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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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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上元元年 하시고 迎上皇하사 自蜀歸京師하여하실새
時自으로 往起居하시고 上皇 亦間至이러시니
內侍 素微賤이라 雖暴貴用事하나 上皇左右 多輕輔國하니
輔國 意恨하고 且欲立奇功以固하여 乃言於上曰
上皇 居興慶宮하사 日與外人交通하시고 注+上皇侍衛大將.注+內侍, 久事上皇. 謀不利於陛下이란대
泣曰 聖皇 慈仁하시니 豈容有此리오 對曰 上皇 固無此意하시나 其如群小
陛下 當爲社稷大計하사 消亂未萌이니 豈得徇匹夫之孝리오
且興垣墉 淺露하니 非至所宜居 大內 深嚴하니 奉迎居之 與彼何殊리오
又得杜絶小人 熒惑聖聽이니 如此 上皇 享萬歲之安하시고 陛下 有三朝之樂하시리니 庸何傷乎리오
不聽하시다 興慶宮 先有馬三百匹이러니 輔國 矯敕取之하니 纔留十匹이러라
上皇 謂高力士曰 吾兒 爲輔國所惑하여 不得終孝矣로다
輔國 又令將士叩頭하여 請迎上皇居어늘
泣不應하신대 輔國 遂矯稱上語하여 迎上皇遊西內할새
武門하여 輔國五百騎하여 露刃遮道曰
皇帝 以興慶宮 湫隘라하여 迎上皇遷居西內로소이다 上皇 驚幾墜이러시니
遂如西內하사 居甘露殿하시니 所留侍衛兵 纔尪老數十人이요 陳玄禮等及舊宮人 皆不得留左右러라
輔國 與六軍大將으로 見上請罪한대 迫於諸將하여 乃勞之曰 卿等 恐小人 熒惑하여 防微杜漸하여社稷하니 何所懼也리오
高力士 流巫州하고 陳玄禮 勒致仕하다 上皇 日以不하사 因不茹葷하시고 辟穀하사 浸以成疾하시다
初猶往問安이러시니 旣而上亦有疾하사 但遣人起居러시니
其後 稍悔悟하사 惡輔國欲誅之호대 畏其握兵하여 竟猶豫不能決이러시다


7-10-가1
肅宗 上元 元年(760)에 兩京을 평정하고 上皇(玄宗)을 맞이하여 상황이 蜀에서 京師(長安)로 돌아와 興慶宮에 거처할 때의 일이다.
상이 때때로 夾城을 통해 가서 문후를 여쭙고 상황도 간간이 大明宮에 거둥하셨다.
내시 李輔國이 본래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비록 갑자기 귀하게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상황의 측근들은 대부분 이보국을 경시하니,
이보국이 원한을 품었고 또 특별한 공을 세워 총애를 공고히 하고자 하여 상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상황께서는 흥경궁에 거처하시면서 날마다 궁 밖의 사람들과 왕래하시고 陳玄禮와注+‘陳玄禮’는 上皇의 시위대장이다. 高力士는注+‘高力士’는 내시이니, 오랫동안 상황을 섬겼다. 폐하께 이롭지 않은 일을 꾸밉니다.”
上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聖皇께서는 자애롭고 어지시니 어찌 이런 일이 있도록 용납하시겠는가.” 이보국이 대답하였다. “상황께서야 참으로 이런 뜻이 없으시겠지만 그 주위의 소인배들의 경우에는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사직의 대계를 행하시어 난이 싹트기 전에 없애야 합니다. 어찌 필부의 효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흥경궁은 담이 낮고 궁 안이 들여다보이니 지존이 거처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대내는 담이 높고 삼엄하니 받들어 맞이하여 거처하시게 하면 저 흥경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소인이 상황을 현혹시키는 것을 막아 근절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면 상황은 만세토록 평안함을 누리시고 폐하는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니 어찌 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흥경궁에는 말 300필이 있었는데 이보국이 조칙을 가탁하여 이를 차지하니 겨우 10필만 남았다.
상황이 고역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아이가 보국에게 현혹당하여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겠구나!”
