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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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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侍中‧尙書令‧車騎將軍 寵任用事注+文帝, 魏宰相司馬昭也. 封晉王, 後追諡爲帝. 賈充爲昭弑魏帝髦, 以成晉簒.러니 爲太子 頗有力注+武帝, 司馬昭之子, 簒魏爲天子.이라 故益有寵於帝러라
18-15-가
晉나라의 侍中‧尙書令‧車騎將軍 賈充이 文帝 때부터 총애를 받아 중용되어 권력을 휘둘렀는데,注+‘文帝’는 魏나라의 재상 司馬昭이다. 晉王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文帝로 追諡되었다. 賈充이 사마소를 위하여 魏나라 황제 曹髦를 시해하여 晉나라의 찬탈을 이루어주었다. 武帝가 태자로 있을 때 가충이 공로가 컸기注+‘武帝’는 사마소의 아들이다. 魏나라를 찬탈하여 천자가 되었다. 때문에 무제에게 더욱 총애를 받았다.
爲人 巧諂하여 으로 相爲黨友하니 朝野 惡之하더라
가충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처리할 때 아첨에 능하여 太尉 荀顗‧侍中 荀勗‧中書監 馮紞과 당여가 되자 朝野가 미워하였다.
泰始中 問侍中
楷以方今得失한대 對曰 陛下 受命 四海 承風호대 所以未比德於堯‧舜者 但以賈充之徒 尙在朝爾
泰始 연간(265~274)에 武帝가 시중 裵楷에게 時政의 문제점을 묻자 배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천명을 받으시자 사해가 감화되었지만 덕이 堯임금과 舜임금에 비견되지 못하는 것은 단지 賈充의 무리가 아직 조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宜引天下賢人하사 共弘政道 不宜示人以私니이다 侍中 皆與充不協이러니
의당 천하의 賢人을 초빙하여 그들과 함께 정사의 公道를 널리 펴셔야 할 것이니, 私道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侍中 任愷와 庾純이 모두 가충과 화목하지 못하였는데,
欲解其近職하여 乃薦愷忠貞하니 宜在東宮이라한대 以愷爲太子少傅而侍中 如故러라
가충이 무제를 가까이 모시는 그들의 직임을 벗기고자 마침내 임개가 충성스럽고 곧으니 동궁을 보필하기에 알맞다고 추천하였다. 무제가 임개를 太子少傅로 삼았으나 시중의 직책은 그대로 맡도록 하였다.
하니 以爲憂어시늘 曰 宜得威望重臣有智略者하여 以鎭撫니이다
그때 禿髮樹機能이 秦州와 雍州를 어지럽혔는데, 武帝가 이를 근심하자 任愷가 아뢰었다. “의당 위엄과 명망이 있는 重臣으로 지략이 있는 자를 찾아 이 지역들을 진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曰 誰可者 因薦充하고 亦稱之한대하다
무제가 말하였다. “누가 좋겠는가?” 임개가 이로 인해 賈充을 추천하고 庾純 역시 가충을 거론하자, 마침내 가충을 都督秦涼二州軍事로 삼았다.
이러니 私問計於荀勗한대
가충이 장차 부임지로 떠나려 할 때 공경대신들이 夕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가충이 은밀히 荀勗에게 계책을 묻자
曰 是行 辭之實難이라 獨有結婚太子라야 可不辭而留矣리니 請言之호리라
순욱이 말하였다. “이번 걸음은 사임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오직 태자와 혼인을 맺는 것만이 사양하지 않고서도 京師에 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제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因謂馮紞曰 賈公 遠去 吾輩 失勢矣 婚尙未定하니 何不勸帝納賈公之女乎 亦然之하더라
이어 馮紞에게 말하였다. “賈公께서 멀리 떠나시면 우리들이 세력을 잃게 됩니다. 태자가 아직 혼사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폐하에게 가공의 여식을 맞아들이라고 권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풍담 역시 옳게 여겼다.
