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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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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3-3-나1(胡)
先儒
先儒 胡宏이 말하였습니다.
賈之對 宜曰
“陸賈의 대답은 의당 다음과 같아야 했다.
‘폐하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말 위에서의 무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蓋陛下 本以寬大長者 하사 爲天下除하사대 所過하시며 하시고 財物 無所取하시며 婦女 無所幸하시며 하신대
폐하께서는 본래 관대한 長者로서 關中에 들어가라는 懷王의 명을 받아 천하를 위해 仁義를 해친 자를 제거하시되, 지나는 곳에서 노략질한 일이 없었으며, 秦나라의 항복한 왕 子嬰을 사면하고 재물을 취하는 일이 없었으며, 부녀자를 가까이하는 일이 없었으며, 세 조항의 법을 약속하셨습니다.
父老 唯恐陛下 不爲秦王하니 庶幾三代得天下之仁이요
그러자 秦나라의 父老들이 폐하께서 秦王이 되지 못하실까만 걱정하였으니, 이는 三代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仁에 가깝습니다.
原注
負約하여 王陛下於蜀‧漢이어늘 陛下 忍而就國하사爲相하사 養其民以致賢人하시고 收用巴‧蜀하사 하시며 어늘 陛下 擧軍縞素하사 告諸侯而伐之하시니
項王이 약속을 저버리고 폐하를 蜀과 漢中 지역에서 왕이 되게 하였는데, 폐하께서는 이를 참고 封國에 나아가서 蕭何를 재상으로 삼아 백성들을 길러 어진 인재들을 불러들이고 巴‧蜀을 거두어 써서 三秦을 도로 안정시켰으며, 項羽가 義帝를 살해하자 폐하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상복을 입고 제후들에게 고하여 항우를 정벌하셨습니다.
庶幾三代取天下之義
이는 三代가 천하를 취할 수 있었던 義에 가깝습니다.
原注
齷齪自用하시고 多大略하사 得英雄心하사‧任‧將하시니
잗달게 자신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큰 책략을 훌륭하게 여겨 영웅들의 마음을 얻어서, 張良을 스승으로 여기고 陳平을 임용하며 韓信을 장수로 삼으셨습니다.
庶幾堯‧舜‧禹‧湯‧文‧武知人之明이요
이는 堯임금‧舜임금‧禹王‧湯王‧文王‧武王이 인재를 알아보았던 명철함에 가깝습니다.
鎭撫百姓하시며 下令軍士하사 不幸死者 爲衣衾棺斂하여 轉送其家하시니
백성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졌으며,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그중에 불행히 죽은 자는 관리들로 하여금 옷과 홑이불로 염하여 관에 넣어서 그 집에 돌려보내도록 하셨습니다.
庶幾堯‧舜‧禹‧湯‧文‧武哀鰥寡‧恤孤獨之政이니
이는 요임금‧순임금‧우왕‧탕왕‧문왕‧무왕이 홀아비와 홀어미를 불쌍히 여기고 고아와 독거노인을 긍휼히 여겼던 정사에 가깝습니다.
此數者 陛下所以得天下也니이다
바로 이 몇 가지 요인이 폐하께서 천하를 얻으신 이유입니다.
今天下 已定하니 願陛下 退하시고 하사 使與張良‧及如臣者 共論所以承三代之宜하여 定一代大典하여 以幸天下하며 以詔萬世
이제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으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叔孫通을 물러나게 하고, 魯나라의 두 유생을 초빙하여 그들로 하여금 張良‧四皓 및 신과 같은 자와 함께 三代를 계승할 마땅한 방법을 함께 논의하여 一代의 大典을 제정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복되게 하고 만대에 고하소서.’
原注
使陸賈 有是對而漢祖 用其言이면 則必 有制하며 適庶 有辨하며 敎養子弟 有法하며 后‧夫人‧嬪‧婦 各得其所矣리니
만일 陸賈가 이러한 대답을 하고 漢 高祖가 그의 말을 따랐다면 필시 六宮은 엄격한 등급이 있었을 것이고 嫡庶는 구분이 있었을 것이며, 자제를 가르치고 키우는 것은 법도가 있었을 것이고 后‧夫人‧嬪‧婦는 각자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又安有 之皆不得其死哉
또 어찌 戚夫人이 人彘(인간 돼지)가 되고 趙王 劉如意‧淮陽王 劉友‧梁王 劉恢가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亂宮闈之醜 而呂氏 至於族滅하고 後世 世有外戚之禍哉리오
또 어찌 審食其가 宮闈를 어지럽히는 추태가 있었겠으며 呂氏가 멸족되는 지경에 이르고 후세에 대대로 외척의 화가 있었겠는가.