이보국이 또 六軍의 장졸들에게 명령하여 울부짖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상황을 맞이하여 西內에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도록 하였다.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응하지 않자, 이보국이 마침내 황상의 말씀이라고 속여서 상황을 맞이하여 서내에서 노닐다가 현무문에 이르자 이보국이 射生手 500騎를 이끌고 가서 칼을 뽑고 길을 막아서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흥경궁은 담이 낮고 좁다고 하시어 상황을 맞이하여 서내로 옮겨 거처하시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황이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마침내 서내로 가서 감로전에 거처하니 남아서 시위하는 군사는 등이 굽고 늙은 수십 명뿐이었고, 진현례 등과 예전부터 모시던 궁인은 모두 측근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보국이 六軍의 대장들과 함께 상을 알현하고 죄를 청하자, 상이 여러 장군들에게 압박을 받아 마침내 그들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경들이 小人이 현혹할까 염려하여 미약할 때 방비하고 차츰 젖어드는 것을 막아서 사직을 평안하게 하였으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고역사는 巫州에 유배하고, 陳玄禮는 을러서 致仕하게 하였다. 상황이 날로 편찮아져서 인하여 생선과 고기를 들지 않고 辟穀하여 점차 큰 병이 되었다.
상이 처음에는 그래도 가서 문안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상도 병이 들어 다만 사람을 보내 문안할 뿐이었다.
그 뒤 상이 점차 후회하고서 이보국을 미워하여 주살하고자 하였지만 그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7-10-가1 : 《資治通鑑》 卷221 〈唐紀37〉 肅宗 上元 元年(760)과 〈唐紀38〉 肅宗 上元 二年(761)에 보인다.
역주2 平兩京 : 唐 玄宗 天寶 14년(755) 11월 갑자일에 安祿山(703?~757)은 楊國忠 토벌을 명분으로 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같은 해 12월 정유일에 東京을 함락시켰고, 이어서 천보 15년(756) 6월 신묘일에 潼關을 함락시키고 西京으로 進攻하였다. 이에 현종은 서경을 버리고 蜀으로 몽진하였다. 정유일에 馬嵬에 이르렀을 때, 左龍武大將軍 陳玄禮가 楊國忠 등을 죽이고 楊貴妃를 賜死하게 하였다. 같은 달 기해일에 서경이 함락되었다. 8월 계사일에 황태자 李亨이 靈武에서 즉위하고 본격적인 반군 토벌을 전개하였다. 肅宗 至德 2년(757) 정월 安慶緖는 아버지 안녹산을 살해하고 반군세력을 장악하여 唐朝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 唐朝 역시 이에 대처하는 동시에 양경을 탈환하기 위해 회홀(回紇 Uyүur)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天下兵馬元帥 廣平王 李俶과 天下兵馬副元帥 郭子儀(697~781)의 지휘 하에 토벌을 전개하였다. 회홀의 카를룩 카간(Qarlἵq qaүan 葛勒可汗 재위 747~759)은 장남인 빌게 타르두쉬 울룩 빌게 야브구(bilge tarduš uluү bilge yabүu 太子 葉護)와 함께 4천의 기병을 파병하였다. 당-회홀 연합군은 지덕 2년 9월 임인일 안경서의 반군을 협공하여 6만을 참수하고 서경을 수복하였으며, 10월 新店에서 재차 반군을 격파하여 10여만 명 이상을 참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결국 안경서는 낙양을 포기하고 鄴으로 후퇴했다. 회홀은 양경의 수복을 지원한 대가로 3일 동안 동경을 약탈하였고 전비를 보상받았다. 그리고 매년 삭방군에서 비단 2만여 필을 세폐로 지급받았다. 아울러 숙종 乾元 1년(758) 회홀의 요청에 따라 숙종은 眞公主인 寧國公主를 카를룩 카간에게 和蕃公主로 보냈다. 《新唐書 玄宗本紀》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 문학과지성사, 2005, 163~183쪽》
역주3 兩京 : 《新唐書》 〈地理志 關內道〉에 따르면, 兩京은 長安(지금의 西安)과 洛陽을 말한다. 당의 수도인 長安은 玄宗 天寶 元年(742) ‘西京’, 至德 2년(757) ‘中京’, 上元 2년(761) ‘西京’, 代宗 元年(762) ‘上都’로 개칭되었다. 洛陽은 貞觀 6년(632) ‘洛陽宮’으로 불리다가, 顯慶 2년(657) ‘東都’가 되었다. 天寶 元年(742)에는 ‘東京’으로 개칭되었는데, 上元 2년(761) 京에서 폐지되었다가 代宗 원년(756)에 다시 ‘東都’가 되었다.
역주4 興慶宮 : 大明宮의 남쪽 隆慶坊에 소재한 궁이다. 본래 唐 玄宗의 藩邸였던 것을 玄宗 開元 2년(714) 개축하여 궁으로 삼았다. 개원 16년(728) 이후부터 至德 2년(757) 安史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될 때까지 현종이 상주하며 정무를 보았다. 궁의 北西隅에 興慶門이 있었고 북쪽에는 興慶殿, 大同殿, 大同門이 있었다. 西南隅에는 향연을 벌이던 花萼相輝樓와 정무를 보던 勤政務本樓가 있었다.
