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和十四年
에 迎佛骨至京師
하다 先是
가 上言
에 有佛指骨
하니
相傳三十年一開니 開則歲豐人安이라하니 來年에 應開니 請迎之하소서 上이 從其言하시다
至是하여 佛骨이 至京師어늘 留禁中三日하여 歷送諸寺하니 王公‧士民이 瞻奉捨施를 如恐弗及이러니
刑部侍郞韓愈
가 上表諫曰 佛者
는 夷狄之一法耳
라 自黃帝至禹‧湯‧文‧武
가 皆
壽考
하시며 百姓
이 安樂
하니 當是時
하여 未有佛也
러니
漢明帝時
에 始有佛法
하니 其後
에 亂亡
이 相繼
하여 運祚
가 不長
하고 謹
호대 年代
가 尤促
하고
호대 竟爲侯景
의 所逼
하여 餓死臺城
하니 事佛求福
이라가 乃更得禍
하니
佛은 本夷狄之人이라 與中國으로 言語不通하며 衣服殊製하고 不知君臣之義‧父子之情하니
假如其身
이 尙在
하여 來朝京師
라도 陛下
가 容而接之
가 不過
一見
하시며 一設
하시며 賜衣一襲
하사 衛而出之
하여 不令惑衆也
어든
況其身死已久
하니 枯朽之骨
을 豈宜
入宮禁
이리오 乞付有司
하여 投諸水火
하여 永絶禍本
하소서
上
이 大怒
하사 宰相
‧
이 言 愈
가 雖狂
이나 發於忠懇
하니 宜寬容
하여 以開言路
니이다 乃貶潮
刺史
13-14-가
元和 14년(819)에 헌종이 부처의 뼈를 맞이하여 京師로 오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功德使가 상언하기를, “鳳翔府에 있는 절의 탑에 부처의 손가락뼈가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기를, 30년마다 한 번씩 공개하는데 공개하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해진다고 합니다. 내년에 공개될 것이니, 그 뼈를 영접하소서.” 하니, 헌종이 그 말을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부처의 뼈가 경사에 도착하자 궁중에 사흘 동안 머물러둔 뒤에 여러 사찰에 차례로 보내니, 王公과 士民들이 우러러 떠받들고 재물을 시주하기를 마치 못 미칠 것처럼 하였다.
그러자 刑部侍郞 韓愈가 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佛法은 夷狄의 한 법일 뿐입니다. 黃帝로부터 禹王‧湯王‧文王‧武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를 누렸으며 백성이 편안하고 즐거웠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부처도 없었습니다.
漢 明帝 때에 처음으로 佛法이 있게 되었는데 그 후에 혼란과 멸망이 계속되어 국가의 운이 장구하게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宋‧齊‧梁‧陳‧元魏(北魏) 이후에는 부처 섬기기를 점점 경건하게 하였지만 歷年은 더욱 짧아졌습니다.
그리고 양 무제만은 재위 48년 동안에 전후로 세 번 捨身을 하여 불가에 귀의하였는데 마침내 侯景의 핍박을 받아 臺城에서 굶어 죽었으니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화를 입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부처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점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는 본래 이적의 사람이므로, 중국과 언어는 통하지 않고 의복은 양식이 다르며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情理를 모릅니다.
가령 부처 본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어 경사로 와서 朝見을 온다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의용을 갖추고 그를 접견하실 때 宣政殿에서 한 번 접견하시고 禮賓院에서 한 번 연향을 베푸시며 옷 1벌을 하사하여 그를 호위해서 내보내 대중을 미혹시키지 않도록 하시는 것 이상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 육신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마르고 썩은 뼈를 어찌 궁중으로 들여서야 되겠습니까. 담당 관원에게 내려보내 물이나 불에 던져 화근을 영원히 끊으소서.”
헌종이 대로하여 한유를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는데, 재상 裴度와 崔群이 말하였다. “한유가 비록 狂妄하지만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이니, 관용을 베푸시어 언로를 열어야 합니다.” 마침내 한유를 潮州刺史로 폄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