原注
則必制國 有法하여 이요 而伏羲‧神農‧黄帝‧堯‧舜‧禹‧湯‧文‧武及皐陶‧伊‧傅‧周‧呂之裔리며
그랬다면 필시 封國을 제정함에 법이 있어서 荊王 劉賈‧楚王 劉交‧代王 劉喜‧齊王 劉肥가 수십 縣에 분봉되지 않았을 것이고, 伏羲‧神農‧黄帝‧堯임금‧舜임금‧禹王‧湯王‧文王‧武王 및 皐陶‧伊尹‧傅說‧周公‧呂尙의 후예가 血食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則必體貌大臣하여 하며 不背叛矣리며
그랬다면 필시 대신을 禮로 대하여 蕭相國이 투옥되지 않았을 것이고, 黥布‧陳豨‧盧綰‧韓王 信이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則必不襲秦故‧尊君抑臣하여 而朝廷之上 制禮以道하여 하고 하며 而大臣 可以天下‧委六尺之孤矣리며
그랬다면 필시 秦나라의 일을 답습하지 않으며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여, 조정에서는 禮를 제정하여 인도해서 겸양은 높고 빛나며 임금의 권위는 지나치게 높지 않았을 것이며, 신하의 도가 위에서 행해져 하늘과 땅이 서로 사귀어 평안함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대신에게는 천하를 맡기고 6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原注
則必封建諸侯하여 藩垣屛翰하여 根深蔕固하면 難於傾拔이라 可以正中國四夷之分이요 倒置矣리며
그랬다면 필시 제후를 분봉하여 천자를 보위하는 울타리와 병풍이 되게 해서 나라의 뿌리가 깊고 견고하면 기울게 하거나 뽑아내기 어려운 법이니, 중국과 四夷의 분한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고 흉노가 두려워 그와 화친을 맺어서 머리와 발이 뒤바뀌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則必復하여 不致하며 富者 田連阡陌하여 僭擬公侯하고 而貧民 寃苦失職矣리며
그랬다면 필시 井田制를 회복하여 후세에 야만적인 貊國의 제도에 가까운 1/30세를 거두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며, 부유한 자는 농토가 사방으로 이어져서 참람되이 公‧候에 비견될 정도이고 가난한 백성은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생업을 잃게 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필시 侍御와 僕從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을 것이니, 병이 나서 위독해졌을 때 내시를 베고 눕지 않았을 것이며, 붕어할 때 公卿大夫가 顧命을 받고 아녀자와 내시는 참여할 수 없어서 그 임종을 크게 바르게 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3-3-나1(胡) : 胡宏의 《知言》 卷5에 보인다. 저본에 인용한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漢 高祖가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196년에 陸賈와 나누었던 대화이며, 뒷부분은 南宋 高宗 紹興 23년(1153)에 고조와 육가의 대화에 대해 “有士嘆曰”로 시작하는 호굉의 평론이다.
역주2 胡宏 : 1102~1161. 자는 仁仲, 호는 五峰으로, 建寧 崇安 사람이다. 아버지는 胡安國, 형은 胡寅이다. 楊時와 侯仲良의 문인으로, 謝良佐‧胡安國 등과 함께 湖湘學派의 대표적 학자이다. 제자로는 張栻 등이 있다. 호굉은 《知言》에서 天理와 人欲을 同體異用으로 보았는데, 이에 대해 朱熹는 〈知言疑義〉를 지어 비판하였다. 이밖에 《皇王大紀》‧《五峰集》‧《易外傳》 등의 저술이 있다. 《欽定四庫全書總目 卷92 子部2 儒家類2 知言6卷附錄1卷》
역주3 陛下……力也 : 이 부분에 해당하는 《知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는 高祖의 말에 陸賈가 말 위의 공은 項王보다 못하다고 말하자, 고조는 자신이 천하를 얻은 이유와 항왕이 천하를 잃은 이유를 물었다. 이에 육가는, 항왕은 신의를 잃고 임금을 시해하였으며 聖王의 법을 범하였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이 때문에 천하를 잃었다고 말한 뒤, 이어서 저본의 내용을 언급하며 이 때문에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말 위의 일시적인 공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역주4 受懷王入關之命 : 懷王은 전국 말기 楚 懷王 槐의 손자 熊心이다. 周 赧王 19년(기원전 296)에 懷王 槐가 맹약을 맺기 위해 秦에 갔다가 억류되어 죽었는데, 이로 인해 초나라 사람들의 연민을 받았다. 范增은 項梁에게 이러한 민심을 이용하여 초왕의 후손을 옹립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熊心이 기원전 208년 6월에 楚王으로 옹립되었다. 회왕은 먼저 關中을 점령하는 사람을 關中王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항우는 회왕의 약조를 무시하고 관중을 먼저 점령한 劉邦을 巴‧蜀에 漢王으로 분봉하였다.