將納注+瓘, 晉三公.하여 爲太子妃러니 充妻郭槐左右하여 使后說帝하여 求納其女하고
당초에 武帝는 衛瓘의 여식을 맞이하여注+‘衛瓘’은 晉나라의 三公이다. 태자비로 삼고자 하였는데, 賈充의 처 郭槐가 楊황후의 주위 사람들에게 뇌물을 써서 양황후로 하여금 무제를 설득하여 자신의 여식을 태자비로 맞아줄 것을 청하였다.
荀顗等 皆稱 絶美하고 且有才德이라한대 遂從之하사 하시다
그리고 荀顗 등이 모두 가충의 여식이 절세미인일 뿐 아니라 재주와 덕이 있다고 칭찬하자, 무제가 마침내 이를 따라 가충을 그대로 경사에 남게 하고 다시 본래의 관직에 있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18-15-가 : 《資治通鑑》 卷79 〈晉紀1 武帝 上之上〉 泰始 7년(271) 5월, 7월, 11월 조에 보인다.
역주2 賈充 : 217~282. 삼국시대 魏晉 교체기 때의 重臣이다. 자는 公閭이며 지금의 산서성 襄汾 동북쪽에 있었던 平陽 襄陵 사람이다. 曹魏의 건국을 도왔던 賈逵(174~228)의 아들이며 西晉의 개국 공신이다. 魏나라 제4대 임금 高貴鄕公 曹髦(241~260, 재위 254~260)가 당시 재상이었던 司馬昭를 공격하자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맞아 싸웠는데, 敗色이 짙을 무렵 향후의 행동을 묻는 太子舍人 成濟에게 사마소가 오늘을 위해 자신들을 길러주었으니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느냐고 대답하여 성제를 독려하였다. 이에 성제가 고귀향공을 시해하였다. 뒤에 두 딸을 司馬炎(236~290)의 아우인 司馬攸와 차자인 司馬衷에게 출가시켜 사마씨와 인척을 맺으면서 더욱 현달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晉나라가 건국된 뒤 車騎將軍, 散騎常侍, 尙書僕射에 보임되었으며, 司空, 太尉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魯郡公에 봉해졌다. 사후에 太宰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武’이다. 열전이 《晉書》 권40에 있다.
역주3 文帝 : 司馬昭(211~265)로, 삼국시대 曹魏의 權臣이다. 자는 子上이며 지금의 하남성 溫縣인 河內 溫縣 사람이다. 西晉의 개국 황제인 武帝 司馬炎의 아버지이다.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新城鄕侯에 봉해졌으며, 高貴鄕公 曹髦 때에는 형인 司馬師를 이어서 大將軍이 되어 國政을 천단하였다. 魏 元帝 景元 4년(263)에 鍾會‧鄧艾‧諸葛緖와 함께 蜀을 멸망시키고 晉公에 봉해지고, 咸熙 원년(264)에 晉王에 加封되었으며, 이듬해에 病死하였다. 그가 죽고 몇 달 뒤에 아들 司馬炎이 西晉을 개국하고 文帝로 追諡하였다. 廟號는 太祖이다.
역주4 武帝 : 司馬炎(236~290, 재위 265~290)으로, 西晉의 개국 황제이다. 자는 安世이며 지금의 하남성 溫縣인 河內 溫縣 사람이다. 司馬懿(179~251)의 손자이자 司馬昭의 적장자이다. 시호는 武皇帝이며, 묘호는 世祖이다. 265년에 아버지인 사마소의 작위를 이어받아 晉王이 된 몇 달 뒤 魏 元帝 曹奐(246~302, 재위 260~265)을 압박하여 선위를 받아 晉나라를 건국하고 수도를 洛陽으로 정하였다. 280년에 吳나라를 멸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 太康之治를 이루었다. 290년에 病死하였다.
