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文帝時
에 가 上疏曰 凡人之智
가 能見已然
이요 不能見將然
하나니 夫禮者
는 禁於將然之前而法者
는 禁於已然之後
라
是故法之所爲用
은 易見而禮之所爲
은 難知也
니이다 若夫慶賞
은 以勸善
이요 刑罰
은 以懲惡
이니
先王이 執此之政을 堅如金石하시며 行此之令을 信如四時하시며 據此之公을 無私如天地耳시니 豈顧不用哉리오마는
然而曰禮云禮云者
는 貴絶惡於未萌而起敎於微眇
하여 使民日遷善遠罪而不自知也
니이다賈誼
孔子
가 曰
訟乎
인저하시니 爲人主者
가 莫如先審取舍
니
取舍之極이 定於內而安危之萌이 應於外矣라 安者가 非一日而安也며 危者가 非一日而危也라
皆以積漸然이니 不可不察也니이다 人主之所積이 在其取舍하니
以禮義治之者는 積禮義하고 以刑罰治之者는 積刑罰이니 刑罰이 積而民怨背하고 禮義가 積而民和親하나니
故世主가 欲民之善은 同而所以使民善者가 或異하여 或道之以德敎하며 或敺之以法令하나니
道之以德敎者
는 德
洽而民氣樂
하고 敺之以法令者
는 法令極而民風哀
하나니 哀樂之感
은 禍福之應也
니이다
秦王之欲尊宗廟而安子孫
이 與湯‧武同
하나 然
湯‧武
는 廣大其德
하사 行六七百歲而弗失
하시고 秦王
은 治天下十餘歲
에 則大敗
하니
此는 亡他故矣라 湯‧武之定取舍가 審而秦王之定取舍가 不審矣니이다
夫天下는 大器也라 今人之置器가 置諸安處則安하고 置諸危處則危하나니
天下之情이 與器亡以異하니 在天子之所置之니이다 湯‧武는 置天下於仁‧義‧禮‧樂而德澤이 洽하여
禽獸草木이 廣裕하며 德被蠻貊四夷하여 累子孫數十世하니 此가 天下所共聞也요
秦王
은 天下於法令刑罰
하여 德澤
이 亡一有而怨毒
이 盈於世
하여 下
가 憎惡之如仇讎
하여 禍幾及身
하고 子孫
이 誅絶
하니
此
가 天下之所共見也
니 是
가 非
明效大驗邪
아 人之言
에 曰 聽言之道
가 必以其事觀之則言者
가 莫敢妄言
이라하니
今에 或言禮誼之不如法令하며 敎化之不如刑罰이라하나니 人主는 胡不引殷‧周‧秦事以觀之也잇고
25-6-가
한 문제漢 文帝 때 가의賈誼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무릇 사람의 지력智力은 이미 발생한 것은 알 수 있고 장차 발생할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무릇 예禮라는 것은 장차 발생하기 전에 금하는 것이고 법이라는 것은 이미 발생한 뒤에 금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법의 효용성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예가 발생시키는 효과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포상은 선을 권면하는 것이고 형벌은 악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역대의 훌륭한 군왕들은 이러한 정사를 집행하기를 금석金石과 같이 굳건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정령을 시행하기를 사계절의 운행이 어김이 없는 것처럼 미덥게 하였으며, 이러한 공정함을 지키기를 하늘과 땅처럼 사심이 없게 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포상과 형벌을 도리어 쓰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에 이르기를, 예에 이르기를’이라고 한 것은 아직 악이 싹트기 전에 악을 끊어버리고 일이 작고 미미할 때부터 교화를 시작하여 백성이 날마다 선으로 옮겨가고 죄를 멀리하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송사訟事를 심리審理하는 것은 내가 남과 같겠지만 기필코 송사하는 일이 없어지도록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 노릇 하는 것으로는 먼저 취사선택을 잘 살펴보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취사선택의 기준이 마음속에서 정해지고 나면 안정安定과 위망危亡의 싹이 밖에서 나오게 됩니다. 안정은 하루아침에 안정되는 것이 아니고 위망은 하루아침에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쌓는 것으로써 차츰차츰 그렇게 된 것이니 잘 살펴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군주가 쌓는 것은 취하고 버리는 데 달려 있습니다.
예의禮義로 다스리는 군주는 예의를 쌓는 것이고 형벌로써 다스리는 군주는 형벌을 쌓는 것이니, 형벌이 쌓이면 백성이 원망하고 등지며 예의가 쌓이면 백성이 화목하고 친해집니다.
그러므로 역대의 군주들이 백성이 선해지기를 바란 것은 같으나 백성이 선해지도록 한 방법은 간혹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군주는 인도하기를 덕과 교화로써 하고 어떤 군주는 몰아가기를 법제와 정령으로써 하였습니다.
인도하기를 덕과 교화로써 하는 경우에는 덕과 교화가 무젖어들어 백성의 기상이 화락하고, 몰아가기를 법제와 정령으로써 하는 경우에는 법제와 정령이 극에 달하면 백성의 기풍이 슬픕니다. 슬픔과 화락함의 감응은 화禍와 복福이 이에 따라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 시황秦 始皇이 종묘宗廟를 높이고 자손을 편안히 하고자 한 것은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탕왕과 무왕은 군왕으로서 덕을 크게 키워서 6, 7백 년이 지나도록 왕통王統을 잃지 않았고, 진 시황은 천하를 다스린 지 10여 년 만에 크게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탕왕과 무왕이 취하고 버릴 것을 확정한 것은 잘 살폈고, 진 시황이 취하고 버릴 것을 확정한 것은 잘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하는 중대한 기물입니다. 이제 사람이 기물을 둘 때는 안전한 곳에 놓아두면 기물이 안전하고, 위태로운 곳에 놓아두면 기물이 위태롭게 됩니다.
천하라는 이 물건을 두는 상황이 기물과 다를 것이 없으니 천자가 두는 장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천하를 다스리는 강령을 인仁‧의義‧예禮‧악樂에 두어서 덕택이 젖어들어서
금수禽獸와 초목草木이 번성하고 덕택이 사방의 오랑캐에까지 입혀져서 자손 수십 대를 이어갔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함께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진 시황秦 始皇은 천하를 다스리는 강령을 법령과 형벌에 두어서 덕택은 하나도 없고 원한만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원수처럼 그를 증오하여 화가 거의 자신에 미쳤고 자손까지 멸절되었으니,
이것은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함께 보아서 아는 바입니다. 이것이 매우 명확히 드러난 징험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말을 듣는 방법은 반드시 그가 한 일을 가지고서 살펴보면 말하는 자가 감히 허튼소리를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예의가 법령만 못하고 교화가 형벌만 못하다고 하는데, 군주께서는 어찌 은殷나라‧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일을 가지고 심사숙고하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