역주5 殘賊 : 《孟子》에 따르면 ‘殘’은 義를 해치는 자이며 ‘賊’은 仁을 해치는 자이다. 따라서 신하이지만 殘賊한 임금을 죽이는 것은 임금을 시해한 것이 아닌 一夫를 죽인 것일 뿐이다. 《孟子 梁惠王 下》
역주6 : 사고본에는 ‘擄’로 되어 있다.
역주7 赦秦降王子嬰 : 子嬰은 秦의 3세 황제(재위 기원전 207~기원전 206)이다. 진의 權奸인 趙高가 2세 황제 胡亥를 시해하고 호해의 조카인 자영을 옹립하였다. 자영은 2세 황제의 齋宮에서 조고를 죽이고 군대를 보내 嶢關에서 劉邦을 막았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유방이 霸上까지 육박하자 항복하였는데, 유방은 그를 죽이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이후 항우가 관중에 진입하여 유방을 제압하고 자영을 죽였다.
역주8 約法三章 : 劉邦은 關中을 점령한 뒤 秦나라의 酷法을 폐지하고 “살인자는 죽이고 남을 상해한 자와 도둑질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죄를 묻는다.[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라는 세 조항의 법만 시행하여 민심을 얻었는데, 이 법을 ‘約法三章’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約’을 ‘간략한 법’의 의미로 본 설이다. 何焯은 ‘約法’을 ‘苛法’의 상대적인 의미로 보아 ‘세 조항의 간략한 법을 만들다[作三章之約]’로 보았으며, 《資治通鑑》 卷6에도 ‘作三章之約’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둘째는 ‘約’을 ‘간략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본 설이다. ‘법을 세 조항으로 간략하게 하다[約法三章]’라는 뜻이 된다. 셋째는 ‘約’을 ‘약속하다’라는 의미로 본 설이다. 《詳密註解史略諺解》는 ‘與父老約法三章耳’란 구절에 대해 ‘父老로 더부러 法 셕 章을 約하노니’라고 諺解하여 ‘約’의 의미를 ‘약속하다’로 보았으며, 李宗侗은 ‘約法三章’의 문법적 불완전성을 의심하여 ‘約’자 하나가 생략되었다고 보고 ‘부로들과 간략한 법 삼장을 약속하다[與父老約 約法三章]’로 해석하였다. 中華書局에서 표점한 《史記》(2006)와 漢語大詞典出版社에서 번역한 《二十四史全譯》의 《漢書》 卷1上에서도 ‘與父老約, 法三章耳’로 표점하였다. 여기에서는 이를 참조하여 ‘약속하다’의 의미로 번역하기로 한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역주9 項王 : 項羽(기원전 232~기원전 202)를 이른다. 이름은 籍, 자는 羽로, 臨淮 下相 사람이다. 전국시대 말기 楚나라의 명장 項燕의 후손이다. 기원전 209년 陳勝‧吳廣의 난 때 숙부 項梁과 함께 會稽守 殷通을 참살하고 吳中에서 거병하였다. 이후 秦軍을 격파하고 關中에 들어갔다. 鴻門에서 劉邦과 화의를 맺고 秦王 子嬰을 죽였으며, 秦의 도성 咸陽을 불사른 뒤 彭城에 도읍하여 西楚霸王으로 자칭하였다. 漢 高祖와 천하를 다투다가 垓下에서 敗死하였다.
