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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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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以來 任蕃將者 如阿史那社尒‧契苾何力 皆以忠力으로하나 然猶不爲上將하고 皆大臣 摠制之
19-16-가
貞觀(627~649) 연간 이후로 번장에 임명한 자로써 阿史那社尒‧契苾何力과 같은 자들이 모두 竭忠盡力으로 애썼지만, 오히려 上將으로 삼지 않고 모두 대신이 이들을 총괄하여 제어하였다.
故上有餘權하여 以制於下러니 先天‧開元中注+. 自節度使 入相天子하니
이 때문에 조정에는 충분한 권한이 있어서 관할 하의 절도사를 제어하였다. 그런데 先天(712~713)‧開元(713~741) 연간에는注+모두 明皇(玄宗)의 연호이다. 예컨대 薛訥‧郭元振‧張說 등과 같은 자들이 절도사로부터 조정에 들어와 천자를 보좌하게 되었다.
疾儒臣 以方略으로 積邊勞且大任하여 欲杜其本以久其權하여 卽說帝曰
李林甫는 儒臣이 책략으로 변경 방비의 공로를 쌓고 장차 중용되는 것을 싫어하여 그 근원을 막아 자신의 권세를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곧 현종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以陛下雄 國家 富彊而夷狄未滅者 由文吏爲將하여 憚矢石不身先이라 不如用蕃將이니
“폐하의 뛰어난 재능으로 국가가 부강한데도 夷狄이 아직 멸망되지 않은 것은 문신이 장수가 되어 矢石을 두려워하여 몸소 앞장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장을 임용하는 것만 못합니다.
生而雄하여 養馬上長行陳하니 天然性也 若陛下 感而用之하사 하시면 夷狄 不足圖也리이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용맹하여 말 위에서 자라서 행군과 포진에 뛰어나니 타고난 천성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감화시켜 그들을 임용하여 사력을 다하도록 하신다면 이적은 도모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然之하사으로 代林甫領節度而擢‧高仙芝‧哥舒翰等하여 專爲大將하니 林甫 利其虜也 無入相之資
현종이 이 말을 옳게 여겨서 이를 계기로 安思順이 이임보의 영삭방절도사의 직임을 대신하게 하였다. 安祿山‧高仙芝‧哥舒翰 등을 발탁하여 대장의 직임을 혼자서 담당하게 하였다.
故祿山 得專三道勁兵處하여 十四年不徙호대 天子 安林甫策하사 不疑也러시니 卒稱兵蕩覆天下하여 王室 遂微하니라
이임보는 번장들이 조정으로 들어와 재상을 맡을 자격이 없는 것을 이롭게 여겼다. 이 때문에 안녹산이 3道 지역의 강군을 혼자서 관장하여 14년 동안 교체되지 않았는데도 현종은 이임보의 계책을 편안하게 여겨 의심하지 않았으니, 결국 안녹산이 거병하여 천하를 뒤엎어 당나라가 마침내 미약해졌다.
역주
역주1 19-16-가 : 《新唐書》 卷223上 〈姦臣列傳 李林甫〉에 보인다.
역주2 薛訥 : 649~720. 당의 무장이다. 絳州 龍門 사람이다. 부친은 薛仁貴이다. 처음에 藍田令이 되었다. 그 후에 돌궐이 하북을 침입하자 左武威衛大將軍‧安東道 經略에 임명되었다. 이후 幽州 都督 兼安東都護‧幷州大都督府 長史 등을 역임하며 오랫동안 邊將으로 임직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개원 2년(714) 6월에 杜賓客 등과 군대 2만을 이끌고 거란을 토벌해 灤河에서 대패했지만 10월에 吐藩과 洮水 부근에서 전투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左羽林軍大將軍에 보임되었으며 平陽郡公에 봉해졌다. 또 涼州鎭軍大總管에 임명되었다가 나이가 들어 致仕했다.
역주3 郭元振 : 656~713. 唐代의 宰相이다. 본명은 震이고, 자는 顯이다. 魏州 貴鄕 사람이다. 高宗 咸亨 연간에 進士가 되어 通泉 縣尉가 되었다. 則天武后에게 右武衛鎧曹를 제수받아 토번에 사신으로 가서 이간한 공으로 主客郎中이 되었다. 大足 원년(701)에 涼州 都督‧隴右諸軍州大使로 임명되었다. 이후 太僕卿이 되고 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睿宗 景雲 2년(711)에 태복경‧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다. 太平公主를 진압한 공으로 代國公이 되었다. 이후 兼御史大夫 持節 朔方道大總管으로 돌궐에 대비했다. 죄를 범해 神州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饒州 司馬로 기용되나 귀경 중에 죽었다. 사후에 太子少保로 추증되었다.
