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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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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3-3-나(按)
按 此 武帝卽位之初也 是年 之言하여 亂國政하니 請皆罷하여 奏可라호대
13-3-나(按)
[臣按] 이것은 漢 武帝가 즉위한 초기의 일입니다. 이해에 승상 衛綰(?~기원전 131)이 상주하기를 “賢良으로 천거된 사람들 중 혹 申不害‧商鞅‧韓非‧蘇秦‧張儀의 설을 주장하여 국정을 어지럽게 한 자들이 있으니 모두 파면하소서.”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지만,
而質之本傳則仲舒 實發之하니 申‧商‧韓非 皆爲刑名之學而秦與儀 則爲縱橫之學者也
〈董仲舒傳〉을 보면 실은 동중서가 한 말입니다. 신불해‧상앙‧한비는 모두 刑名의 학술을 한 자들이며 소진과 장의는 縱橫의 학술을 한 자들입니다.
상앙은 秦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井田 제도를 폐지하고 阡陌을 무너뜨렸으며, 술수로 이웃 나라를 속이고 그 군대를 습격하여 쳐부수었으며,
刀鋸斧鉞之刑 橫加無罪하여 하니 其慘覈少恩 可知矣
칼과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베는 참혹한 형벌을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시행하여 渭水 가에서 죄수를 논죄할 때면 강물이 이 때문에 붉게 되었으니, 그 잔인하고 가혹하여 은혜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申‧韓之術 大抵類是而儀‧秦 闔時君而傾亂人國하니
신불해와 한비의 술수 역시 대체로 이와 비슷하며, 장의와 소진은 변설로 당시의 임금을 조종하여 남의 나라를 기울게 하고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此五人者 皆生民之蠹而正道之賊也 以其所挾으로 往往 徼一時富貴
이 다섯 사람은 모두 生民의 좀이요 正道의 도적이니, 가지고 있는 재주로 곳곳에서 한때의 부귀를 훔친 것입니다.
原注
故後來之士 企而慕之하니 漢初游說之士 大抵踵儀‧秦故轍而儒者如
하니
이 때문에 후대의 선비들이 발돋움하고 이들과 같이 되기를 선망했던 것입니다. 漢나라 초기 유세에 능한 선비들로 蒯通이나 朱建과 같은 자들은 대체로 張儀와 蘇秦의 옛 전철을 따랐으며, 賈誼나 晁錯와 같은 儒者들 역시 모두 申不害와 韓非를 천명했으니,
先王之道 闇鬱不明하여 雖通達之士라도 不免沒溺於異學이라 當是時也하여 不有仲舒 昌言排之 道術 何自而一乎리오
先王의 도가 어두워져 밝혀지지 않아서 비록 통달한 선비들이었음에도 이단의 학술에 빠지는 것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董仲舒가 소리 높여 이 설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道術이 어떻게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겠습니까.
라하니 詎不信然이리오
그러므로 先儒가 동중서의 공을 미루어 논하여서 ‘맹자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惜武帝 雖略行其言하시나 終不能寘諸丞弼之地하여 使綱紀世敎而 以縱橫進하고 之徒 以刑名用하여
안타깝게도 武帝가 비록 그 말을 조금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끝내 동중서를 보필하는 자리에 두어 世敎를 바로잡도록 하지 못하여, 嚴助나 朱買臣과 같은 자들이 縱橫術로 진출하고 張湯이나 杜周 같은 자들이 刑名術로 등용되었습니다.
하니 其人 蓋兼刀筆口舌之能者也 有天下者 可不深監乎此잇가
그리하여 무제 말년에 있었던 巫蠱의 화에 무제 부자가 서로 보전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江充 한 사람이 실로 이렇게 만든 것이니, 강충이란 자는 글과 변설에 두루 능한 자였습니다. 아, 천하를 소유한 임금이 이것을 깊이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역주
역주1 丞相……奏可 : 《前漢書》 卷6 〈武帝紀〉 建元 元年(기원전 140) 10월 조에 보인다.
역주2 申商韓非 : 13-2-나(按) ‘申不害’, ‘商鞅’, ‘韓’ 주석 참조.
