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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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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擁朱爲主, 泚遂稱帝.이어늘 出奉天注+奉天, 城名.하시니이러라 自河北還하여 數破賊하니 解去러니
20-11-가
涇原의 군대가 난을 일으키자注+涇原의 군대가 난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고 朱泚를 옹립하여 원수로 삼자, 주자가 마침내 稱帝하였다. 德宗이 이를 피해 奉天으로 나가니注+奉天은 城의 이름이다. 盧杞가 수종하였다. 李懷光이 河北에서 돌아와 누차 적을 격파하자 朱泚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謂王翃‧趙贊注+二人皆杞黨, 翃爲京兆尹, 贊.曰 聞懷光 嘗斥宰相 不能謀하고 度支 賦歛重而京兆 刻軍賜하니 宜誅之하여 以謝天下라하니
어떤 사람이 王翃과 趙贊에게注+두 사람은 모두 盧杞의 당여로, 王翃은 京兆尹이었고 趙贊은 判度支였다. 말하였다. “듣자하니 이회광은 예전에, 재상(盧杞)은 계모에 능하지 못하고 判度支(趙贊)는 세금을 무겁게 거두며 京兆尹(王翃)은 군사들에게 내리는 상이 각박하니, 이들을 주벌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논척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方懷光 有功이라 上必聽用其言하시리니 公等 殆矣 二人 以白杞한대
지금 이회광이 공을 세웠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반드시 그의 말을 들어주실 것이니, 공들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 말을 盧杞에게 전하였다.
하여 卽譎帝曰 懷光 勳在宗社 憚之破膽하나니 今因其威하면 可一擧而定이니
盧杞가 두려워서 즉시 덕종을 속여 말하였다. “李懷光은 宗廟社稷에 남을 공을 세웠습니다. 반란군이 두려워서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떨고 있으니 지금 그 위세를 이용한다면 일거에 난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若許來朝則犒賜留連 賊得裒整殘餘하여 爲完守計하리니 圖之實難이라 不如平京師 破竹之勢也니이다
만약 이회광이 조회 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犒饋하고 상을 내리느라 머물며 지체하는 사이에 반란군은 잔당을 모아 재정비하여 수비를 공고히 하는 계책을 세우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저들을 도모하기가 실로 어렵게 됩니다. 이 勝氣를 타고 京師를 평정하도록 하는 것이 파죽지세인 것만 못합니다.”
然之하사 詔懷光無朝하고 進屯하신대 懷光 自以千里赴難하여 有大功호대 爲姦臣沮間하여 不一見天子라하여
덕종이 옳다고 여겨서 이회광에게 조서를 내려 입조하지 말고 진군하여 便橋에 주둔하라고 하였다. 이회광은 자신이 난을 구원하러 천 리 길을 달려와 큰 공을 세웠는데 간신에게 저지되어 천자를 한 번 알현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內怏怏無所發하여하여 因暴言杞等罪惡한대 士議譁沸하여 皆指目杞어늘 始悟하사 하시다
그리하여 안에 쌓인 불쾌한 심정을 분출할 곳이 없자 마침내 반란을 모의하고 이어서 노기 등의 죄악을 공공연하게 내놓고 말하였다. 사대부의 여론이 들끓어 모두들 노기를 지목하자, 덕종이 비로소 깨닫고 노기를 新州司馬로 좌천시켰다.
역주
역주1 20-11-가 : 《新唐書》 권223下 〈姦臣列傳 盧杞〉, 《資治通鑑》 권229 〈唐紀45 德宗4〉 建中 4년(783) 11월‧12월 조에 보인다.