역주10 蕭何 : ?~기원전 193. 沛郡 豊縣 사람이다. 沛縣 主吏掾으로 유방을 따라 關中으로 들어갔다. 劉邦이 漢王이 되었을 때 승상이 되었고 韓信을 대장으로 추천하였다. 유방의 對楚 전쟁 때에는 관중에 머물며 내정을 총괄하고 군수를 지원하여 유방의 중국통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漢나라가 건립된 뒤에 酇侯로 봉해지고 食邑 7천 호를 하사받았다. 秦의 법제를 참고하여 《九章律》을 편찬하는 등 漢나라의 국가 기반을 마련하고, 유방이 죽은 뒤 惠帝를 보필하였다. 시호는 文終이다.
역주11 還定三秦 : ‘三秦’은 秦의 古土인 關中을 이른다. 기원전 206년 劉邦이 관중에 들어가 秦이 멸망한 후, 동년 2월에 항우가 西楚霸王에 등극하여 공이 있는 장수들을 천하에 분봉할 때 먼저 관중을 장악한 이를 關中王으로 삼겠다던 楚 懷王의 약속을 저버리고 유방을 巴‧蜀에 봉하여 漢王으로 삼았다. 이어서 관중 지역을 셋으로 나누어 秦의 降將을 분봉하였는데, 章邯은 雍王으로 咸陽 以西 지역에 봉하여 廢丘에 도읍하도록 하고, 司馬欣은 塞王으로 咸陽 以東 지역에 봉하여 櫟陽에 도읍하도록 하고, 董翳는 翟王으로 上郡에 봉하여 高奴에 도읍하도록 하였다. 이는 군사적 경제적 역량이 풍부한 관중 지역을 하나의 제후가 장악할 경우 강력한 위협 세력이 될 수 있으므로 그 땅을 나누어 역량을 분산시키고 아울러 파‧촉의 유방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뒤에 유방이 파‧촉에서 실력을 키워 三秦을 기습할 때 회왕이 약속한 관중왕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還定三秦’이라는 표현은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역주12 項羽賊殺義帝 : 기원전 206년에 항우는 關中을 점령하고 劉邦을 제압한 뒤 懷王에게 關中王으로 삼겠다는 약조에 대해 물었는데, 회왕이 약조대로 유방을 관중왕으로 삼도록 하자 항우는 이에 불만을 품고 각처에 제후왕을 분봉한 뒤 스스로 西楚霸王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회왕을 ‘명목상의 황제’라는 의미의 ‘義帝’로 높이고, 역대의 천자는 강의 상류에 거하였다는 명분을 들어 長沙 郴縣으로 보냈다. 의제는 장사로 가던 도중에 항우의 명을 받은 九江王 英布 등에게 살해되었다.
역주13 張良 : ?~기원전 186. 자는 子房으로, 沛郡 城父 사람이다. 전국시대 韓나라의 명문 출신으로, 韓나라가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기원전 218년에 博浪沙에서 始皇帝를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下邳에 은신하고 있을 때 黃石公에게 《太公兵法》을 전수받았다. 陳勝과 吳廣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였다가 뒤에 劉邦의 책사가 되어 漢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高帝 6년(기원전 201)에 留侯로 책봉되었다. 만년에 黃老學을 좋아하여 辟穀의 術을 배웠고 근신하여 화를 피하였다. 시호는 文成이다.
역주14 陳平 : ?~기원전 178. 河南 陽武 사람이다. 秦나라 말기에 陳勝의 난이 일어나자 魏王 咎를 섬겨 太僕이 되었다. 처음에는 項羽를 따라 關中에 들어가 都尉가 되었으나 뒤에 劉邦을 섬겨 參乘‧典護軍으로 중용되었다. 漢나라 건립에 공을 세워 戶牖侯에 책봉되었으며, 高帝 6년(기원전 201)에는 曲逆侯에 책봉되었다. 周勃과 함께 呂氏의 난을 평정하고 文帝를 옹립하였다. 惠帝‧呂后‧文帝 때 승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獻이다.