역주3 蘇秦張儀 : 蘇秦(기원전 337~기원전 284)과 張儀(?~기원전 309)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縱橫家로, 모두 鬼谷子에게 權謀術數와 縱橫術을 배웠다. 蘇秦은 東周 洛陽 사람으로, 韓‧趙‧燕‧魏‧齊‧楚에 유세하여 동시에 여서 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여섯 나라가 合縱하여 秦나라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張儀는 魏나라 安邑 사람으로, 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소진이 이루어놓은 합종책을 깨트려 여섯 나라가 각각 秦나라를 섬기도록 함으로써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에 기반을 닦았다.
역주4 廢井……阡陌 : 秦 孝公이 12년(기원전 350)에 상앙의 건의를 받아들여 논밭의 구획 경계를 없앤 것을 이른다. ‘井田法’은 토지 제도의 하나로, 900畝를 1里로 삼아 井자 형태의 9개로 구획하여 가운데 100묘 중 80묘는 公田으로서 8명의 丁夫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나라에 세금으로 내고 20묘는 8명의 廬舍로 삼으며, 나머지 800묘는 그 8명의 私田으로 삼아 경작하게 한 제도이다. 실제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까지 정론이 없으나, 孟子가 이를 언급한 이래 유가에서는 이를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여겨왔으며 이후 張載(1020~1077)를 비롯하여 몇몇 儒者들에 의해 시도되기도 하였다. ‘阡陌法’은 상앙의 변법 중 하나로, ‘阡’과 ‘陌’은 남북과 동서로 난 農路를 이른다. 이 농로의 경계를 없앰으로써 부자들은 이 농로들을 연결하여 경작할 땅이 더 많아지게 되었고, 가난한 자들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朱熹는 ‘開阡陌’의 ‘開’를 開置의 開로 본 종래의 설을 부정하고 ‘무너뜨리고 깎는다[破壞剗削]’의 뜻으로 보았으며, ‘阡陌’을 《周禮》에서 말하는 遂의 徑, 溝의 畛, 洫의 涂, 澮의 道로 보았다. 즉 阡은 千이라는 뜻으로 溝 사이가 1,000묘이고 澮 사이가 1,000夫에 해당되는 땅이어서 畛과 道를 阡이라 하고, 陌은 百이라는 뜻으로 遂 사이가 100묘이고 洫 사이가 100夫에 해당되는 땅이어서 徑과 涂를 陌이라고 한 것이니, 상앙은 기존의 정전법에서 농지가 阡陌에 제한되고 경작자가 100묘에 제한되는 것을 보고 이를 무너뜨려서 인력과 地利를 남김없이 다하도록 한 것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5 秦本紀》 《前漢書 卷24 食貨志 上》 《春秋穀梁傳注疏 宣公 15年 范寧注》 《晦庵集 卷72 雜著 開阡陌辨》
역주5 以術……其師 : 상앙은 秦 孝公 22년(기원전 340)에, 한 해 전에 齊나라에 대패한 魏나라를 공격하여 황하와 崤山의 요충지를 차지함으로써 동쪽으로 제후들을 진압하는 기반을 닦도록 효공을 설득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에서는 公子 卬을 장수로 세워 이를 막도록 하였는데, 상앙은 공자 앙에게 편지를 보내 본래의 친분을 강조하며 싸우지 말고 직접 만난 화친을 하자고 청한 뒤, 이를 믿고 찾아온 공자 앙을 군사를 매복시켜 사로잡고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魏 惠王은 이에 河西의 땅을 秦나라에 바치고 수도를 安邑에서 大梁으로 옮겼으며, 상앙은 이 공으로 於(오)와 商 등 15개 읍을 봉지로 받고 商君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魏나라의 상황은 12-20-가 ‘梁惠王以……殉之’ 주석 참조. 《史記 卷68 商君列傳》
역주6 臨渭……之赤 : 《資治通鑑》 卷2 〈周紀2〉 顯王 31년(기원전 338) 조에 보인다. 渭水는 동쪽으로 흘러 秦나라의 도성 咸陽 남쪽을 지나서 潼關에 이르러 黃河로 들어간다.
역주7 : 사고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대전본에는 ‘椑’로 되어 있다.
