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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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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忠 爲監察御史러니 林甫 興韋堅等獄하여 欲危太子하여 以國忠 怙寵搏鷙 可用倚之라하여 使按劾한대
19-10-가2
당시에 楊國忠이 監察御史가 되었다. 李林甫가 韋堅 등의 옥사를 일으켜 태자를 위험에 빠뜨리고자 하여, 양국충이 총애를 믿고 흉악하니 이 사람을 믿고 쓸 만하다고 생각하여 조사하여 탄핵하도록 하였다.
國忠 乃慘文峭詆하여 逮繫連年하여 誣蔑致誅者 百餘族이요 度可以危太子者 先林甫意陷之하여 皆中所欲하더라
그러자 양국충이 마침내 법조문을 가혹하게 적용하고 중상하는 말로 비방하여 여러 해를 계속하여 잡아가두어 무함하여 주살한 자가 백여 종족이었고, 태자가 위태롭게 될 사람을 헤아려 이임보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헤아려 무함해서 모두 이임보의 의도에 맞추었다.
역주
역주1 19-10-가2 : 《新唐書》 卷206 〈外戚列傳 楊國忠〉에 보인다.
역주2 楊國忠 : ?~756. 唐 玄宗 연간의 權臣이다. 본명은 釗(쇠)이다. 蒲州 永樂 사람이다. 貴妃 楊玉環의 堂兄이다. 성품이 난폭하고 計數에 밝았다. 젊어서 蜀에서 종군하다가 采訪支使 鮮于仲通의 천거를 받아 劍南節度使 章仇兼瓊의 僚佐가 되었다. 이후 입경하여 禁中을 출입하면서 양귀비‧괵국부인 등의 조력으로 給事中‧御史中丞‧專判度支事 등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재정적 수완이 뛰어났다. 천보 8년(749) 紫衣金魚袋를 하사받고 천보 9년(750)에 ‘國忠’을 이름으로 하사받았다. 처음에는 이임보에게 의지하여, 韋堅‧楊愼矜 등의 옥사를 일으켰고, 나중에는 도리어 이임보의 일파를 견제하였다. 이임보의 천거로 劍南節度使가 되어 천보 11년(751) 益州長史 鮮于仲通을, 천보 13년(753) 留後 李宓 등을 시켜 2차례 南詔의 閤羅鳳 토벌을 주도하였으나 대패하고 군사 20만 명을 잃었다. 天寶 12년(752) 11월에 李林甫가 죽자 右相 兼吏部尙書가 되었다. 권력을 전횡하여 私黨을 결성하고 뇌물을 수수하며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하는 등 失政을 거듭하였다. 安祿山과 반목하여 安史의 난을 촉발하였는데, 결국 천보 14년(755) 6월 四川으로 파천하는 현종을 호종하던 중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군사들의 반발로 馬嵬驛에서 죽임을 당했다.
역주3 : 대전본에는 ‘揚’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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