역주15 韓信 : ?~기원전 196. 淮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楚의 項梁과 項羽를 섬겨 郎中이 되었으나 중용되지 못하였다. 뒤에 劉邦의 휘하에 들어왔다가 승상 蕭何의 인정을 받아 대장군에 임용되었다. 三秦의 점령부터 垓下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漢軍을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高帝 4년(기원전 203)에 相國이 되고 다음 해에 齊王이 되었다. 漢나라의 통일이 이룩되자 다시 楚王에 책봉되었으나 모반을 꾀한다는 참언을 받아 淮陰侯로 강등되었다. 기원전 196년에 陳豨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呂后에 의해 長樂宮에서 참살되었다.
역주16 : 대전본에는 ‘更’으로 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대해 漢語大詞典出版社에서 번역한 《二十四史全譯》의 《漢書》에서는 “下令 : 軍士不幸死者, 吏爲衣衾棺斂, 轉送其家”로 표점하고 있는데, 저본의 현토를 따르면 ‘吏’는 해석이 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漢語大詞典出版社의 《漢書》 표점에 따라 번역하기로 한다.
역주17 叔孫通 : ?~?. 호는 稷嗣君으로, 魯國 薛 사람이다. 秦나라 말기에 博士가 되었다. 처음에는 項梁과 項羽를 따르다가 뒤에 劉邦을 섬겼다. 魯의 유생 및 제자들과 함께 秦의 의례를 답습하여 朝儀를 制定하고 高帝 7년(기원전 200)에 太常에 제수되었다. 고제 9년(기원전 198)에 태자를 바꾸려는 고제에게 간언하여 이를 막았다. 惠帝가 즉위하자 奉常에 제수되어 宗廟 儀法을 제정하였다.
역주18 聘魯二生 : 叔孫通은 漢 高祖의 명을 받아 의례를 제정하기 위해 魯國의 禮樂에 능통한 유생 30여 명을 불렀는데, 이때 禮의 형식만을 복원하려는 숙손통의 의도에 동조하지 않은 두 명의 유생이 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魯二生’은 바로 이 두 명의 유생을 이른다.
역주19 四皓 : 陝西省 商縣 동쪽의 商山에서 秦始皇의 폭정을 피하여 은거하던 東園公 唐宣明‧甪里先生 周術‧邯鄲公 綺里季‧夏黃公 崔黃 등의 네 隱士를 이른다. 이들이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기 때문에 ‘四皓’라고 하였다. 명망이 높아 高帝에게 여러 차례 초치되었으나 거절하고 은거하였는데, 뒤에 고조가 呂后 소생인 태자 劉盈을 폐하고 戚夫人 소생인 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張良의 계책을 따라 하산하여 이를 막았다.
역주20 六宮 : 원래는 황후의 寢宮을 가리키는 말로, 황후의 침궁이 1개의 正寢에 5개의 燕寢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를 합하여 ‘六宮’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황제의 妃嬪 등 內命婦를 이른다.
역주21 戚夫人爲人彘 : 戚夫人은 定陶 사람인 戚姬를 이른다. 高帝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소생인 趙王 劉如意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고제가 붕어하자 呂后는 궁중 감옥인 永巷에 척부인을 구금한 뒤 머리를 깎고 붉은 죄수복을 입혀 방아를 찧게 하였다. 뒤에는 또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았으며 약을 써서 귀머거리에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변소에 둔 뒤 人彘(인간 돼지)라고 이름하고는 이를 惠帝에게 보였다. 혜제는 이에 충격을 받아 병이 들었고, 이후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역주22 趙王如意 : 漢 高帝의 총애를 받던 戚姬의 소생이다. 고제 7년(기원전 200)에 代王에 책봉되었다. 고제 9년(기원전 198)에 貫高와 趙午의 고제 시해 시도에 연루되어 趙王 張敖가 宣平侯로 강등되자 趙王으로 移封되었다. 고제는 呂后 소생인 원래의 태자를 폐하고 劉如意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제 死後에 呂后에게 독살되었다.
역주23 淮陽王友 : 漢 高帝의 여섯째 아들이다. 고제 11년(기원전 196)에 淮陽王에 책봉되었다. 趙王 劉如意가 呂后에게 독살되자 趙王으로 移封되었다. 여후에 의해 呂氏 집안의 여인을 왕후로 삼았는데, 劉友가 다른 후궁을 총애하자 화가 난 왕후는 여후에게 유우가 여씨를 치려 한다고 참소하였다. 결국 유우는 관저에 유폐되어 굶어죽었다.