역주9 蒯通 : ?~?. 秦‧漢 교체기의 辯士로, 본래 이름은 蒯徹이나 漢 武帝의 휘를 피하여 通으로 바꾸었다. 范陽 사람이다. 일찍이 范陽 현령 徐公과 武信君 武臣에게 유세하여, 서공은 무신군에게 투항하여 부귀를 유지한 채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고 무신군은 서공을 후히 대접함으로써 전쟁을 하지 않고도 燕‧趙 일대 30여 성의 항복을 받게 하였다. 또한 당시 천하의 형세가 韓信에게서 결정될 것을 알고 한신에게 劉邦을 배반하고 項羽와 함께 三分天下를 제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신은 얼마 뒤 역모로 몰려 죽으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항우가 괴통과 괴통의 친한 벗 安其生에게 작위와 봉읍을 제의했으나 두 사람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서에 전국시대 遊說客들의 변설을 논하고 자신의 평을 붙인 《雋永》이 있다. 혹자는 지금의 《戰國策》이 바로 《雋永》이라고 한다. 《前漢書 卷45 蒯通傳》
역주10 朱建 : ?~기원전 177. 秦‧漢 교체기 楚나라 사람이다. 黥布가 모반하지 못하도록 간언하고 모반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劉邦에게서 平原君의 봉호를 받았다. 청렴하고 강직하여 당시 呂太后의 총애를 받는 審食(이)其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심이기는 주건 어머니의 喪을 기회로 후한 조의금을 냄으로써 주건과 사귀기를 원하였다. 惠帝 때 심이기가 여태후와 간통한 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혜제의 寵臣 閎籍孺를 찾아가 설득함으로써 심이기를 살렸으며, 뒤에 여태후가 죽은 뒤 呂氏 일족이 주살당할 때에도 심이기를 위해 계획을 세워 그를 살아남게 하였다. 《史記 卷97 朱建列傳》
역주11 賈誼 : 기원전 200~기원전 168. 西漢 초기 저명한 政論家이자 문학가로, 洛陽 사람이다. 18세 때 郡內에 명성이 알려졌으며, 20여 세 때 漢 文帝의 부름을 받아 博士가 되고, 1년이 안 되어 다시 太中大夫가 되었다.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며 제도를 재정비하고 예악을 부흥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列侯와 대신들의 시기를 받아 長沙王의 太傅로 폄적되었다. 뒤에 다시 長安으로 돌아와 문제의 막내아들인 梁 懷王의 太傅가 되었다. 양 회왕이 낙마하여 죽자 깊이 자책하다 1년여 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지은 작품으로 〈過秦論〉‧〈論積貯疏〉‧〈陳政事疏〉 등의 산문과 〈吊屈原賦〉‧〈鵩鳥賦〉 등의 辭賦가 있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역주12 晁錯 : 기원전 200~기원전 154. 西漢 초기 漢 文帝 때의 관료로, 潁川 사람이다. 일찍이 張恢에게서 申不害와 商鞅의 刑名學을 배웠다. 太子舍人‧博士‧中大夫 등을 역임하였으며, 훗날의 景帝인 태자 劉啓에게서 ‘智囊’으로 불렸다. 상소하여 重農을 주장하였으며, 제후들의 죄과를 들어서 그들의 封地를 삭감할 것을 주청하여 王侯와 權貴의 미움을 받았다. 景帝 3년(기원전 154)에 吳‧楚 7國이 조조를 토벌하여 임금의 옆을 깨끗하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자, 竇嬰 등의 주청으로 長安 東市에서 腰斬되었다. 《史記 卷101 晁錯列傳》
역주13 : 사고본에는 ‘鼂’로 되어 있다.