역주5 太尉 : 관직명이다. 삼국시대 때 兵獄을 관장하였으며 大司馬, 大將軍, 司徒, 司空과 함께 五府로 불렸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諸公의 하나로 대신의 虛銜이었다. 반드시 다른 實職을 겸해야 실권이 있었다.
역주6 荀顗 : ?~274. 西晉의 개국 공신이다. 자는 景倩이며 지금의 하남성 許昌市인 潁川 潁陰 사람이다. 후한 말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曹操를 도운 荀彧(163~212)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太尉, 侍中 등을 역임하고 臨淮郡公에 봉해졌다. 열전이 《晉書》 권39에 있다.
역주7 侍中 : 관직명이다. 후한 獻帝 이후 덕망이 높고 학식이 많은 儒者로 충임되었다. 晉나라에 와서 門下省의 장관이 되어 주로 간쟁을 담당하고 황제의 자문에 응하였다.
역주8 荀勗 : ?~289. 西晉의 개국 공신이자 音律學家, 文學家, 藏書家이다. 자는 公曾이며 지금의 하남성 許昌市인 潁川 潁陰 사람이다. 荀彧의 숙부이자 후한 말의 경학가인 荀爽(128~190)의 증손자이다. 대장군 司馬昭의 記室이 되어 자주 계책을 진달하여 깊은 신임을 얻었다. 晉나라가 건국된 뒤 濟北郡侯에 봉해졌으며, 中書監, 加侍中, 領著作에 임명되었다. 사후에 司徒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成’이다. ‘侍中’은 관직명으로 후한 獻帝 이후 덕망이 높고 학식이 많은 儒者로 충임되었다. 晉나라에 와서 門下省의 장관이 되어 주로 간쟁을 담당하고 황제의 자문에 응하였다. 열전이 《晉書》 卷39에 있다.
역주9 中書監 : 관직명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재상에 해당한다.
역주10 馮紞 : ?~286. 西晉의 奸臣이다. 자는 少冑이며 지금의 하북성 冀縣인 安平 사람이다. 魏郡 太守, 步兵校尉, 越騎校尉, 左衛將軍, 御史中丞, 侍中, 散騎常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病死하였다. 열전이 《晉書》 卷39에 있다.
역주11 裵楷 : 237~291. 魏晉 교체기의 대신이자 名士이다. 자는 叔則이며 지금의 산서성 聞喜縣인 河東 聞喜 사람이다. 西晉의 개국 공신인 裴秀(224~271)의 사촌 동생이다. 처음 鍾會의 천거로 司馬昭에게 발탁되어 相國掾이 되었으며 이후 賈充 등과 함께 《晉律》을 제정하였다. 吏部郞, 散騎常侍, 河內 太守, 右軍將軍, 侍中, 太子少師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시호는 ‘元’이다. 《老子》와 《易經》에 뛰어났다. 열전이 《晉書》 권35에 있다.
역주12 : 대전본‧사고본에는 ‘裴’로 되어 있다.
역주13 任愷 : 223~284. 자는 元褒이며 지금의 산동성 博興縣 동남쪽에 있던 安樂 博昌 사람이다. 魏 明帝 曹叡의 딸 齊國長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中書侍郞, 員外散騎常侍를 역임하였다. 晉나라가 건립된 뒤 門下省 侍中에 임명되고 昌國縣侯에 봉해졌다. 근면과 신중함으로 朝野의 칭송을 받았으나 寵臣 賈充과 반목하며 험난한 벼슬 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시호는 ‘元’이다. 열전이 《晉書》 卷45에 있다.