역주24 梁王恢 : 漢 高帝의 다섯째 아들이다. 고제 11년(기원전 196)에 梁王에 책봉되었다가 呂后 7년(기원전 181) 2월에 趙王으로 移封되었다. 여후가 새롭게 梁王이 된 呂産의 딸을 왕후로 삼게 하고 왕후의 수행관을 모두 呂氏로 두어 趙王을 감시한 데다 평소 조왕이 총애하던 왕비를 독살하자, 6월에 이를 비관하여 자살하였다. 여후는 여자 때문에 宗廟를 포기했다고 하여 그의 후사를 폐하였다.
역주25 安有……之醜 : 審食其는 劉邦과 동향인으로, 漢의 개국공신이 되어 辟陽侯에 봉해졌다. 유방이 기원전 205년 彭城에서 패배했을 때 유방의 가족인 太公과 呂后를 호종하다가 함께 사로잡혀 인질이 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여후의 신임을 받았다. 高帝가 붕어하자 여후와 함께 發喪을 막고 공신들을 제거할 것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여후가 聽政을 하자 좌승상에 임명되었으며, 詔令의 출납을 장악하여 공경대신들이 모두 그를 통해 업무를 지시받았다. 이로 인해 野史에서는 심이기와 여후를 내연의 관계로 지목하기도 한다. 文帝 때 淮南厲王 劉長에게 피살되었다.
역주26 : 대전본에는 없다.
역주27 荊王……十縣 : 漢 高帝는 秦의 郡縣制가 황실의 고립과 연계되어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이에 14개의 郡을 설치하고 요해처에는 동족을 분봉하여 10國을 두어 황실을 비호토록 하는 郡國制를 시행하였다. 高帝 6년(기원전 201)에 楚王 韓信의 봉지를 둘로 나누어 사촌형 劉賈를 淮河 以東의 53縣에 봉하여 荊王으로 삼았고, 동생 文信君 劉交를 薛郡‧東海‧彭城의 36縣에 봉하여 楚王으로, 형 宜信侯 劉喜를 雲中‧雁門‧代郡의 53縣에 봉하여 代王으로, 曹氏 소생의 서자 劉肥를 膠東‧膠西‧臨淄‧濟北‧博陽‧城陽의 73縣에 봉하여 齊王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제 사후 이러한 대규모 봉지를 가진 제후국이 도리어 황제권을 위협하게 되자 文帝‧景帝 연간에는 제후들을 약화시키는 정책이 실행되었다. 기원전 154년에 晁錯의 削藩策이 추진되자 이에 반발한 제후들의 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후 藩國에 대한 영지의 삭감과 세분화가 계속 시도되었고, 武帝 때인 기원전 127년에는 제후들의 봉지를 그 자손들에게 분배하여 상속하도록 한 推恩令이 시행되면서 군국제의 틀 속에서 사실상의 군현제가 시행되는 제도적 개혁이 완성되었다.
역주28 血食 : 본래는 희생을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자손의 선조에 대한 제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짐을 이른다.
역주29 蕭相國不繫獄 : ‘蕭相國’은 相國 蕭何를 이른다. 소하는 長安의 토지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하여 황제의 전용 화원인 上林苑의 空地를 개방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사육하게 하고자 했다. 高帝는 소하가 장사치들에게 뇌물을 받고서 이를 추구한다고 생각하고 廷尉에 회부하여 하옥시켰다. 소하는 당시 고제를 시위하던 王衛尉의 간언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역주30 黥布 : ?~기원전 195. 六安 六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명은 英布인데, 법에 저촉되어 黥刑을 받았기 때문에 黥布라고도 하였다. 秦末에 項羽를 따라 關中에 들어가 九江王에 봉해졌다. 항우의 명으로 衡山王 吳芮와 義帝를 시해하였다. 漢의 彭城 점령 때 楚를 구원하지 않아 항우의 의심을 받자 漢에 귀부하여 淮南王에 봉해졌고, 垓下 전투에서 유방을 따라 항우를 격멸했다. 뒤에 韓信과 彭越 등이 주살당하자 유방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다 반란을 일으켰다. 高帝에게 패주하여 강남으로 도망가다가 長沙 成王 吳臣에게 피살되었다.