역주5 夾城 : 玄宗 開元 20년(732) 大明宮과 興慶宮의 사이에 夾城複道를 만들었다. 夾城複道는 大明宮에서 通化門을 경유하여 興慶宮으로 이어졌는데, 외부에 이동 정황을 노출하지 않은 채 이를 통해 두 궁을 왕래하며 曲江의 芙蓉園까지 거둥할 수 있었다. 《舊唐書 地理志 關內道》 《新唐書 地理志 關內道 上都》
역주6 大明宮 : 太極宮의 동북쪽 龍首原에 소재한 궁으로, 본래 貞觀 8년(634) 永安宮이라는 이름으로 太宗이 太上皇인 高祖 李淵의 거처로 지었다. 정관 9년(635) 정월 대명궁으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5월 태상황 이연이 붕어하면서 건설이 중단되었다. 高宗 龍朔 2년(662) 대명궁을 중건하고 蓬萊宮으로 개명하였다. 용삭 3년(663) 고종이 臨御하여 상주하다가 중종 때 다시 태극궁으로 임어하여 상주하였다. 則天武后가 잠시 거처한 적도 있다. 新龍 원년(705) 다시 대명궁으로 개명하였다. 開元 2년(714) 玄宗이 대명궁에 거처하였으나, 개원 16년(728) 다시 흥경궁으로 임어하였다. 지덕 2년(757) 장안 수복 이후 肅宗이 임어하여 상주한 이래로 황제가 상주하는 궁으로 확정되었다. 정문은 丹鳳門, 정전은 含元殿, 함원전의 후전은 宣政殿이다. 別殿‧亭‧觀 30여개 소가 있었다. 선정전의 좌우에는 中書省‧門下省‧弘文館‧史館이 있었다. 《舊唐書 地理志 關內道》 《新唐書 地理志 關內道 上都》
역주7 李輔國 : 704~763. 唐 玄宗 연간부터 代宗 연간 사이에 활동했던 환관으로, 본명은 靜忠이다. 본래 閑廐馬를 기르는 집안 출신의 閹奴로, 용모가 비루하였다. 어려서 高力士의 시종으로 입궁하였고, 뒤에는 皇太子 李亨을 모셨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馬嵬驛에서 楊國忠 등을 주살하는 데 참여하였고, 태자 이형에게 中軍을 나눠 朔方으로 나가 河隴의 군세를 모아 부흥을 도모하도록 설득하였다. 靈武에서 李亨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여, 숙종의 즉위 후에 ‘護國’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元帥府 行軍司馬로 발탁되었다. 양경을 수복한 뒤 郕國公에 봉해졌으며, 다시 ‘輔國’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太上皇 玄宗이 復位를 도모할 것을 우려하여 上元 元年(760) 興慶宮에 있던 현종을 太極宮 甘露殿에 유폐하였고, 현종의 측근인 高力士 등을 축출하였다. 상원 연간에 兵部尙書에 제수되었다. 寶應 원년(762) 숙종이 위중하자 張皇后는 숙종의 3남인 越王 李係를 옹립하기 위해 宦官 段恒俊 등과 공모하여 太子인 李豫(726~779)와 이보국을 죽이려 하였다. 이를 미리 알고서 환관 程元振(?~764) 등과 禁軍을 동원하여 장황후와 월왕 이계 등을 잡아 幽閉시켰고 얼마 후 이들을 살해하였다. 代宗(재위 762~779)이 즉위한 뒤 尙父로 불려지고 司空 中書令에 임명되었으나, 권력을 전횡하다가 대종의 反感을 사서 결국 보응 원년(762) 면직되고 博陸王에 봉해졌으나 얼마 후에 대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太傅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醜이다.
역주8 : 대전본에는 ‘龐’으로 되어 있다.
역주9 陳玄禮 : ?~?. 唐 玄宗 연간의 장군이다. 처음 果毅都尉가 되어 李隆基(玄宗)를 따라 기병하여 韋皇后(660?~710)를 주살했다. 현종이 즉위하자 禁軍龍武大將軍이 되어 궁중 숙위를 맡았다. 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장안이 함락되자, 촉으로 몽진하던 玄宗을 호종하였다. 馬嵬坡에서 楊氏 일족에 불만을 품은 將兵의 반발이 일어나자, 태자 李亨, 李輔國 등과 모의하여 楊國忠을 주살하고 현종에게 楊貴妃를 賜死하도록 간하였다. 장안을 수복한 뒤 至德 2년(757) 현종이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蔡國公에 봉해지고 식읍 3백호를 받았다. 현종이 西內에 유폐되자 致仕하였고 얼마 후에 병으로 죽었다.
역주10 : 사고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는데, 淸代의 피휘이다. 이하 같다.
