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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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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立爲后注+, 婦官名也. .어시늘 大臣 切諫하더니 禮部尙書 陰揣帝私하여 卽妄言曰
19-2-가
唐 高宗이 장차 武昭儀를 황후로 삼으려 하자注+‘昭儀’는 婦官의 명칭이다. 武氏의 일은 后德篇에 보인다. 대신들이 극간하였다. 禮部 尙書 許敬宗이 남몰래 고종의 사욕을 헤아려 곧 망령되이 말하였다.
田舍子 䞉穫十斛麥이라도 尙欲更故婦어든 天子 富有四海하시니 立一后 謂之不可 何哉오한대 帝意遂定하시다
“일개 농부도 보리 열 섬만 수확이 늘어도 오히려 본부인을 바꾸고자 하는데 천자는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다 가졌으니 황후 한 사람 세우는 것을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고종의 뜻이 마침내 정해졌다.
王后注+王后, 高宗元妃.커시늘 敬宗 請削后家官爵하고 廢太子忠而立代王注+代王, 武氏所生, 故敬宗請立爲太子.한대
王皇后가 폐위되자,注+‘王后’는 高宗의 元妃이다. 허경종이 왕황후의 친정 사람들의 관작을 삭탈하고 태자 李忠을 폐위하고 代王을 태자로 세울 것을注+代王은 武氏의 소생이기 때문에 許敬宗이 태자로 세울 것을 청한 것이다. 청하자
帝得所欲이라敬宗하여 武德殿西闥이러니 俄拜侍中하여 進中書令注+侍中‧中書, 皆宰相官.하다
고종이 원하는 바를 얻었기 때문에 허경종에게 조서를 내려 武德殿 西闥에서 待詔하도록 하였는데, 얼마 뒤에 侍中에 임명하고서 中書令으로 승진시켰다.注+侍中과 中書는 모두 재상의 직임을 맡는 관직이다.
敬宗 於立后 有助力이라 知后 鉗戾能固位以久己權하고
허경종이 무후를 황후로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무후가 포악하여 권위를 공고히 하여 자신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乃陰連后謀하여 逐韓瑗‧來濟‧하고 殺梁王注+卽太子忠也. 廢爲梁王, 又殺之.注+瑗‧濟‧遂良‧無忌, 皆當時賢相, 諫高宗立武后者也. 儀亦近臣, 得罪於武后.한대 朝廷 重足事之하니熾灼 當時 莫與比러라
이에 은밀히 무후와 함께 모의하여 마침내 韓瑗‧來濟‧褚遂良을 축출하고 梁王注+양왕은 곧 태자 李忠이다. 폐하여 양왕으로 삼고 다시 그를 죽인 것이다.‧長孫無忌‧上官儀를 죽이자注+韓瑗‧來濟‧褚遂良‧長孫無忌는 모두 당시의 賢相으로, 高宗에게 武后를 세우는 일에 대해 간언한 자들이다. 上官儀 역시 近臣으로 武后에게 미움을 샀다. 조정의 신료들이 몹시 두려워하며 그를 섬기니, 위세와 총애의 극성함이 당시에 견줄 자가 없었다.
역주
역주1 19-2-가 : 《新唐書》 卷223上 〈姦臣列傳 許敬宗〉에 보인다. 永徽 5년(654)에서 영휘 6년(655)의 일이다.
역주2 唐高宗 : 628~683(재위 649~683). 唐나라 제3대 황제 李治이다. 소자는 雉奴이다. 자는 爲善이다. 시호는 天皇大聖大弘孝皇帝이다. 長安 사람이다. 唐 太宗의 제9남이며, 모친은 文德順聖皇后 長孫氏이다. 성품이 유약하였다. 貞觀 5년(631) 晉王에 봉해졌다. 정관 17년(643)에 태자 李承乾이 폐위되자, 태자로 책립되었다. 즉위 후에는 貞觀之治의 遺風을 계승하여 태종의 舊臣을 중용하고 정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唐朝의 典章制度를 모두 갖추어 永徽之治를 이루었고, 서돌궐 평정과 고구려 멸망 등 대외 확장에 성과를 거두어 唐代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영휘 6년(655)에 王皇后를 폐하고 武后(則天武后)를 세우고 이에 반대한 褚遂良‧長孫無忌 등 고명대신을 축출하였다. 顯慶 5년(660) 병이 심해진 뒤에는 무후에게 정치를 위임하여 실권을 잃었다.
역주3 : 대전본에는 ‘帝’로 되어 있다.
역주4 武昭儀 : 624~705. 唐 高宗의 后妃인 則天武后이다. 幷州 文水 사람이다. 시호는 則天大聖皇后이다. 지혜가 많고 문사를 겸했다. 14세에 太宗의 才人이 되었다가 태종의 사후에 感業寺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高宗 永徽 초에 고종이 다시 입궁시켜 昭儀로 삼았다. 영휘 6년(655)에 황후가 되었고, 顯慶 5년(660)에 고종의 병환이 중해지자 국정을 위임받아 처리했다. 上元 원년(674)에 天后라고 칭했다. 고종의 사후, 中宗이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어 臨朝稱制했다. 중종을 폐위하고 睿宗을 세운 후에 국정을 혼자 처리했다. 天授 원년(690)에 국호를 周로 고치고 聖神皇帝라고 칭제하였다. 재위 동안 정적을 축출하고 酷吏를 중용하여 밀고를 크게 장려했다. 宗室과 舊臣을 크게 탄압했다. 《氏族志》를 《姓氏錄》으로 바꾸어 5품 이상의 관원을 士流로 편입하고, 殿試와 武擧를 실시하여 인재를 발탁했다. 불교를 진흥시키고 명당을 만들었으며 員外試官을 설치했다. 농업을 중시해 호구를 증가시킴으로써 경제를 발전시켰다. 말년에 병이 위중해지자, 張柬之 등이 중종을 복위시켰다. 사후 고종과 함께 건릉에 합장되었다.