역주31 陳豨 : ?~기원전 196. 漢나라의 개국공신이다. 高帝를 따라 燕王 藏荼를 평정하여 陽夏侯에 봉해졌다. 고제 10년(기원전 197)에 代의 相國이 되어 趙‧代의 군사를 관할하였다. 韓信과 모반을 도모하여 王黃‧曼丘臣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代王으로 자칭하였다. 고제의 親征으로 진압되었다.
역주32 盧綰 : 기원전 256~기원전 193. 沛國 豊縣 사람이다. 劉邦과 동향인으로 총애를 받았다. 楚‧漢 전쟁 때 太尉가 되었고 長安侯에 봉해졌다. 뒤에 劉賈와 臨江王 共尉를 격멸하고 유방을 따라 燕王 藏荼를 격파하여 燕王에 봉해졌다. 高帝 12년(기원전 195)에 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진희를 공격하고 흉노와 연대하려는 진희의 계획을 방해하려다가 도리어 흉노와의 연대를 도왔는데, 뒤에 이 일이 알려지자 흉노로 도망하였다. 흉노가 東胡盧王으로 삼았으나 1년여 만에 흉노에서 죽었다.
역주33 韓王信 : ?~기원전 196. 전국시대 말 韓나라 襄王의 庶孫이다. 張良을 따라 韓에 가서 韓將이 되었다가 유방을 따라 漢中에 들어갔다. 太尉에 제수되었다. 高帝 2년(기원전 205)에 韓王에 옹립되었다. 고제 6년(기원전 201)에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太原郡에 移封되어 晉陽을 수도로 삼아 匈奴에 대비토록 하였다. 뒤에 다시 馬邑으로 옮겨졌다. 여러 차례 冒頓單于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다. 고제 11년(기원전 196)에 漢나라 장수 柴武에게 죽었다.
역주34 謙尊而光 : 이와 관련하여 《周易》 〈謙卦 彖傳〉에 대한 程頤의 《伊川易傳》에 “謙은 尊大하고 光顯하며 스스로 낮추지만 그 덕이 높아 넘을 수 없으니, 이는 군자의 끝마침이다.[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35 乾剛……交泰 : 朱熹가 1169년에 丞相 陳俊卿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제왕의 강건한 덕이 지나치게 높지 않아 임금의 道가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충성스런 직언이 다투어 올라와 신하의 도가 위에서 행해지게 한다면, 하늘과 땅이 서로 사귀어 태평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뜻이 하나가 됩니다.[使乾剛不亢而君道下濟 忠讜競勸而臣道上行 則天地交泰 上下志同]”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주역》 〈泰卦〉에 대한 程頤의 《伊川易傳》의 “陽氣는 내려오고 陰氣는 올라가서 사귀어 陰陽이 화창하면 만물이 생성되니, 이는 천지가 소통되고 평안한 것이다. 人事의 관점에서 말하면 大는 임금이고 小는 신하이니, 임금은 정성을 미루어 신하에게 직분을 맡기고 신하는 정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서 임금과 신하의 뜻이 소통되는 것은 조정이 소통되고 평안한 것이다.[陽氣下降 陰氣上交也 陰陽和暢 則萬物生遂 天地之泰也 以人事言之 大則君上 小則臣下 君推誠以任下 臣盡誠以事君 上下之志通 朝廷之泰也]”라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晦庵集 卷24 與陳丞相 己丑》
역주36 : 대전본에는 ‘託’으로 되어 있다.
역주37 不至……置矣 : 《史記》 卷110 〈匈奴列傳〉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말에 頭曼을 제거하고 單于가 된 冒頓은 주변의 東胡‧月氏‧樓煩‧渾庾‧屈射 등을 제압하고 북방의 패자가 되었다. 이후 楚‧漢 전쟁의 혼란을 틈타 지속적으로 남하를 시도했을 뿐 아니라 韓王 信의 반란 등에도 개입함으로써 漢나라의 큰 위협이 되었다. 기원전 201년에 韓王 信의 흉노 투항을 계기로 漢 高帝의 흉노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기원전 200년에 고제가 馬邑의 白登山에서 포위되어 대패한 뒤 흉노와 화친하여 막대한 조공을 흉노에 바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漢과 흉노가 대등한 관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漢이 흉노에 대해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본문의 ‘首足倒置’의 상황이다. 漢의 이러한 외교적 열세는 武帝의 대대적인 匈奴 정벌이 감행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역주38 : 대전본‧사고본에는 ‘手’로 되어 있다.