역주14 皆明申韓 : 가의와 조조에 관하여 司馬遷의 〈太史公自序〉에 “가의와 조조는 신불해와 상앙을 천명하였다.[賈生晁錯明申商]”라는 내용이 보인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역주15 先儒……子下 : ‘先儒’는 송나라 胡安國(1074~1138)을 이른다. 《西山讀書記》 권30에 “동중서는 名儒이다. 《春秋》의 핵심 의리를 터득한 것이 많아 그 對策에 당시의 병폐들을 절실하게 짚어내었다. 百家를 축출하고 六經을 표창한 것과 같은 것은 그 공이 맹자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董仲舒名儒也 多得春秋要義 所對切中當世之病 如罷黜百家 表章六經 其功不在孟子下]”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6 嚴助 : ?~기원전 122. 西漢 明帝 때의 관료로, 본래 성명은 莊助이다. 東漢 明帝 劉莊의 휘를 피하여 嚴助로 고쳐 불렀다. 會稽郡 吳縣 사람이다. 漢 武帝 建元 원년(기원전 140)에 賢良方正으로 천거되어 對策을 통해 中大夫에 발탁되었다. 무제 元狩 원년(기원전 122)에 淮南王 劉安과 衡山王 劉衡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회남왕과 친분이 있다고 하여 棄市刑에 처해졌다. 일찍이 엄조는 무제에게 청하여 고향인 회계군의 태수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보고를 듣지 못한 무제가 특별히 조서를 내려 “너의 근황을 《春秋》의 의리에 따라 갖추어 보고하고 소진의 종횡술로 말하지 말라.[具以春秋對 毋以蘇秦從橫]”라고 말한 내용이 本傳에 보인다. 《前漢書 卷64 嚴助傳》
역주17 朱買臣 : 기원전 174?~기원전 115. 吳縣 사람으로, 《春秋》와 《楚辭》에 뛰어났다. 武帝 때 莊助의 추천으로 中大夫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會稽太守가 되었다. 뒤에 丞相 靑翟의 長史가 되었는데, 張湯이 승상의 일을 대행하며 자주 모욕을 줄 뿐 아니라 莊助의 죽음이 당시 廷尉였던 장탕과 관계가 있다고 하여 장탕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장탕을 고발하였다. 이 일로 장탕은 무제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하였고, 장탕이 죽은 뒤 주매신 역시 이 일로 무제에 의해 주살되었다. 《前漢書 卷64 朱買臣傳》
역주18 張湯 : ?~기원전 115. 張固라고도 한다. 杜陵 사람으로, 혹독함과 청렴함으로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법률을 좋아하였다. 淮南王‧衡山王‧江道王의 모반 사건을 맡으면서 武帝의 인정을 받아 太中大夫‧廷尉‧御史大夫를 역임하였다. 엄격한 법 적용을 주장하면서 여기에 《春秋》의 의리를 덧붙여 꾸몄으며 황제의 뜻을 사건 심리의 준거로 삼았다. 《前漢書 卷59 張湯傳》
역주19 杜周 : ?~기원전 95. 西漢 南陽郡 杜衍縣 사람으로, 서한 麒麟閣 11功臣 중 하나인 杜延年(?~기원전 52)의 아버지이다. 南陽太守 義縱의 추천으로 張湯의 심복이 되어 廷尉史가 되었다. 장탕을 본받아서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고 황제의 의중을 살펴 그에 맞게 법을 집행하였다. 수년 동안 廷尉로 있다가 잠시 파직되었으나 다시 執金吾가 되었는데, 도적을 잡으면서 桑弘羊과 衛황후의 조카들을 매우 혹독하게 다룬 일로 武帝에게 사사로움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 天漢 3년(기원전 98)에 御史大夫가 되었다. 2년 뒤에 병으로 죽었는데, 廷尉와 御史大夫로 지낸 10여 년간 모은 재물이 수만금이었다고 한다. 《前漢書 卷60 杜周傳》
역주20 晩年……爲之 : 漢 武帝(기원전 156~기원전 87) 征和 2年(기원전 91)에 일어난 巫蠱의 獄을 이른다. 당시 무제의 寵臣이었던 江充(?~기원전 91)은 태자였던 戾太子 劉據(기원전 128~기원전 91)와 알력이 있었는데, 무제 死後 여태자가 즉위하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여겨, 병든 무제에게 여태자가 저주하여 병이 난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여태자는 당시 甘泉宮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던 무제를 알현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려 하였으나, 시도가 실패하자 武器庫의 병기를 꺼내고 長樂宮을 호위하는 병졸을 징발하여 강충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반란으로 오인되어 무제의 토벌을 받고 도성을 탈출했다가, 사면을 받지 못하자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12-18-나(按) ‘武帝……千秋’ 주석 참조.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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