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24-4-나(안按)
[신안臣按] 양사楊賜는 올곧은 신하이기에 하夏나라 우왕禹王을 인용하여 자신의 임금에게 간쟁하니 영제靈帝가 이를 믿지 않았고, 임지任芝와 악송樂松은 아첨에 능한 신하이기에 주 문왕周 文王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임금에게 아첨하니 영제靈帝가 이를 믿었습니다.
이는 고언苦言은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감언甘言은 먹히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저 주 문왕周 文王의 동산이 100리라는 것은 애초에 경經에는 보이지 않고 전傳에는 있으니,
맹자가 이제 막 제齊나라 왕을 여민동락與民同樂으로 인도하게 하고자 했기 때문에 설명하기를 “꼴을 베고 나무하는 자들이 문왕의 동산에 들어갔으며 꿩 잡고 토끼 잡는 자들이 그 동산에 들어갔으니, 백성들이 동산을 작다고 여긴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왕의 고사를 들어서 당시 임금에게 일러줄 때에는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을 ‘곤궁한 백성’이라고 하니 정령政令을 내고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우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농사를 짓는 이에게는 1/9의 조세를 거두고 벼슬을 하는 이에게는 대대로 녹을 주었으며, 어획을 위해 물을 막은 시설의 출입을 금하는 것이 없었으며 죄인에 대하여 그 처자까지 연좌되지 않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문왕의 애민愛民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산이 비록 컸으나 백성들이 작게 여겼던 것입니다.
만약 영제가 질문을 했던 사람이 충성스럽고 어질었다면 틀림없이 “문왕의 인정仁政을 폐하께서 모두 실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시겠다면, 우선 애민愛民을 시급한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봉양하는 것은 천천히 생각하소서.”라고 말했을 것이니,
이와 같이 했다면 영제에게 보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임지와 악송 두 신하는 도리어 옛 글의 뜻을 제멋대로 인용함으로써 자기 임금의 환심을 샀으니, 이른바 ‘임금의 악을 미리 유도하는’ 자입니다.
영제의 어리석음에 두 신하의 아첨이 보태졌으니, 영제가 마침내 재앙과 실패를 부른 것이 당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