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4)

대학연의(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原注
23-9-나(按)
按 緋衣之謠 必時人 美其平之功하여 以俚語歌之하니 亦猶
之定天山而有三箭之謠也어늘
23-9-나(按)
[臣按] 緋衣의 노래는 필시 당시 사람들이 吳元濟를 평정한 裴度의 공을 찬미하여 속어로 노래한 것이었을 것이니, 또한 薛仁貴가 天山을 평정하자 화살 세 발의 노래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逢吉等 乃用以爲謗하니 蓋度 已與逢吉相爲水火하니
그런데 李逢吉 등이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비방을 하였으니, 이것은 裴度가 憲宗 때부터 이미 이봉길과 서로 물과 불 같은 사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憲宗 始初淸明하여 銳意討叛則相度而黜逢吉하고하여 志漸驕怠則相逢吉而黜度하니 正邪之不竝立也 久矣
헌종이 처음 즉위한 초기에는 매우 밝아서 강인한 의지로 반란을 토벌할 때에는 배도를 재상으로 삼고 이봉길을 축출했으며, 蔡州의 공이 이미 이루어져서 뜻이 점점 교만하고 태만해지게 되어서는 이봉길을 재상으로 삼고 배도를 축출하였으니, 올바른 사람과 간사한 자가 병립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던 것입니다.
旣歷三朝하여 度之勳德 愈茂而羣邪媢疾 甚於仇讎 故因其入朝하여 中以飛謗而張權輿者 又從而詆之하니
이미 세 임금을 거치면서 배도의 공훈과 덕이 더욱 성해지자 여러 간사한 자들이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이 원수보다도 더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배도가 入朝한 것으로 인하여 비방으로 중상하였던 것인데, 張權輿라는 자가 또 이에 장단을 맞추어 헐뜯었습니다.
逢吉‧權輿相濟하여 所謂也而因謠言以傾大臣하니
이봉길과 장권여는 간사함과 음험함을 서로 도와 이루어서 이른바 ‘八關十六子’였는데 민간의 노래를 이용하여 대신을 무너뜨렸으니, 바로 祖珽이 斛律光을 중상했던 방법이었습니다.
高緯 不察하여 殺光而齊以亡하고 敬宗 察之하여 相度而唐以未亂하니 來者 其尙니이다
高緯(北齊 後主)는 이를 잘 살피지 못하여 곡률광을 죽이자 北齊가 이 때문에 망하였고, 敬宗은 이를 잘 살펴 배도를 재상으로 삼자 당나라가 이 때문에 어지러워지지 않았습니다. 아, 이후의 군주들은 부디 이것을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以上 論憸邪罔上之情二[讒臣]
이상은 간사한 자들이 임금을 속인 정상을 논한 두 번째이다.[참소하는 신하]
역주
역주1 吳元濟 : 783~817. 唐 憲宗 때 藩鎭의 수령으로, 滄州 淸池 사람이다. 淮西節度使 吳少陽(?~814)의 아들이다. 憲宗 元和 9년(814)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이를 숨기고 오소양이 지은 것처럼 표문을 위조하여 올렸는데, 오소양이 병을 핑계로 아들 오원제를 留後로 삼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자 군대를 보내 武陽을 도륙하고 葉縣을 불태웠으며, 魯山, 襄城, 陽翟을 공략하고 洛陽을 위협하였다. 뒤에 裴度에게 토벌당하자 장수와 군사들 중에 이반자가 많았다. 원화 12년(817) 10월에 할거했던 蔡州가 李愬(이소)에게 격파되자 오원제는 포로로 잡혀 동년 11월에 長安에서 참수되었다.
역주2 薛仁……之謠 : 高宗 龍朔 원년(661)에 그동안 당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냈던 回紇의 수령 婆閏이 죽은 뒤 그 지위를 계승한 조카 比粟이 당나라와 대적하여 변경을 침범하자 고종은 鄭仁泰를 장수로 삼고 薛仁貴를 부장으로 삼아 군대를 끌고 天山으로 가서 鐵勒의 9개 부족을 치게 하였다. 철륵은 군사 10여만 명을 모아 이를 막고 또 날랜 기병 수십 명을 보내 도발하게 하였는데, 설인귀가 화살 세 발을 쏘아 세 사람을 죽이자 나머지 기병들이 모두 겁을 먹고 항복하였다. 설인귀가 이 승기를 타고 적을 공격하여 철륵을 격파하고 적의 수령 형제 3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오자, 당시 군중에서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을 평정시키니, 장사들이 크게 노래하며 변경 관문으로 들어오네.[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天山’은 일명 蔚督軍山으로 지금의 몽골 경내에 있는 산이다. ‘鐵勒’은 북방 소수 민족 이름이다.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上之下 龍朔 元年》
역주3 薛仁貴 : 614~683. 당나라의 名將이다. 이름은 禮, 자는 仁貴로, 絳州 龍門 사람이다. 젊어서는 농사를 지었다. 태종 때 募兵에 응하여 군대에 들어와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는데, 무용으로 전군에 이름이 났으며 그 공으로 右領軍中郞將에 임명되었다. 高宗 顯慶(656~660) 연간에 고구려를 격파하고 거란왕을 사로잡아 그 공으로 左武衛將軍에 임명되었다. 또한 天山에서 鐵勒의 9개 부족을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역주4 憲宗 : 778~820. 재위 805~820. 武則天을 포함하면 당나라 제13대 임금 李純이다. 초명은 淳, 시호는 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이다. 제12대 임금 順宗의 장자이다. 순종 永貞 원년(805)에 황태자에 책립되어 李純으로 개명하였다. 재위 중에 杜黃裳, 武元衡, 李吉甫, 李絳 등의 名臣을 재상으로 임용하고 폐정을 개혁하였다. 아울러 번진의 약화를 추진하여 元和 2년(807) 이래로 원화 13년(818)까지 鎭海節度使 李錡, 魏博節度使 田興歸, 成德節度使 王承宗, 淮西節度使 吳元濟, 淄淸節度使 李師道 등을 토벌하고 河朔 3鎭을 제압하여 천하에 위망을 떨쳐 元和中興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태자 李寧이 요절한 이후에 불교와 도교에 빠져들었고 환관 세력을 견제하는 데 실패하여 元和 15년(820)에 환관 王守澄과 陳弘志에게 시해당했다. 능침은 景陵이다.
역주5 蔡功旣成 : 당 헌종은 藩鎭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재위 기간 동안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들 중 元和 12년(817) 10월 겨울밤에 李愬가 8천 군사를 이끌고 蔡州를 습격하여 吳元濟를 사로잡고 淮西의 난을 평정한 것을 이른다. 淮西의 治所는 蔡州였다. 위의 ‘吳元濟’ 주석 참조.
역주6 : 대전본에는 ‘嶮’으로 되어 있다.
역주7 八關十六子 : 唐 穆宗 때 재상 李逢吉의 당여 여덟 사람, 즉 張又新, 李仲言, 李續之, 李虞, 劉栖楚, 姜洽, 張權輿, 程昔範과 이들에게 붙은 자 여덟 사람을 이른다. 이들이 모두 요직을 차지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부른 것이다. ‘關’은 胡三省에 따르면 ‘要’와 같다. 《資治通鑑 卷243 唐紀59 穆宗 下 長慶 4年 胡三省注》
역주8 祖珽……者也 : 23-4-가 참조.
역주9 : 사고본에는 ‘鑒’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