역주39 井田之制 : 井田制는 王土思想에 바탕을 두고 씨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공동 경작하는 고대 토지제도의 하나이다. 《孟子》에 따르면 정전제는 사방 1里, 900畝의 땅을 아홉 구역으로 나누어 바깥의 여덟 구역을 私田, 중앙의 한 구역을 公田으로 삼는 井字形 토지구획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공동으로 公田을 경작하여 공전에서 나온 소출을 조세로 삼고 별도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 세율은 《맹자》 〈滕文公 上〉에는 1/9세, 《漢書》 〈食貨志 上〉에는 1/10세라고 하여 차이를 보이나, 고대 유가 사상에 있어서 이상적 제도로 인식되었다. 후대의 限田說과 均田說 역시 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정전제의 관념적 성격과 현실적 시행의 어려움을 이유로 현재 학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표준적인 제도의 틀로서 관념적으로 시행됐다든지 井字의 형태가 고대 관개수로의 모습을 형용하고 있다는 등 그 실체에 대해 인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역주40 後世……貊道 : 貊國은 중국 북방에 있었던 나라로, 여기에서는 중화의 문화 세계에 상대되는 야만 세계를 의미한다. 《孟子》에 따르면, 조세로 1/20을 취하려고 하는데 어떠하냐는 白圭의 물음에, 맹자는 “그대가 말하는 방식은 貉國의 방식이다.……맥국은 오곡이 나지 않고 기장만 자라니 성곽‧궁실‧종묘‧제사의 예가 없으며 제후들과 폐백을 교환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없으며, 百官과 有司가 없다. 그러므로 1/20만을 조세로 취하여도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 살면서 인륜을 버리고 군자가 없다면 어찌 가하겠는가.……조세를 堯‧舜의 道보다 경감시키려고 하는 나라는 큰 맥국에 작은 맥국이며, 요‧순의 道보다 무겁게 하려는 자는 큰 桀에 작은 桀이다.[子之道 貉道也……曰夫貉五穀不生 惟黍生之 無城郭宮室宗廟祭祀之禮 無諸侯幣帛饔飱 無百官有司 故二十取一而足也 今居中國 去人倫 無君子 如之何其可也……欲輕之於堯舜之道者 大貉小貉也 欲重之於堯舜之道者 大桀小桀也]”라고 대답하고 있다. 즉 貊國은 聖王의 제도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가벼운 조세를 거두는 곳이다. 漢初에는 1/15의 세율이 적용되기도 하였으나, 변동과 감면 등이 자주 있어 田租가 일정하지 않다가 景帝 원년(기원전 156)에 1/30로 된 이후 漢代의 定制가 되었다. 곧 漢代의 정세율인 1/30세는 堯‧舜과 같은 성왕의 정세율인 1/10의 세율보다 매우 가벼운 조세이므로 이를 맥국의 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聖王의 정세율로 지목한 1/10의 세율은 井田法의 세율이다. 《孟子 告子 下》
역주41 有疾……者卧 : 漢 高帝 11년(기원전 196)에 고제는 병이 나자 이를 핑계로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조서를 내려 신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絳侯 周勃이나 灌嬰과 같은 공신들도 10여 일이나 궐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때 舞陽侯 樊噲가 궐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고제가 환관을 베고 누워 있었다. 이에 번쾌가 趙高의 일을 거울삼기를 청하며 눈물을 흘리자 고제는 그의 간언을 받아들여 정무를 재개했다고 한다.
역주42 臨棄……終矣 : 《漢書》에 따르면 고제가 長樂宮에서 붕어하자 呂后는 審食其와 모의하여 어린 임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고제와 함께 건국했던 여러 장수들의 三族을 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發喪하지 않았다. 이에 酈商이 심이기에게 “황제께서 이미 붕어하셨는데 4일 동안 발상하지 않고 있으니 천하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10만 대군을 거느린 陳平‧灌嬰과 20만 대군을 거느린 樊噲‧周勃이 이를 안다면 필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자, 마침내 발상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와 관련하여 《禮記》 〈喪大記〉에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절명하지 않고 부인은 남자의 손에서 절명하지 않는다.[男子不死於婦人之手 婦人不死於男子之手]”라는 내용이 보인다. 《漢書 卷1下 高帝紀》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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