역주11 高力士 : 684~762. 唐 高州 良德(지금의 廣東省 電白縣) 사람이다. 馮盎의 증손으로, 본래의 성명은 馮元一이다. 聖曆 元年(698) 환관으로 입궁하여 환관 高延福의 양자가 되면서 개명하였다. 臨淄王 李隆基(685~762)에게 협력하여 唐隆 1년(710) 韋皇后를 축출하고 先天 1년(713) 太平公主(665?~713)를 축출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현종이 즉위하자 渤海郡公에 봉해졌으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內廷을 장악하여 왕명의 출납에 간여하였다. 驃騎大將軍을 거쳐 開府儀同三司에 올랐다. 그는 開元 28년(740) 楊貴妃(719~756)를 후궁에 들여왔으며, 李林甫(?~752)와 楊國忠(?~756) 등을 등용하였고, 安祿山(705~757)을 추천하여 安史의 난의 계기를 만들었다. 安祿山의 난이 발발하여 장안이 함락되자 현종을 호종하여 蜀으로 들어갔다. 上元 원년(760) 상황 현종이 太極宮에 유폐되었을 때 李輔國의 탄핵을 받아 巫州(지금의 湖南省 黔陽)로 放逐되었다. 寶應 원년(762) 현종이 붕어하자, 사면되었으나 朗州(지금의 湖南省 常德)에서 굶어 죽었다. 揚州大都督에 추증되고 현종의 능인 泰陵(지금의 陝西省 蒲城縣)에 配葬되었다.
역주12 : 대전본‧사고본에는 뒤에 ‘宮’이 있다.
역주13 : 사고본에는 ‘親’으로 되어 있다.
역주14 六軍 : 北衙六軍을 말한다. 《新唐書》 卷59 〈兵志〉에 따르면 北衙六軍은 南衙十六衛에 대별되는 唐代 皇帝의 친위군으로, 禁軍에 속한다. 그 시초는 唐 高祖 李淵이 太原에서 기병하여 천하를 평정한 후에 장병을 귀환시켰는데, 남아서 숙위하기를 원한 3만 명에게 渭北 白渠의 토지를 분급해주고 原從禁軍이라고 한 것에서 연유하였다. 貞觀 초에 太宗은 궁술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北門에 入番하도록 하고 百騎라고 하였고, 또 北衙七營을 설치하여 정예병을 선발하여 배치하였다. 정관 12년(638) 현무문에 좌우둔영을 설치하고 飛騎라고 하였다. 高宗 龍朔 2년(662) 府兵越騎와 步射를 試取하여 左右羽林軍을 두어 조회 때 황제를 친위하도록 하였다. 무후 이후 중종까지 百騎를 점차 확대‧개편하여 ‘萬騎’로 고쳤다. 이융기는 이를 이용하여 위황후를 축출하고, 左右龍武軍으로 개편하여 元功臣子弟로 선발하였다. 숙종은 至德 2년(757) 左右神武軍을 설치하고 元從‧扈從官의 자제 등으로 보충하였다. 좌우 우림‧용무‧신무군이 곧 北衙六軍이다.
역주15 : 대전본‧사고본에는 ‘哭’으로 되어 있다.
역주16 西內 : 《舊唐書》 〈地理志 關內道〉에 따르면, 西內는 太極宮으로 皇城의 西北隅에 위치하였다. 그 정문은 承天門, 正殿은 太極殿, 그리고 태극전의 後殿을 兩儀殿이라고 하였으며, 內別殿‧亭‧觀 35개소가 있었다. 한편 京師의 동쪽에는 大明宮과 興慶宮이 있어 각각 그 위치에 따라 東內, 南內라고 하였으며 서내와 합하여 통칭 三內라고 하였다.
역주17 玄武門 : 大明宮의 北門이다.
역주18 : 대전본‧사고본에는 ‘睿’로 되어 있다.
역주19 射生 : 《新唐書》 〈兵志〉에 따르면 唐 肅宗 至德 2年(757)에 騎射에 뛰어난 무사 1천 명을 선발하여 射生軍을 편성하고 供奉射生官 또는 殿前射生手라고 하였는데, 이를 左廂과 右廂으로 나누고 左右英武軍으로 총칭하였다. 代宗 寶應 연간에는 射生軍을 동원하여 禁中으로 들여 난을 평정하고 寶應功臣이란 명칭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寶應軍이라고 부르고 禁軍의 하나가 되었다. 德宗 貞元 5년(789)에는 左右神威軍으로 개칭하였다.
역주20 : 대전본‧사고본에는 ‘安’으로 되어 있다.
역주21 : 대전본‧사고본에는 ‘懌’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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