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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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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9-10-나(按)
按 蘀兮之刺 曰臣强而已 至此則一國之權 盡歸祭仲하여 生殺予奪 仲得하니 其强 又益甚矣
夫天下 未嘗無賢이라 雖權臣用事之時라도 亦必有不肯阿附者 人君 能卽而圖之 其勢猶有可回之理
若齊之權 在田氏而有하니 使景公으로 能與嬰圖之 田氏未必能遂其之志
魯之權 在季氏而有
家羈하니 使昭公으로 能與羈圖之 季氏未必能成其之謀
二國之權 不可以復收 由二臣之言 不見於用也니이다
原注
此詩 蓋當時賢者所作이니 賢者 不見遇於君而無自絶之意
故雖不與言‧不與食而幽憂憤切하여 至於不能餐‧不能息焉하니 其心之忠厚 何如哉
使昭公으로 能與斯人圖之 必將有以處此어늘 而昭公 莫之能也하니
未幾 祭仲 得以竊立之權하여 逐忽 如棄梗하고 置突 如易棋注+突, 厲公也.하니 其漸 非一日矣
以目君狡童으로 爲非禮어니와 以爲此 發憤怒罵之辭 辭雖不遜而其心則至惓惓也 讀者 毋以辭害意云이니이다


原注
9-10-나(按)
[臣按] 〈蘀兮〉의 풍자에서는 ‘신하가 강성하다[臣强]’라고만 말했을 뿐이고, 이 〈狡童〉 시에 와서는 한 나라의 권력이 전부 채중에게 귀속되어 생살여탈을 채중이 전단하게 되었으니, 그 강성함이 또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천하에는 현인이 없던 적이 없었으므로, 권신이 권력을 휘두르는 때라 하더라도 아부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임금이 그러한 사람에게 나아가 大事를 도모할 수 있다면, 君弱臣强의 형세를 그래도 되돌릴 수 있는 이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齊나라의 권력이 田氏에게 있었지만 晏嬰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만약 景公이 안영과 함께 대사를 도모할 수 있었다면, 전씨가 나라를 찬탈하려는 야욕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魯나라의 권력이 季氏에게 있었지만 子家羈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만약 昭公이 자가기와 함께 대사를 도모할 수 있었더라면, 계씨가 임금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성사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 나라의 권력이 다시 임금에게 회수되지 못했던 것은 두 신하의 말이 채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原注
이 시는 아마도 당시 현자가 지은 작품일 것입니다. 현자가 임금에게 知遇를 받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군신 관계를 단절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말도 안하고 같이 밥도 안 먹지만, 지나치게 근심하여 분에 겨운 나머지 밥도 못 먹고 쉬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의 충후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昭公이 이러한 사람과 대사를 능히 도모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이 君弱臣强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공이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祭仲이 임금을 廢立시키는 권력을 훔쳐 초목의 줄기를 버리듯 忽을 내쫒고 바둑알을 바꾸듯 突을 임금으로 세울 수 있었으니,注+‘突’은 鄭 厲公이다. 점차 그러한 지경에 이른 것이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先儒는 임금을 가리켜 교활한 아이라 부른 것을 두고 禮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신은 이것이 분이 나서 꾸짖는 말이기 때문이니 표현은 불손하지만 그 속마음은 매우 간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읽는 자가 표현을 가지고 내재된 의미를 저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專’으로 되어 있다.
역주2 晏嬰 : ?~기원전 500. 嬰은 이름이며, 자는 平仲으로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이다. 靈公‧莊公‧景公 세 임금을 섬기며 재상을 지냈는데, 忠諫을 잘하여 제후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 禮治가 쇠퇴하는 현실을 걱정하며 장차 제나라가 陳氏(田氏)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역주3 簒國 : 전씨가 제나라를 찬탈한 것은 9-8-나(按)의 ‘竊弄……田氏’ 주석 참조.
역주4 子家羈 : 子家는 氏, 羈는 이름이며, 자는 駒이다. 魯 莊公의 현손이자 子家文伯의 아들로, 昭公의 大夫가 되었다. 季平子를 토벌하려는 소공을 만류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소공이 패하여 齊나라로 달아나자 그를 수행하였으며, 소공이 죽자 소공의 靈柩를 노나라로 보내고 자신은 국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호는 懿이다.
역주5 : 대전본에는 ‘于’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6 逐君 : 季孫氏와 郈氏가 서로 분쟁을 일으키자, 昭公은 계손씨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三家가 연합하여 소공을 치자, 소공은 齊나라로 달아났다. 소공은 다시 晉나라로 가서 귀국을 도모했으나 좌절되고 결국 晉나라 乾侯 땅에서 죽었다. 《史記 卷33 魯周公世家》
역주7 : 대전본에는 ‘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8 先儒 : 程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二程粹言》에, “정자가 말하였다. ‘詩를 지은 사람들이 꼭 모두 성현은 아니지만, 공자가 취한 것은 예의에 그친 것을 취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임금을 큰 쥐[碩鼠]에 비기고 임금을 교활한 아이[狡童]로 가리킨 것은 아마도 예의에 해가 있을 듯하니, 시의 표현을 가지고 시에 담긴 의미를 저해하지 말아야 옳다.’[子曰 作詩者 未必皆聖賢 孔子之取也 取其止於禮義而已 然比君以碩鼠 目君爲狡童 疑於禮義有害也 不以辭害意 可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二程粹言 卷上 論書篇》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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