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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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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帝 崩無子어시늘 太皇太后 召莽拜爲大司馬하시고 迎中山王爲後하니 是爲平帝 時年 九歲 太后 하사 委政於莽하시니
17-5-가
哀帝가 붕어하였는데 아들이 없자 太皇太后가 왕망을 불러 大司馬로 임명하고 中山王을 맞이하여 후사로 삼으니, 바로 平帝로서 당시 나이가 9살이었다. 태후가 臨朝稱制하여 국정을 왕망에게 맡겼다.
以大司徒 名儒 相三主하니 太后所敬이라하여 於是 盛尊事光하고 引光女壻하여 爲侍中하고
왕망은 大司徒 孔光이 명유이고 세 황제(成帝‧哀帝‧平帝)를 보좌하여 태후가 공경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에 공광을 매우 존숭하여 섬기고 공광의 사위 甄邯을 추천하여 侍中으로 임명하였다.
諸哀帝外戚及大臣居位素所不說者 皆傅致其罪注+傅, 讀曰附, 附益而引致之, 令入於罪.하여 爲請奏하여 令邯으로 持與光하니
애제의 여러 외척과 대신으로서 관직에 있으면서 평소 좋아하지 않던 자들을, 왕망이 모두 죄를 얽어서注+‘傅’는 ‘附(부)’로 읽으니, 傅致其罪는 덧붙이고 끌어들여 죄목에 해당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상주하여 견감으로 하여금 공광과 함께 맡도록 청하였다.
素畏謹이라 不敢不上之어든 白太后하여 輒可其奏하니 於是 附順者 拔擢하고 忤恨者 誅滅이라
공광은 평소 두려워하며 삼가는 성품이었으므로 감히 상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왕망이 태후에게 아뢰어 번번이 그 상주에 동의하니 이에 왕망에게 붙어서 순종하는 자는 발탁되고, 거스르고 원망하는 자는 주멸당하였다.
爲腹心하고 ‧甄邯 主擊斷하고 領機事하고 典文章하고 爲爪牙러라
王舜과 王邑은 심복이 되고 甄豐과 甄邯은 탄핵과 심판을 주관하였으며 平晏은 機務를 담당하고 劉歆은 文章을 담당하였으며 孫建은 爪牙가 되었다.
色厲而言方注+外示勁厲之色, 而假爲方直之言.이라 欲有所爲 微見風采하여 黨與 承其指意而顯奏之어든 稽首涕泣하여 固推하여
왕망은 낯빛이 엄숙하고 말이 方正하였으므로注+色厲而言方은 겉으로 굳센 기색을 보여주면서 거짓으로 바르고 곧은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슬며시 기색을 내비쳐 왕망의 당여가 그 뜻을 받들어 공개적으로 上奏하면 왕망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완강하게 사양하여,
上以惑太后하고示衆庶하더라
위로는 태후를 미혹시키고 아래로는 여러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역주
역주1 17-5-가 : 관련 내용이 《前漢書》 卷99上 〈王莽傳〉에 보인다. 元壽 2년(기원전 1) 6월에 애제가 후사 없이 죽자, 7월에 元帝의 庶孫인 中山王 劉箕子가 후사로 정해졌으며 9월에 즉위하였다. 애제가 죽던 달에 태황태후는 왕망을 大司馬‧領尙書事로 삼았는데 平帝가 즉위하면서 왕망이 국정을 장악하였다.
역주2 臨朝稱制 : 16-2-가 주석 ‘臨朝稱制’ 참조.
역주3 孔光 : 기원전 65~5. 자는 子夏로 曲阜 사람이다. 공자의 14세손으로, 어려서 經史에 밝았는데 成帝 때 博士가 되었다. 후에 僕射‧尙書令‧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곧아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성제에게 아들이 없어 丞相 翟方進‧大司馬 王根 등이 성제의 조카 劉欣을 태자로 세우자고 했을 때 혼자 반대하였다가 성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었다. 이후 성제가 죽자 태후의 동의를 받은 왕망에 의해 재상이 되고 博山侯에 봉해졌는데 傅太后의 專權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부태후가 죽은 뒤에 다시 출사하여 給事中‧御史大夫 등을 지내고 다시 승상이 되었다. 애제가 죽고 평제가 즉위한 뒤에도 왕망이 정사를 독점하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재상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직임이 太師로 바뀐 후에 老病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역주4 甄邯 : ?~12. 자는 子心으로 大司徒 孔光의 사위이다. 平帝 때 侍中‧奉車都尉를 지내고 承陽侯에 봉해졌다. 居攝 원년(6)에는 太保後丞이 되고 이듬해에는 大將軍에 올라 왕망의 심복이 되었다. 新나라가 건국되자 大司馬가 되고 承新公에 봉해졌다.
