종에게 이민족 장수들을 중용하도록 종용하여 安祿山 등이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게 하였다. 楊國忠의 모함을 받고 병이 들어 천보 11년(752)에 죽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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