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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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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位하여爲諫議大夫하신대 自以不世遇라하여 展盡底蘊하여 無所隱하니
23-5-가
唐 太宗이 즉위하여 魏徵을 諫議大夫에 임명하자 위징은 자신이 세상에 드문 知遇를 받았다고 여겨서 온축한 재능을 남김없이 펴서 숨김이 없었으니,
凡二百餘奏 無不剴切當帝心者 由是하다
올린 2백여 건의 상주가 절절히 태종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태종은 위징을 尙書右丞에 임명하고 간의대부를 겸하게 하였다.
左右 有毁徵阿黨親戚者어늘 使按訊하신대 非是어늘
좌우의 신하 중에 위징이 친척을 편든다고 비방하는 자가 있자 태종이 溫彦博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심문하게 하였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彦博 曰 徵 爲人臣하여 不能著形迹遠嫌疑而被飛謗하니 是宜責也니이다 帝謂彦博行讓徵注+謂令彦博往責也.하신대
온언박이 말하였다. “위징이 신하가 되어 행적을 드러내어 혐의를 멀리 피하지 못함으로써 비방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태종이 온언박을 보내 위징을 꾸짖게 하자,注+溫彦博으로 하여금 가서 魏徵을 책망하도록 한 것을 이른다.
見帝謝曰 君臣同心 是謂一體 豈宜置至公‧事形迹이리잇고 若上下 共由玆路 邦之興喪 未可知也니이다
위징이 태종을 알현하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魏徵魏徵
“군주와 신하가 한마음인 것을 일러 한 몸이라고 합니다. 어찌 지극히 공적인 국사를 버려두고 개인의 행적에만 주의하겠습니까. 만약 상하가 모두 이 길을 간다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습니다.”
唐 太宗 唐 太宗
역주
역주1 23-5-가 : 《新唐書》 卷97 〈魏徵列傳〉에 보인다.
역주2 唐太……大夫 : 唐 高祖 武德 9년(626) 6월의 일이다. 《자치통감강목》 동년 6월 조에 “위징과 왕규를 간의대부로 삼았다.[以魏徵王珪爲諫議大夫]”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자치통감》 동년 6월 12일 戊辰日 조에는 “이세민이 평소 위징의 재능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용모를 고치고 예우하여 위징을 이끌어서 첨사 주부로 임명하였다. 또한 왕규와 위정을 휴주에서 불러와 모두 간의대부로 삼았다.[世民素重其才 改容禮之 引爲詹事主簿 亦召王珪韋挺於巂州 皆以爲諫議大夫]”, 동년 7월 11일 丁酉日 조에는 “간의대부 위징을 보내 산동을 시찰하고 위무하게 하였다.[遣諫議大夫魏徵宣慰山東]”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태종은 동년 6월 7일 癸亥日에 황태자가 되고 동년 8월 9일 甲子日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저본에서 즉위한 뒤에 魏徵을 간의대부에 임명했다는 내용과는 다르다. 즉 《자치통감》대로라면 여기에서 말하는 ‘卽位’는 황태자가 된 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신당서》 〈위징열전〉에는 “즉위한 뒤에 위징을 간의대부에 임명하고 거록현남에 봉하였다.[卽位 拜諫議大夫 封鉅鹿縣男]”, 《구당서》 〈위징열전〉에는 “즉위하자 위징을 발탁하여 간의대부에 임명하였다.[及踐祚 擢拜諫議大夫]”라고 되어 있어 저본과 동일하다. ‘諫議大夫’는 관직명으로 당나라 때에는 左右로 구분하여 각각 4명의 정원을 두었다. 정4품에 해당한다. 좌간의대부는 門下省에, 우간의대부는 中書省에 소속되었으며, 모두 간언을 담당하였다. 《資治通鑑綱目 卷39 高祖 武德 9年》 《資治通鑑 卷191 唐紀7 高祖 下之上 武德 9年》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舊唐書 卷71 魏徵列傳》
역주3 唐太宗 : 599~649. 재위 626~649. 당나라 제2대 황제로, 휘는 世民이며 시호는 文皇帝이다. 高祖 李淵의 2남으로, 부친을 도와 隋나라 말에 거병했던 세력들을 평정하고 唐을 건국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秦王이 되었다. 고조 武德 9년(626)에 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형인 태자 李建成과 동생 李元吉을 죽이고 부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후 均田制, 租庸調, 府兵制 등을 시행하고 突厥과 高昌 등 주변 나라들을 제압함으로써 국내외로 많은 치적을 세워 貞觀之治를 이룩하였다. 《晉書》‧《隋書》 등을 편수하게 하고 《五經正義》를 편찬하여 역대의 경전 해석을 통일하였으며, 태자를 위하여 《帝範》을 저술하였다.
역주4 魏徵 : 580~643. 唐나라의 名臣이다. 자는 玄成이며, 魏郡 內黃 사람이다. 隋나라 말에 元寶藏의 典書記로 있다가 李密에게 귀순했으며, 다시 唐 高祖에게 귀순하여 태자 李建成의 측근이 되었다. 玄武門의 변(626) 이후에는 태종의 부름을 받아 諫議大夫, 太子太師 등을 역임하고 鄭國公에 봉해졌으며, 태종 貞觀 16년(642)에 太子太師가 되었다.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5 拜尙……諫議 : 唐 太宗 貞觀 2년(628)의 일이다. ‘右丞’은 관직명으로, 당나라 제도에 정4품下였다. 정4품上인 左丞과 함께 尙書省 6部의 일을 총괄하여, 좌승은 이부‧예부‧호부의 일을 관장하고 우승은 병부‧형부‧공부의 일을 관장하였다. 또한 御史의 부당한 탄핵을 규탄할 수 있었으며, 조서를 封還하고 낭관의 선발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唐會要 卷58 尙書省諸司中 左右丞》
역주6 溫彦博 : 574~637. 당나라의 재상이다. 자는 大臨이며 太原 祁 사람이다. 禮部尙書 溫大雅의 아우이다. 수나라에서 文林郞 등을 역임하였고, 장령 羅藝를 따라 당나라에 귀의하여 幽州長史, 中書舍人 등을 역임하고 西河郡公에 봉해졌다. 당 고조 武德 8년(625)에 돌궐과 싸우다가 패하여 포로로 잡혀 극히 추운 지역인 陰山에 갇혔다. 태종이 즉위한 뒤 돌궐과 화해가 이루어져 돌아와 中書侍郞에 임명되었으며, 태종 貞觀 4년(630)에는 中書令에 임명되고 虞國公에 봉해졌다. 정관 10년(636)에 尙書右僕射에 임명되었다. 나라의 기밀을 관장할 때에는 빈객을 사절하였고 나라의 이해에 관계되는 일은 알면 간언하지 않음이 없었다. 病死하였다. 시호는 恭이다.
역주7 : 대전본에는 ‘證’으로 되어 있으나, 北宋 仁宗 趙禎을 피휘한 것이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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