역주2 涇師亂 : 涇原兵變을 이른다. 奉天之難이라고도 한다. ‘경원’은 지금의 감숙성과 寧夏回族自治區에 설치하였던 당나라의 方鎭 이름이다. 唐 德宗 建中 4년(783)에 涇原의 군사들이 포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변란이다. 건중 2년(781)에 成德‧魏博‧淄靑 등의 절도사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淮西節度使 李希烈이 명을 받고 토벌하러 가서 반군을 격파한 뒤에 지금의 섬서성에 있는 襄陽을 거점으로 도리어 반란을 일으키고 天下都元帥‧太尉‧建興王으로 칭하였다. 건중 4년 8월에 이희열이 양양에 있는 襄城을 공격하자 덕종은 경원의 군사를 움직여 양성의 포위를 풀도록 하였는데, 10월에 경원절도사 姚令言(?~784)이 명을 받고 군사 5천 명을 끌고 달려왔으나 京兆尹 王翃이 犒饋하러 와서 거친 밥으로 대접하자 이에 분노한 군사들은 京師의 창고를 습격하여 재물을 탈취하였다. 덕종이 환관을 보내 군사들에게 각각 비단 두 필씩을 하사하자 더욱 분노한 군사들은 궁궐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으며 덕종은 황망히 궁을 빠져나가 지금의 瀋陽市인 奉天으로 피난 갔다. 반군이 朱泚(742~784)를 원수로 삼자 주자는 황제가 되어 봉천을 공격하였다가 朔方節度使 李懷光(729~785)에게 격파되었다. 이에 주자는 長安으로 퇴각하였는데, 덕종 興元 원년(784) 5월에 장수 李晟이 장안을 수복하자 彭原으로 달아났으나 곧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덕종은 동년 7월에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환관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다. 20-8-가 ‘朱泚’ 주석 참조.
역주3 涇原……稱帝 : 20-5-가 ‘德宗’ 주석, 20-8-가 ‘朱泚’ 주석 참조.
역주4 : 대전본에는 ‘杞’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5 : 사고본에는 ‘關’으로 되어 있다.
역주6 : 대전본에는 ‘佌’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7 李懷光 : 729~785. 唐 德宗 때의 將領이다. 渤海靺鞨人으로 본래의 성은 茹이나 그 선조가 幽州로 옮겨와서 戰功을 세워 李氏 성을 하사받았다. 젊어서부터 從軍하여 軍功으로 都虞侯에 봉해졌다. 덕종 초기에 檢校 刑部尙書, 寧州節度使, 慶州節度使, 朔方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덕종 建中 4년(783)에 涇原兵變이 일어나자 군대를 끌고 奉天으로 달려가 한 달여 동안 덕종을 포위하던 朱泚의 반군을 격파하여 副元帥‧中書令에 임명되었으나, 덕종이 盧杞 등의 말을 따라 入朝하지 못하도록 하자 반대로 朱泚의 반군과 연합하여 덕종을 압박하여 漢中으로 달아나도록 하였다. 덕종 貞元 원년(785)에 패전하여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역주8 判度支 : 관직명이다. 度支는 본래 戶部 소속의 4司 중 하나로,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관장하였다. 당나라 중기 이후 軍事가 빈번히 일어나자 대신을 파견하여 전적으로 이를 맡게 하였으며, 뒤에 호부에서 독립하여 度支使, 知度支事, 句當度支使로 불렀다. 判戶部, 鹽鐵轉運使와 함께 그 관서를 三司라고 한다.
역주9 : 대전본에는 ‘席’으로 되어 있다. 《新唐書》 권223下 〈姦臣列傳 盧杞〉에도 ‘席’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便 : 《新唐書》 권223下 〈姦臣列傳 盧杞〉에는 ‘使’로 되어 있다.
역주11 便橋 : 便門橋이다. 長安城 서북쪽 渭水 위의 다리 이름이다. 漢 武帝 建元 3년(기원전 138)에 건립하였다. 長安城의 西門을 便門이라고 하는데, 다리의 북쪽이 이 문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이 다리 이름을 便橋라고 하였다 한다.
역주12 謀反 : 당나라 형률에 따르면 10惡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大罪로, 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을 도모한 죄이다. 10악 중 종묘‧山陵‧궁궐을 훼손할 것을 도모한 ‘謀大逆’이나, 나라를 배신하고 僞朝를 따를 것을 도모한 ‘謀叛’과는 구별된다. 《通典 卷165 刑3 刑制下》
역주13 貶爲新州司馬 : 德宗 建中 4년(783) 12월 19일 壬戌日의 일이다. ‘新州’는 州 이름으로, 治所는 지금의 광동성 新興縣에 있었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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