역주5 王舜 : ?~기원전 10. 東平陵 사람으로, 王音의 아들이자 王莽의 從弟이다. 永始 2년(기원전 15)에 부친의 작위를 계승하여 安陽侯가 되었으며, 哀帝 元壽 2년(기원전 1)에는 大司馬車騎將軍에 올랐다. 애제가 죽자 태황태후 王氏의 조서를 받들어 平帝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왕망이 攝政을 맡자 太傅‧左輔가 되어 태황태후에게 전국옥새를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왕망에게 여러 차례 上書하여 즉위를 권하였다. 왕망이 즉위하자 太師가 되고 安新公에 봉해졌다. 얼마 뒤 병사하였다.
역주6 王邑 : ?~23. 東平陵 사람으로, 成都景侯 王商의 아들이자 孝元皇后 王政君의 아우이다. 哀帝 建平 원년(기원전 6)에 왕상의 뒤를 이어 成都侯가 되고 侍中이 되었다. 平帝 때 光祿勳이 되었으며 왕망의 심복이 되어 찬탈을 도왔다. 居攝 2년(7)에 東郡 太守 翟義가 군사를 일으켜 왕망에게 반기를 들자 虎牙將軍이 되어 이를 진압하였다. 始建國 원년(9)에 隆新公으로 봉해지고 大司空이 되었다. 地皇 4년(23)에 王尋과 4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綠林軍과 싸웠으나 劉秀에게 패하였다. 更始帝의 군대가 長安에 입성하자 살해당했다.
역주7 甄豐 : ?~10. 자는 長伯으로 王莽의 심복이다. 漢 平帝 때에 左將軍‧大司空‧右伯太傅 등을 지냈으며 新나라가 건국된 뒤에는 更始將軍이 되고 廣新公에 봉해졌다. 왕망의 딸이자 평제의 황후였던 王皇后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아들 甄尋이 符命을 날조하여 술수를 쓰다가 왕망의 비위를 거슬러 하옥된 뒤 옥사하였다. 이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자살하였다.
역주8 平晏 : ?~20. 平陵 사람으로 哀帝 때의 승상 平當의 아들이다. 어려서 경학에 정통하였으며 平帝 元始 5년(5)에 大司徒가 되고 防鄕侯로 봉해졌다. 왕망의 한나라 찬탈을 도와 新나라에서도 대사도의 직임을 계속 맡았으며 太子太傅를 겸하고 新德侯에 봉해졌다. 후에는 왕망의 교만함에 불만을 품고 마찰을 빚어 관계가 소원해졌다.
역주9 劉歆 : 기원전 53?~23. 초명은 秀, 자는 子駿이었으나, 후에 歆으로 개명하고, 자를 穎叔으로 고쳤다. 沛縣 사람으로 楚元王 劉交의 5대손이자 劉向의 아들이다. 어려서 경전과 문장에 능하여 成帝의 부름을 받고 黃門郞이 되어 부친과 함께 궁중의 장서들을 교정하였다. 평소 왕망과 친분이 있었는데, 哀帝 때 왕망의 천거로 侍中‧太中大夫가 되었으며 騎都尉‧奉車光祿大夫에 올랐다. 平帝 때 왕망이 정권을 잡자 중용되어 왕망을 위해 그의 공덕을 찬양했다.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하자 國師‧嘉新公‧祁烈伯에 봉해졌다. 地皇 4년(23) 昆陽 전투 이후 新나라의 형세가 기울자 왕망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가 일이 누설되어 자살하였다.
역주10 孫建 : ?~15. 자는 子夏이다. 哀帝 元壽 2년(기원전 1)에 執金吾‧右將軍을 지냈으며 平帝가 左將軍‧光祿勳이 되었다. 왕망의 당여가 되어 찬탈에 협력하였으며 元始 5년(5)에는 成武侯에 봉해졌다. 居攝 2년(7) 東郡 太守 翟義가 반기를 들었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신나라가 건국되자 立國將軍에 임명되고 成新公에 봉해졌다.
역주11 : 대전본‧사고본에는 ‘遜’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전한서》에는 ‘讓’으로 되어 있다.
역주12 : 사고본에는 ‘以’로 되어 있다. 통행본 《전한서》에는 ‘用’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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