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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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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8-13-나(按)
按 顯之此擧 又以文己過而揜衆言이라
旣殺 亦敎之以擧하고
竝見郞‧從官하여 展盡其意하여 使天下 知不以言罪下라하니 姦邪之臣巧於緣飾 大抵如此
宗之하여 遂以竊國하니 然則顯之用志 豈淺淺哉리잇고


原注
18-13-나()
[신안臣按] 석현石顯의 이 행동은 또 이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꾸며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가린 것이었습니다. 후에 왕봉王鳳왕장王章을 죽인 뒤에 두흠杜欽 역시 왕봉으로 하여금 왕장의 일에 대해 직언直言하고 극간極諫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아울러 낭관郎官속관屬官들을 불러 그 의미를 명백하게 설명함으로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왕장이 말 때문에 죄를 받아 하옥되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간사한 신하가 잘못을 꾸미는 데 뛰어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역적 왕망王莽이 이를 본받아서 마침내 나라를 훔쳤으니, 그렇다면 석현石顯의 마음 씀씀이가 어찌 얕은 것이었겠습니까.


역주
역주1 王鳳……罪下 : 자세한 내용이 《漢書》 卷60 〈杜周傳 欽〉에 보인다.
역주2 王鳳 : ?~기원전 22. 孝元皇后 王政君의 오빠이다. 아버지 王禁이 죽은 뒤 그 작위를 이어받아 陽平侯가 되고 成帝가 즉위한 뒤 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 등을 역임하였다. 다른 세 형제, 즉 王音, 王商, 王根과 함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일찍이 병이 났을 때 조카인 王莽이 허리띠를 풀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자 크게 감동을 받고 누이인 왕정군에게 자신이 죽은 뒤 왕망을 잘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여 왕망 정권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역주3 : 대전본에는 ‘玉’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4 王章 : ?~기원전 24. 자는 仲卿이며 지금의 산동성 泰安 남쪽의 泰山郡 鉅平 사람이다. 젊었을 때 솜이불도 없을 정도로 집이 가난하였다. 원제 때 左曹中郞將이 되었으며 成帝 때 諫大夫가 되어 直諫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王鳳이 권력을 전횡하자 京兆尹이었던 왕장은 소를 올려 자신을 천거해준 왕봉을 멀리할 것을 간하였다. 성제가 왕장의 상소에 감동하여 왕봉을 파직시키려고 하자, 이를 안 왕봉이 杜欽의 계책을 써서 소를 올려 사죄하고 사직을 청하였다. 그 말이 매우 구슬프고 태후 역시 울면서 단식하자, 성제는 차마 왕봉을 파직하지 못하고 다시 일을 보도록 하고 도리어 왕장의 상소 내용을 꼬투리 잡아 尙書로 하여금 경조윤 왕장을 탄핵하게 하였다. 왕장은 이 일로 大逆罪로 하옥되어 죽었다. 《한서》 권76에 列傳이 있다. 《漢書 卷76 王章列傳, 卷98 元后傳》 《資治通鑑 卷30 成帝 上之上 陽朔 元年》
역주5 杜欽 : ?~?. 자는 子夏로 杜延年(?~기원전 52)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좋아하여 재능으로 京師에 알려졌으나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관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王鳳이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구할 때 왕봉의 아버지 王禁이 두흠의 형인 杜緩과 교분이 있어 두흠이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추천하여 武庫令으로 삼았다. 왕장이 죽은 뒤 사람들이 왕봉을 비난하자 왕봉을 두둔하여, 왕장이 실은 죄가 있어 죽은 것인데도 천하 사람들이 이를 모르고 그가 말한 것 때문에 죽었다고 비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봉을 위해 계책을 내어, 왕장의 일로 직간한 사람을 천거하고 현직 近衛 郎官과 왕봉의 屬官들로 하여금 직언을 하도록 함으로써 왕봉이 상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님을 밝히도록 하였다. 수를 모두 누리고 죽었다. 《資治通鑑 卷30 成帝 上之上 陽朔 元年》
역주6 直言極諫 : 漢代에 인재를 추천하는 名目의 하나이다. 漢代의 인재 등용 방법은 크게 察擧와 徵辟으로 구분할 수 있다. ‘찰거’는 또 ‘薦擧’라고도 한다. 三公九卿과 지방의 郡國守相 등 고위 관원을 등용하는 방법으로, 才德이 뛰어난 평민이나 하급 관리를 조정에 천거하였다. 일정한 시기가 없었고, 일식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황제가 조정의 백관과 지방 군국에 詔令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찰거의 名目은 매우 많아, 예를 들면 賢良方正, 賢良問學, 孝悌力田, 孝廉, 直言極諫 등으로 천거하였다. 이렇게 천거된 사람은 먼저 1년의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식으로 관직을 얻었는데, 만일 이 사람이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면 추천을 한 사람도 함께 처벌을 받았다. ‘징벽’은 황제가 인재를 초빙하여 관리에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대체로 덕망이 높고 학식 넓으며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을 부르는데, 예를 들면 夏侯勝을 禮에 뛰어나다고 하여 博士로 부른 것이나, 疏廣을 《춘추》에 뛰어나다고 하여 박사로 부른 것이 이러한 경우이다. 중앙이나 지방 관부에서는 또 자체적으로 屬吏를 불러 임명할 수 있었다. 《陰法魯‧許樹安, 中國古代文化史(3), 北京:北京大學出版社, 2005, 324~326쪽》
역주7 賊莽 : 漢나라의 정권을 찬탈하고 新나라를 건국한 王莽(기원전 45~23, 재위 8~23)을 가리킨다. 왕망의 자는 巨君이며, 산동성 濟南 章丘 사람이다. 孝元皇后 王政君의 조카이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賢者에게 禮로 대하고 자신을 낮추어 朝野에 명망이 높았다. 당시 혼란한 정국을 보고 古禮를 회복한다는 기치 아래 새로운 왕조를 건립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것을 ‘王莽改制’라고 한다. 地皇 4년(23)에 훗날의 更始帝 劉玄(?~25, 재위 23~25)의 군대가 長安으로 쳐들어왔을 때 亂軍의 손에 죽었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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