역주14 庾純 : ?~?. 자는 謀甫이며 潁川 鄢陵 사람이다. 박학다식하고 道義가 있어 당시 儒宗으로 칭송되었다. 黃門侍郞, 中郞令, 河南尹 등을 역임하였다. 賈充의 전횡을 보다 못해 “천하가 흉흉한 것은 바로 당신 한 사람 때문입니다.[天下凶凶 由爾一人]”라고 하였다가 中護軍 羊琇(236~282)와 侍中 王濟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다. 가충이 노하여 사직을 청하자 유순 역시 두려움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면직되었다. 후에 少府에 임명되었다. 열전이 《晉書》 卷50에 있다.
역주15 樹機能亂秦雍 : ‘樹機能’은 禿髮樹機能(?~280)으로, 西晉 시기 禿髮鮮卑의 수령이다. 胡族과 漢族이 뒤섞여 사는 秦州에 큰 가뭄이 든 데다 晉나라에서 秦州 刺史로 파견한 胡烈이 폭정을 행하자 수기능은 泰始 6년(270)에 부족민을 이끌고 일어나 호열을 죽이고, 이어서 氐‧羌‧匈奴 등 다른 胡族과 연합하여 晉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호열에 뒤이어 秦州 刺史로 파견된 牽弘‧楊欣을 죽이고 涼州 등을 점령하여 한동안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켰으나, 晉 武帝 咸寧 3년(277) 12월에 晉나라 장군 馬隆에게 패하여 피살되었다. ‘秦州’는 지금의 감숙성 동부이며 ‘雍州’는 지금의 섬서성 일대이다.
역주16 以充……軍事 : 晉 武帝 泰始 7년(271) 7월 20일 계유일의 일이다.
역주17 充將……陽亭 : 진 무제 태시 7년(271) 11월의 일이다. ‘夕陽亭’은 洛陽城 서쪽에 있었다.
역주18 太子 : 진 무제의 아들 司馬衷(263~306, 재위 290~307)을 가리킨다. 西晉 제2대 황제인 惠帝이다.
역주19 衛瓘 : 220~291. 西晉의 重臣으로 書法家이다. 자는 伯玉이며 지금의 산서성 夏縣 북쪽에 있던 河東 安邑 사람이다. 삼국시대 魏나라에서 尙書郞, 廷尉卿을 역임하였다. 鍾會(225~264)‧鄧艾(197~264)와 伐蜀 전쟁에 참여하였고, 蜀漢이 멸망(263)한 뒤에는 종회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어서 등애 부자를 살해하였다. 京師에 돌아온 뒤 督徐州諸軍事‧鎭東將軍에 임명되고 菑陽侯에 봉해졌다. 서진 건립 후 靑州 刺史, 幽州 刺史, 征東大將軍, 尙書令, 侍中, 司空, 太子少傅 등을 역임하였다. 晉 惠帝(259~307, 재위 290~307)가 즉위한 뒤 賈皇后와 대립하여 결국 조서를 위조한 가황후에게 살해되었다.
역주20 楊后 : 晉 武帝 司馬炎의 황후 楊豔(양염, 238~274)이다. 자는 瓊芝이며 지금의 섬서성 華陰縣인 弘農 華陰 사람이다. 시호는 武元皇后이다.
역주21 充女 : 賈南風(257~300)이다. 賈充의 딸로, 晉 惠帝 司馬衷의 황후가 되었다. 어릴 때의 이름은 峕(시)이며 지금의 산서성 襄汾 동북쪽의 平陽 襄陵 사람이다. 혜제가 즉위한 뒤 권력을 전횡하여 西晉 시기 八王之亂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뒤에 晉 武帝 司馬炎의 삼촌인 趙王 司馬倫(?~301)에게 피살되었다.
역주22 留充復居舊任 : 이때 마침 京師에 큰 눈이 내려 평지에 두 자나 쌓이자 군대가 출발을 할 수 없었는데, 얼마 뒤에 태자의 혼인이 있게 되자 가충은 마침내 서쪽으로 길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武帝가 賈充에게 조서를 내려 본래의 관직에 있도록 한 것이다. 《晉書 卷40 賈充列傳》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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