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倉公無男하고 有女五人이러니 將行會逮에 罵其女曰 生子不生男하니 有緩急에 非有益也로다
其少女緹縈自傷泣하고 乃隨其父至長安하야 上書曰 妾父爲吏에 齊中皆稱其廉平이러니 今坐法當刑이라 妾傷夫死者는 不可復生이요 刑者는 不可復屬이니 雖復欲改過自新이나 其道亡繇也라 妾願沒入爲官婢하야 贖父刑罪하야 使得自新하노이다
蓋聞有虞之時에 畫衣冠異章服以爲僇이로되 而民弗犯하니 何則고 至治也라
今法有肉刑三而姦不止하니 其咎安在오 非乃朕德薄而敎不明歟아 吾甚自愧하노라
詩曰 愷弟君子여 民之父母라하니 今人有過에 敎未施而刑已加焉하니 或欲改行爲善이라도 而道亡繇至라 朕甚憐之하노라
夫刑至斷支體刻肌膚면 終身不息하니 何其刑之痛而不德也오 豈稱爲民父母之意哉리오 其除肉刑하고 有以易之하야 具爲令하라
上躬修玄默하고 而將相이 皆舊功臣이라 少文多質하고 懲惡亡秦之政하야 論議務在寬厚하야 恥言人之過失이라
化行天下하야 告訐之俗易하니 吏安其官하며 民樂其業하야 畜積歲增하고 戶口䆮息하며 風流篤厚하고 禁網疏闊하야 罪疑者予民하니 是以刑罰大省하야 至於斷獄四百하야 有刑錯之風焉이러라
제齊나라
태창령太倉令 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자 조령을 내려 옥리에게 그를 체포하여 제나라에서
장안長安으로 이송하게 하였다.
태창공이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체포되어 이송될 때에 그 딸들에게 욕하기를, “자식을 낳았어도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니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유익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그 막내딸 순우제영淳于緹縈이 상심하여 울면서 그 아버지를 따라 장안에 이르러서 상서上書하기를, “첩妾의 아비가 관리가 되어 제齊나라에 있을 때에 모두들 그 청렴하고 공평함을 칭송했는데 지금 법에 저촉되어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릇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육형肉刑을 당한 자는 〈잘린 사지를〉 다시 붙일 수 없으니, 비록 다시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을 첩은 슬퍼합니다. 첩은 제가 관비官婢로 몰입沒入되어 아비의 형벌을 대속代贖해서 아비가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서를 아뢰자 천자가 그 뜻을 가련히 여겨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듣건대 순舜임금 때에 옷과 관冠에 그림을 그리고 장복章服을 다르게 하여 수치스럽게 했는데도 백성들이 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지극히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지금 법에
간사함이 그치지 않으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작고 교화가 밝게 행해지지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심히 스스로 부끄러워하노라.
그러므로 백성을 훈도訓導하는 것이 순수하지 못해서 어리석은 백성이 죄에 빠지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허물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기도 전에 형벌이 이미 더해지니 혹시 행실을 고쳐서 선을 하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없으니 짐이 심히 가엾게 여긴다.
형벌을 받아 사지가 잘리고 살갗에 자자刺字를 하면 종신토록 그 사지와 살갗을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어쩌면 그리도 형법이 고통스럽고 부덕하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라고 일컫는 뜻이겠는가. 육형을 폐지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제도를 만들도록 하라.”
문제가 몸소 청정淸淨과 무위無爲의 도를 닦고 장상將相이 모두 옛 공신들이라 문식文飾이 적고 질박함이 많았고 망한 진秦나라의 정치를 징계하고 미워해서 논의할 때에 관대하고 후덕하게 하려고 힘써서 남의 과실過失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교화가 천하에 행해져서 고알告訐하는 풍속이 바뀌니 관리는 자기 관직을 편히 여기고 백성은 그 생업을 즐거워해서 재물이 해마다 늘어나고 호구가 점점 불어나며 풍속은 돈독하고 후덕하고 금령은 주밀하지 않아서 죄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백성의 편을 들어주니, 이 때문에 형벌이 크게 줄어들어 한 해 판결을 한 것이 400건뿐이어서 형벌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기풍이 있었다.