역주4 張說 : 667~731. 唐 玄宗 때의 宰相이다. 자는 道濟 또는 說之이다. 河南 洛陽 사람이다. 측천무후 때 對策賢良方正으로 급제하여 太子校書郞에 제수되었고 《三敎珠英》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鳳閣舍人으로 발탁되었으나 張易之가 魏元忠을 무고하자 변호하다가 欽州로 유배되었다. 中宗 즉위 후에 兵部 侍郞‧弘文館 學士가 되었다. 景雲 2년(711)에 中書侍郞‧同平章事‧兼修國史가 되었다. 현종 즉위 후에 태평공주 토벌의 공으로 중서령에 제수되고 燕國公에 봉해졌다. 開元 7년(719)에 檢校幷州大都督府長史‧兼天平軍大使가 되어 同羅 등을 위무하여 북변을 안정시켰다. 이후 兵部 尙書, 朔方軍 節度使, 右丞相 兼中書令, 集賢院學士知院事 등을 역임했다가 宇文融의 括戶에 반대해 사직하였다. 개원 18년(730)에 다시 尙書左丞相으로 복직했다. 문장에 능해 당시 조정의 주요 조서와 문서를 모두 작성해 許國公 蘇頲과 함께 燕許大手筆로 불렸다. 저서로는 《張燕公集》이 있다.
역주5 : 대전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역주6 : 대전본에는 ‘林’으로 되어 있다.
역주7 使必 : 대전본‧사고본에는 ‘必先’으로 되어 있다.
역주8 以安……節度 : 李林甫는 天寶 10년(751)에 安西大都護‧朔方節度를 兼領하였고 얼마 안 되어 單于副大都護까지 겸임하였다. 천보 11년(752)에 이임보의 양아들인 朔方節度副使 李獻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임보는 삭방절도사의 체직을 청하고 安思順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역주9 安思順 : 695?~756. 西域 安國(Bukhara) 사람으로, 돌궐족이다. 부친은 右羽林大將軍 安波注이고, 안녹산의 堂兄이었다. 唐 玄宗 開元 2년(714) 洮州 刺史, 莫門軍使 등을 거쳐, 천보 6년(747)에 河西節度使가 되었고, 천보 9년(750)에 權知朔方節度使를 겸임하였다. 천보 10년(751)에 權知朔方節度使에서 체차되었다. 천보 11년(752) 3월에 朔方軍節度副使 李獻忠이 漠北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임보의 朔方節度使가 되었다. 일찍이 여러 차례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진언하였기에 천보 14년(755)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죽음을 면하고 호부 상서로 전직되었다. 평소에 哥舒翰과 반목하였는데, 천보 15년(756)에 안녹산과 내통했다는 가서한의 모함을 받아 賜死되었다.
역주10 安祿山 : 703~757. 營州 사람이다. 본성은 康이고 본명은 軋犖山이다. 모친인 阿史德氏가 安延偃에게 改嫁하여 安氏가 되었다고 전한다. 소그드인과 돌궐족의 혼혈로 추정된다. 6개 국어에 능하여 젊었을 때 營州에서 무역의 중개인인 互市牙朗을 맡았다고 한다. 幽州節度使 張守珪를 섬겨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開元 28년(740)에 營州都督‧平盧兵馬使가 되고, 天寶 원년(742)에 代理御史中丞‧平盧節度使가 되었다. 뇌물과 아첨에 능하여 玄宗과 楊貴妃의 신임을 얻었다. 천보 3년(744)에 范陽節度使를, 천보 10년(751)에 河東節度使를 겸임하였다. 楊國忠과 반목하였다. 천보 14년(755) 11월에 양국충을 주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여 12월에 洛陽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칭제건원하여 국호를 大燕, 帝號를 雄武皇帝, 연호를 聖武라고 하였다. 756년 6월에는 長安을 점령하였고 華北 일대를 거의 장악하였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屬下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애첩의 소생을 편애하여 安慶緖와 반목하였는데, 결국 肅宗 至德 2년(757)에 안경서에게 살해당했다.
역주11 皆明皇年號 : 사고본에는 ‘睿宗玄宗年號’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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