역주5 昭儀 : 西漢 元帝 때 처음 설치된 後宮嬪御의 封號의 일종이다. 唐代에는 지위가 嬪 중의 한 등급이다. 품계는 정2품으로 9嬪의 우두머리이고 4妃의 다음이었으며, 지위가 재상에 견주었다.
역주6 武氏事見后德篇 : 《大學衍義》 卷37 〈齊家之要1 重妃匹 懲廢奪之失〉 37-11-가 참조.
역주7 許敬宗 : 592~672. 唐나라의 대신이다. 자는 延族이다. 杭州 新城 사람이다. 부친은 隋代의 禮部侍郎 許善心이다. 隋 煬帝 大業 연간에 秀才로 천거되었다. 얼마 뒤 李密 휘하에서 記室이 되었다. 唐初에는 秦王府 18學士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태종 貞觀 연간에 著作郞‧中書舍人‧修國史‧洪州 司馬‧給事中‧太子右庶子 등을 역임하였다. 高宗 때 禮部 尙書가 되어 李義府 등과 함께 高宗이 武則天을 황후로 세우는 것을 도와 侍中에 발탁되었다. 또 무측천을 도와 褚遂良을 축출하고 長孫無忌와 上官儀 등을 압박해 살해했다. 고종 顯慶 연간에 中書令‧右相이 되고, 이의부 등과 함께 조정을 관장했다. 일찍이 監修國史를 지냈다. 高陽郡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繆이다.
역주8 : 대전본에는 ‘’로 되어 있다.
역주9 待詔 : 唐代에 무릇 문장과 경학에 뛰어나거나 醫學‧占卜 등에 뛰어난 자를 內廷 別院에서 당직하며 詔命을 기다리도록 하였는데, 미곡을 지급하였다. 唐 玄宗 때에는 翰林院에 翰林待詔를 설치하여 表疏에 대한 批答과 應制 등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역주10 褚遂良 : 597~659. 당 태종‧고종 연간의 재상이다. 자는 登善이다. 杭州 錢塘 사람이다. 부친 褚亮은 秦王 李世民의 文學館 18학사 중 1인이었다. 박학다식하여 文史에 정통했고, 서법에 뛰어나 虞世南, 歐陽詢, 薛稷과 함께 ‘初唐四大家’로 불린다. 정관 17년(643)에 태자 李承乾이 폐위되자, 長孫無忌와 함께 晉王 李治를 태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정관 18년(644)에 황문시랑이 되어 정사에 참여하였고 정관 22년에 中書令에 올랐다. 遺詔를 받들어 高宗을 옹립하고 정치를 보좌하였다. 永徽 元年(650) 中書譯語人의 토지를 강매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아 同州刺史로 나갔다가 영휘 3년에 이부상서‧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고 이듬해 尙書右僕射에 임명되었다. 영휘 6년에는 고종이 王皇后를 폐립하고 武則天을 황후로 삼는 것을 극력 반대하다가 폄척되어 潭州 都督이 되었다. 이후 좌천을 거듭하다가 불우하게 생애를 마쳤다.
역주11 長孫無忌 : 594?~659. 唐初의 宰相이자 凌煙閣 24功臣 중의 首長이다. 자는 輔機이다. 唐 河南 洛陽 사람이다. 선조는 鮮卑族 拓跋氏로 北魏의 皇族 출신이다. 누이동생은 태종의 황후인 長孫皇后이다. 617년에 李淵이 太原에서 거병할 때, 智謀가 뛰어나 渭北行軍典簽으로 임명했다. 후에 李世民을 보좌하여 당나라 건립에 큰 공을 세워 開國一等功臣으로 齊國公에 봉해졌다. 高祖 武德 9년(626) 玄武門의 變에 가담하여 太宗 李世民의 즉위에 공을 세웠다. 尙書右僕射‧司空‧司徒‧太子師傅 등을 맡았고 趙國公에 봉해졌다. 貞觀 23년에 褚遂良‧房玄齡 등과 함께 고명을 받들어 高宗을 옹립했다. 이후 太尉‧同中書門下三品에 올랐다. 이후 고종이 武則天을 황후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고 許敬宗의 무고로 말미암아 黔州로 유배 가다가 자결했다.
역주12 上官儀 : 608~664. 자는 遊韶이다. 唐 陝州 陝縣 사람이다. 太宗 貞觀 원년(627) 進士에 급제하고, 弘文館 直學士를 거쳐 秘書郞과 起居郞을 역임했다. 高宗 永徽 초에 秘書少監을 지내고, 西臺侍郞을 거쳐 同東西臺侍郞에 올랐다. 측천무후의 전횡을 억압하려는 고종에게 측천무후의 폐위를 청하는 간언을 올렸다가 측천무후의 미움을 샀다. 麟德 원년(664) 廢太子 李忠과 함께 측천무후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투옥되어 죽었다. 시에 뛰어나 태종의 作詩에 자문하였고 六朝의 화려함을 계승하여 섬세한 기교를 구사한 시풍은 당시 上官體라고 불리면서 크게 유행했다.
역주13 : 대전본에는 ‘儀’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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